낭독의 발견http://www.kbs.co.kr/2tv/sisa/nangdok/
조선의 여성, 그 아름답고 슬픈 시인들의 노래.
- 조선시대 여성문학 편
- 2010년 11월 1일 (월) 밤 12:35 (KBS 2TV)
채련곡(采蓮曲) - 연밥따는노래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가을 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란주) 연꽃 깊은 곳에 목란 배를 매어두고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 허난설헌 詩 <채련곡采蓮曲>
望仙謠(망선요) -문집외(外)시 ※오언고시의 망선요
王喬呼我遊(왕교호아유) 신선왕교가 함께 노닐자고,
期我崑崙墟(기아곤륜허) 곤륜산에서 나를 기다렸다네,
朝登玄圃峰(조등현포봉)
아침에 현포봉우리에 올라서望遙紫雲車(망요자운거)
멀리 붉은 구름의 수레를 바라보네紫雲何煌煌(자운하황황) 붉은 구름 어찌나 빛나든지
玉蒲正渺茫(옥포정묘방) 옥포는 그저 아득하구나
숙忽凌天漢(숙홀능천한) 홀연히 은하수 넘어서
※숙(攸아래火)飜飛向扶桑(번비향부상) 해뜨는 부상을 향해 날아가니
扶桑幾千里(부상기천리) 부상 몇 천리 되는 그곳
風波阻且長(풍파조차장) 풍파가 길을 막아 더욱 멀구나
我慾舍此去(아욕사차거) 이처럼 어려운 길 버리고 싶지만
佳期安可忘(가기안가망)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랴
君心知何許(군심지하허) 그대 마음 어디쯤 있는지 알기에
賤妾徒悲傷(천첩도비상) 내 몸은 더욱 슬프기만 하여라
-명시종"출전
※명시종 (明詩綜) -음텅하다 하여 난설헌집에는 없고 명시종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청나라의 주이존(朱彛尊)이 편찬한 명나라 시집. 홍무(洪武)에서 숭정(崇禎)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 시인의 시와 민요를 수집하여 수록하고, 작자마다의 소전(小傳)과 여러 문장 대가의 시평을 기록하였다. 100권.
※허미자 저"허난설헌연구"의 망선요도 있습니다.
望仙謠(망선요)- 허난설헌 ※7언고시 망선요
瓊花風軟飛靑鳥 (경화풍연비청조) 아름다운 꽃 바람에 하늘거리고 파랑새가 날아오르는 사이
王母麟車向蓬島 (왕모인차향봉도) 서왕모님 기린 수레 타고 봉래섬으로 향하시네.
蘭旌蘂피白鳳駕 (난정예피백봉가) 난초 깃발 꽃술 장식 장막 드리워진 눈부신 봉황 수레여,
笑倚紅란拾瑤草 (소의홍란습요초) 미소지으며 난간에 기대어 향기로운 풀꽃을 뜯으시네.
天風吹擘翠霓裳 (천풍취벽취예상) 하늘에서 바람 불어와 파르스름한 무지개 옷이 흩날리고
玉環瓊佩聲丁當 (옥환경패성정당) 옥가락지와 옥패물이 부딪쳐 청아한 소리 울려 퍼지네.
素娥兩兩鼓瑤瑟 (소아양양고요슬) 달나라 선녀들 둘씩 짝을 지어 아름다운 비파를 연주하니
三花珠樹春雲香 (삼화주수춘운향) 일년에 세 번 꽃 피는 나무엔 봄 구름 향기가 감도누나.
平明宴罷芙蓉閣 (평명연파부용각)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부용각 잔치는 끝나고
碧海靑童乘白鶴 (벽해청동승백학) 푸른 신선 바다의 신선은 흰 학에 올라타시네.
紫簫吹徹彩霞飛 (자소취철채하비) 뚫는 듯 들려오는 자줏빛 피리 소리에 오색 노을 흩어지고
露濕銀河曉星落 (노습은하효성락) 이슬 젖은 은하의 강 속으로 새벽 별이 떨어지네
- 허난설헌(許蘭雪軒)
망선요(望仙謠)-선비를 바라보면서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을 읊은시
楊柳枝詞(양류지사)- 허난설헌
버드나무 강가에서 이별을 노래함
楊柳含煙灞岸春(양류함연파안춘) 수양버들에 안개 서리고 파강 기슭에 봄이 오니
年年攀折贈行人(년년반절증행인) 해마다 가지 꺾어 길 떠나는 님께 드리네.
東風不解傷離別(동풍불해상이별) 봄바람이 이별의 쓰라린 마음 달래 주지 못하고
吹却低枝掃路塵(취각저지소로진) 낮게 늘어진 버들가지엔 봄바람 불어와 길바닥 먼지를 쓸어 가는구나.
靑樓西畔絮飛揚(청루서반서비양) 청루의 서쪽 기슭에 버들 솜이 흩날리고
烟鎖柔條拂檻長(연쇄유조불함장) 안개에 덮인 부드러운 버들가지는 난간을 스치었어라.
何處少年鞭白馬(하처소년편백마) 어디 사는 소년이 백마를 채찍질하며 타고 와서
綠陰來繫紫遊韁(녹음래계자유강) 녹음 우거진 곳에 자줏빛 고삐를 매어 놓는구나.
灞陵橋畔渭城西(파릉교반위성서) 파릉교 기슭에서 위성의 서쪽까지
雨鎖烟籠十里堤(우쇄연롱십리제) 빗속에 십리 둑방 길은 안개로 자욱하여라.
繫得王孫歸意切(계득왕손귀의절) 버들가지에 고삐 매었던 귀공자는 돌아오고픈 마음 간절한데
不同芳草綠萋萋(부동방초록처처) 이 몸의 신세는 꽃다운 풀들이 푸르게 우거진 것만도 못하구나.
條妬纖腰葉妬眉(조투섬요엽투미) 버들가지는 가는 허리 같고 버들잎은 고운 눈썹 같은데
怕風愁雨盡低垂(파풍수우진저수) 바람이 두렵고 비에 시름겨워 낮게 드리웠어라.
黃金穗短人爭挽(황금수단인쟁만) 황금빛 가지를 사람들이 다투어 잡아당기는데
更被東風折一枝(갱피동풍절일지) 봄바람이 다시 불어와 또 한 가지 꺾여지는구나.
按轡營中占一春(안비영중점일춘) 안비영 성안에는 봄이 한창 무르익고
藏鴉門外麴絲新(장아문외국사신) 장아문 밖 실버들은 새로이 물오르네.
生憎灞水橋頭樹(생증파수교두수) 밉기도 하여라. 파수교의 버드나무는
不解迎人解送人(불해환인해송인) 오는 사람 고삐는 안 풀어주고 가는 사람 고삐만 풀어주는구나
류지용님의 낭독 (의역해서)
灞陵橋畔渭城西 (파릉교반위성서) 파릉다리에서부터 위성의 서쪽까지
雨鎖烟籠十里堤 (우쇄연롱십리제) 십리둑 길이 안개비에 흐리게 잠겨있네
繫得王孫歸意切 (계득왕손귀의절) 고운 님 떠나려는 마음을 남몰래 묶었으니
不同芳草綠萋萋 (부동방초록처처) 우거진 풀숲을 거닐어도 딴 생각에 잠기네
※허난설헌 묘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소재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허난 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전면에 나란히 있다
두 자녀의 묘지를 보면서 얼마나 피 눈물을 흘렸을까요!
통곡이라 할까! 절규라 할까!
곡자(哭子) - 허난설헌
자식의 죽음에 곡하다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 (애애광능토)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의 땅에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 마주보고 솟아 있구나
蕭蕭白楊風 (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부는데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숲속에선 도깨비 불이 반짝거린다,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종이돈 살라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 (현주존여구) 물탄 주로 너희들 무덤에 제 지내노라
應知弟兄魂 (응지제형혼) 응당 알리라 너희 남매 혼백은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밤세도록 서로조차 어울려 놀겠지
縱有腹中孩 (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해도
安可糞長成 (안가분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浪吟黃臺詞 (랑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피눈물 흘리며 소리삼겨 슬퍼하노라
※玄酒- 제사(祭祀) 때에 술 대신(代身)에 쓰는 맑은 찬물
추한(秋恨) - 허난설헌
가을의 정한
絳紗遙隔夜燈紅 (강사요격야등홍) 붉은사창에 저멀리 강등불 반짝이는데
夢覺羅衾一半空 (몽각나금일반공) 꿈을 깨니 비단이불 반쪽이 비었구나
霜冷玉籠鸚鵡語 (상생옥롱앵무어) 서리차가운 조롱에 앵무새는 지져귀고
滿堦梧葉落西風 (만계오엽락서풍) 섬돌 가득 오동잎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네
※위의 시는 낭독의 발견에서 낭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시다
허난설헌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한국사전의 내용과 그녀의작품 세계를 정리하여 본다
※ 한국사 전
한국사전 23회-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
방송 : 2007. 12. 8 (토). (KBS 1TV)
1. 허씨 가문 여덟살 여자신동,허난설헌
-허 난설헌은 어떻게 그런 시대에 천재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 허난설헌(許蘭雪軒.1563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강릉(江陵)출생,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자는 경번(景樊),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한 여인이 슬픔에 잠겨있다
딸과 아들을 모두 잃은 기구한 운명
이 여인은 조선의 천재시인 허난설헌이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기에
조선에서 그녀의 시는 끝내 외면받았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유명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나서
글과 학문을 마음껏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수준높은 시를 남겼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가
'조선땅에
여성으로 태어나서
김성립의 아내가 된
이 세가지를 한(三恨)스러워 했다' 고 말합니다
허난설헌은 왜 조선땅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러워 했던 것일까요?
허난설헌이 살았던 16C 조선은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펼처 보일 수 있는 그런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허난설헌의 시는 철저히 외면 당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되살아 났습니다
중국 북경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가도서관
제작진은 이곳에서 특별한 책 한 권을
만날 수 있었다
제목은 '조선시선'
"조선시선은 명나라때 만들어진 판본으로 조선 시인의 시집입니다.
(중국에서도) 매우 진귀한 고서입니다 -짜오치엔 박사
이 책속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실려있다
조선시대 시인뿐만 아니라, 고려, 신라시대 시인들까지 총망라 되어있다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의 시를 비롯해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
그리고 '許妹氏'로 기록된 허난설헌의 시가 이책에 들어있다
그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허난설헌의 시다
그렇다면 '조선시선'
이책은 어떻게 중국에서 출판이 된 것일까?
허난설헌이 죽은 이듬해인 1590년
허균은 집에 남아있던 누이의 시와 평소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써서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죽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을 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남동생 허균에 의해 허난설헌의 시가 세상에 처음 나오게 된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당시 대문호였던 유성룡에게 보여주었다
제 누이의 시를 한번 모아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異哉 非婦人語 何許氏之門 多奇才也 (리재 비부인어 하허씨지문 다기재야?)
“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로다. 어떻게 하여 허씨의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歸且收拾而實歲之(귀차수습이실세지)
"돌아가 간추려서 보배롭게 간직하여 한 집안의 말로 비치하고
반듯이 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 서애 유성룡
유성룡은 허난설헌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곧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당시 명나라 지원병과 함께 사신이 조선을 찾았는데
그 중 오명제가 있었다
조정은 말재주가 뛰어난 허균을 보내 사신을 맞이하게 했다
문인이었던 오명제는 조선의 시와 문장을 수집하고 있었다
이때 허균은 다른 조선 문인의 시와 함께
허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오명제에게 건네준다
오명제는 허난설헌의 시에
큰 관심을 표했다
명나라로 돌아간 오명제는
1600년에 이 시들을 모아 '조선시선'을 출판한다
허난설헌의 시가 이 책을 통해 중국에 알려지게 된것이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오자
문인들이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조선 시와 허난설헌의 신선시를 구하고 싶어했다
-오명제<조선시선>
이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허난설헌의 시를 얻어가고 싶어 했고
그런 이유로 허균을 찾았다
그 만큼 허난설헌의 시는 명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 땅에서 최초의 한류 열풍을 불러온 것이다
"명말기에 여성시가 유행하면서.
많은 여성 시인과 시집 등장했습니다.
이때 한국에도 여성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허난설헌입니다."
- 중앙민족대학 치칭푸교수
<※ 이후에도 허난설헌의 시는
명나라에서<조선시선(朝鮮詩選)>을 비롯해
고금여사(古今女史)>,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시종(明詩綜)>, <긍사(亘史)>,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이담(耳譚)>, <명원시귀(名媛詩歸)> 등 여러 책에 수록되어,
중국시단에 신화처럼 이어져 내려왔다
1700년대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되어 널리 애독되었다.>
자칫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허난설헌의 시는
남동생 허균의 덕분으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초당 허엽(許曄으로 첫째 부인 청주한씨에게서 허성 (許筬)을,
부인과 사별하여 둘째부인 강릉 김씨에게서 허봉(許篈)과 허난설헌, 허균(許筠)을 얻는데
이들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허씨 5문장가'로 불린다
<※ 허난설헌의아버지 초당 허엽(許曄)은 즉,허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여동생이며,
균(筠: 홍길동전 저자)의 누이이다>
하지만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한문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왕실의 공주에게도 한글 이상은 가르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렇다면 허난설헌은
어떻게 한문을 배워 한시를 짖게 된 것일까요?
강릉시 초당동
초당이란 마을이름은 허나설헌의 아버지 허엽(曄)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허난설헌의 생가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양반 명문가에 딸로 태어난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초당 허엽(許曄으로 첫째 부인 청주한씨에게서 허성 (許筬)을,
부인과 사별하여 둘째부인 강릉 김씨에게서 허봉(許篈)과 허난설헌, 허균(許筠)을 낳았다
허엽은 글 공부를 가르칠 때 아들과 딸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 덕에 허난설헌은 동시대 다른여성들과 달리 다양한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의 여성은 부덕을 닦으나 부공을 열심히 갖추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보는 사회이다.
초당허엽의 경우는 난설헌을 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본 것이죠, 인격체로 보았다는 사실이죠,
그것은 우리사회에서 양성평등 과도 같은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고~~"
-<장정룡교수 -강릉대학교>
허난설헌은 허균의 글공부를 직접 가르첬다
허균이 시를 지으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정도로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누님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어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음식을 익혀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학산초담
허난설헌의 천부적인 글재주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남동생 허균과 함께 학문을 익혔고
특별한 교육 덕으로 천재시인이 재량을 닦으며 자라난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다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여신동이라 칭해졌다 -양조평양록
그녀의 백옥루상량문은 8세에 지은 것인데
만약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어낼 수 있겠는가 -긍사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이곳에 허난설헌이 8세에 지었다는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
1570년(선조3) 여덟 살 나이의 허난설헌은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을 지었는데
대단한 명문이다
<한전 백옥루 상량문>
<1605년 당대 최고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가 전하며
이 시를 읽은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趙文奇)는 극찬한다>
여덟 아이가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표현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
"광한전 백옥루는 도교의 상상의 궁전이거든요
거기에 상량문을 올릴 때 글을 쓴 그런 내용인데
난설헌이 여덟살 때 지은 아주 명문입니다
대단한 문장인데
대단한 문장에 걸맞게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석봉 선생이
1605년에 이글을 쓴 것입니다"
-장정룡교수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
1570(선조3) 허난설헌이 8세에 지은 산문시
상량문(上梁文)은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의식에 쓰이는 글이다
허난설헌은 신선계계에 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식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이글을 지었다
※상냥문의 내용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허난설헌은 그림에도 뛰어났다
작품제목은"안간비금도'
집앞에서 아버지와 어린 딸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에 소녀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척 드물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미술가들은 '그림속의 소녀가 허난설헌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 평한다
필체도 여성답지 않게 획이 굵고 힘이 넘친다
허난설헌의 뛰어난 재능 뒤에는 오빠 허봉의 도움이 있었다
난설헌 보다 나이가 12살 위의 오빠 허봉은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오가며,
두보의 시이며 책을 사다 난설헌에게 주어 시를 익히게 했다
동생의 재능을 높이 산 허봉의 배려였다
허봉은 평소 말하기를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될 수없다.
이태백과 이장길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다." -허봉, <학산초담>에서
이런 동생의 재능을 더욱 키워주기 위해
허봉은 친구 이달(李達,1539~1612)에게 시를 배우도록 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손곡이달(李達)은 <3당(唐)시인(최경창, 백광훈,이달)> 중
한명으로 불릴 정도로 당나라 시에 능하였다
하지만 이달은 서얼 출신으로 일찍부터 관직을 포기하고 오로지 시에만 매진하였고 있엇다
난설헌은 손곡이달을 스승으로 맞아 당나라 시를 비롯해 여러 학문을 두루 배우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 당시 일반적인 양반가문에서, 서얼출신을, 그것도 특히 여자한테
선생님으로 소개한다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일반적인 집안의 가풍은 아니라고 봅니다"
"허란설헌 집안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도 시대를 뛰어넘는 앞선 집안의 가풍,
진보적인 가풍과 시대와는 화합할 수없는 상당히 혁명적인 기질들이 집안의 형제들이
갖고 있었다 라고 보여져요" - 김성남박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개방적이고 남녀차별이 전혀없는 집안에서 자란 허난설헌
재능을 인정해 준 가족들 덕분에 그녀는 마음껏 시를 쓰고 꿈을 키워갔다
허난시절의 유년시절은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추천 - 그네
隣家女佯競추韆(린가녀양경추천) 이웃집친구들과 그네뛰기 시합을 했어요 ※추(革+秋)
結帶蟠巾學半仙(결대반건학반선) 띠를 매고 수건 두르니 마치 선녀가 된 것 같았지요
風送綵繩天上去(풍송채송천상거) 바람차며 오색 그넷줄 하늘로 날아오르자
佩聲時落綠楊煙(패성시락록양연) 노리개 소리 댕그랑 울릭 푸른 버드나무엔 아지랑이 피어났지요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 천재로 태어나'조선의 여인'으로 살아야 하는 삶
- 결혼 이후 허난설헌의 삶은 어떠했을까?
명문가에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허난설헌
그녀가 어느덪 이집을 떠나야 할때가 다가왔습니다
조선중기에는 여자들이 보통16~18살 경
즉, 10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대부분 부모가 정한 혼처에 따라 정략결혼이 이루어졌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결정한 허난설헌의 상대는 안동김씨 집안의 자재로
5대가 대를 이어 문과에 급제한 문벌 가문이었습니다
두 양반가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된 허난설헌
그녀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요?
허난설헌은 577년(선조10) 15세 때 김성립(金誠立,1562~1592)과 결혼하였다
허난설헌의 남편이 된 김성립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성립은 5대째 과거 문과 급제를 한 안동 김씨 명문가 자제로
할아버지 김홍도는 영의정을
아버지 김첨은 도승지와 이조전랑을 지냈으나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죽고 난 이듬해인 1589년(선조22년)에야
증광문와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정8~9품에 머물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김성립과 결혼한 허난설헌은 친정을 떠나 시댁에 들어가 생활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맏며느리로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이러한 시집생활이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다
※친영(親迎) 제도:혼례를 치른 뒤 여자가 시댁에서 생활하는 혼인형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혼례를 치른 뒤 남자가 처가에서 생활하는 혼인형태
친영(親迎)은 당시 결혼 풍습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결혼제도는 이와 완전히 반대였다
남귀여가(男歸女家)였다
장인의 집을 들어간다는 뜻의 장가간다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됐다
현모양처의 귀감인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오죽헌
허난설헌과 동시대를 살았던 신사인당은 시댁이 아닌
친정에서 결혼생활을 했다
아들 율곡이이도 친정에서 낳아 키웠다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던 신사임당
그녀는 아름다운 산수와 주변풍경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받는 신사임당
그녀의 뛰어난 예술세계 뒤에는 친정이라는 평안한 안식처가 있었다
"신사임당같은 경우는 친정에서 오랜생활을 했다
자기 재능에 집중하고 그것을 들어내는데 친정살이가 휠씬더 유리하지 않겠어요
시댁에 있으면 자기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
아무래도 제한이 크죠, 그래서 신사임당이 그림에서 뛰어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친정살이라는 비중이 상당히 컷을 것 같아요" - 이순구박사(국사편찬위원회)
허난설헌도 어머니의 친정인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족들의 사랑과 배려 속에 시인의 꿈을 키워갔던 허난설헌
그런데 당시 결혼풍습의 변화가 생기면서
허난설헌은 결혼과 함께 친정을 영영 떠나게 됐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조선 세종조
세종과 김종서의 대화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親迎之爲難也 所難者 何事?(친영지위란야 소난자 하사)
지금도 친영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세종
我國之俗 男歸女第 基來也久(아국지속 남귀여제 기래야구)
우리나라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옵니다
若今女歸男第 則其奴婢衣服器皿 女家皆當備之 以是 憚其難也?
(약금여귀남제 친기노혼의복기명 여가개당비지 이시 탄기난야)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곧 거기에 필요한 노비,의복,그릇등을 여자의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되기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 김종서
是禮 果未可遽行也 自王室先行 今士大夫効之若何
(사례 과미가거행야 자왕실선행 금사대부효지약하)
친영의 예법이 갑작스럽게 실시될 수 없다면 왕실에서부터 먼저 실행이 되어,
사대부로 하여금 본받게 함이 어떠한가? -세종
왕실에선 오랜풍습과 다른 친영제 실시를 고집 했던 것인가?
조선초기에 새로 공급을 하면서 모든 시스템을 중국화 하려고 들거든요
중국적인 혼인제도, 가족제도 이런것 들을 바꾸게 되는데
그때 우리 혼속을 보니까 남자가 여자집으로 간단 말이에요
중국적인 제도를 들여와서 놓고 보면 아주 촌스럽다는 것이죠
이게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조정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해요
이걸 바꿔야 된다
중국과 같은 친영제도로 가야된다
그러면서 직접 왕실에서 친영제도를 보이기도 하고
그걸 보이면서 사대부들한테 따라해라 이런 것들을 하거든요"
-이순구 박사
친영제가 시작되면서 종가집도 생겨났고,
종부의 역할도 커졌다
허난설헌도 종부가 되어 어렵고 고된 시집살이를 햇다
당시까지도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풍습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허난설헌은 낮선 시집살이를 했던 것이다
조정의 시책에 따라 허난설헌은
새로운 결혼제도인 친영을 따르는 첫 세대였다
"허난설헌은
허난설헌은 시댁에서 생활을 했단 말이죠
재능은 제가 보기에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은 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발현하는데 시집살이 하는데는 아무래도 좀 더 제약이 많죠
시댁에서 산 허난설헌 한테 제약이 있지 않았을까~ " -이순구 박사
이런상황에서 남편은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잦았다
결혼 한 뒤에도
김성립은 과거준비를 위해 접(接)에서 주로 생활했다
※접(接) 젊은 선비들이 과거를 준비하며 함께 공부하던 장소로
일종의 동아리 합숙소였다
결혼초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애틋한 마음을 담긴 시가 전해진다
15세에 혼인하였으니 얼마나 기대가 컷을까!!
遣興(견흥)
精金疑寶氣(정금의보기)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鏤作半月光(루작반월광) 만든 반달 노리개는
嫁時舅姑贈(가시휴고증)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거라서 ※휴舅 (臼아래男)
繫在紅羅裳(계재홍라상) 다홍치마에 달아두었지요
今日贈君行(금일 증군행) 오늘 길 떠나가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願君爲雜佩(원군 위잡패) 먼길에 정표로 달아주세요
不惜棄道上(불석기도상)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 않지만
莫結新人帶(막결신인대) 새 여인에게는 달아주지 마세요
과거시험 준비로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햇던 김성립
그러나 그는 변변히 과거시험에 낙방했다
김성립은 점점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꼈다
부부사이는 날이 갈수록 소원해졌고
허난설헌은 남편없이 외롭게 지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을 락으로 삼으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시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힘들고 고된 결혼생활에
시는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러나 당시엔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행실이 못 되었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시를 쓰는 허난설헌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조선이란 사회는 여자가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하고 며느리가 시댁에 들어가 사는 친영제도는
17C가 되어서야 정착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16C를 살면서 시집살이를 한
친영(親迎)제를 경험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의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낮선 시집살이를 해야했다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좋았으나
시어머니께 인정받지 못하였다
늘 누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
허난설헌의 외로운 시집살이의 위로가 되어준 것은 바로 시였다
4. 중국 북경대 조선어학과에서
중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북경대학
이 대학의 조선어 학과에선 한국시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친다
이번 학기 강의 주제는 허난설헌 시다
학생들은 허난설헌의 관심은 매우 높다
중국에서 400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허난설헌 시
무엇이 이들을 허난설헌의 시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봉견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불행에 대한 호소,비애와 고통을 소리내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던 사회에서
이름을 날릴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허난설헌을 동정합니다"
- 쳔아이윈(조선어학과 대학원생)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시에 의지해 벗어났고
현실에 대한 반항을 표현 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허난설헌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위루어잉(조선어학과 대학원생)
5. 허난설헌은 다양한 주제로 시를 짖다
허난설헌은 다양한 주제로 시를 썼다
그중에는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그녀의시에는 시대에 대한 저항, 불평등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양반 명문가에서 자란 그녀가
그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인 듯 싶다.
감우(感遇) -느낀대로 노래함
盈盈窓下蘭 (영영창하란) 창가에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난
枝葉何芬芳 (지엽하분방)잎과 줄기 어찌 그리 향기로울까
西風一披拂 (서풍일피불)가을 서풍 한바탕 스치고 나면
零落悲秋霜 (영락비추상)찬 서리에 그만 시들어버리네
秀色縱凋悴 (수색종조췌)빼어난 그 모습 초췌해져도
淸香終不死 (청향종불사)맑은 향기 끝내 그치질 않네
感物傷我心 (감물상아심)이것이 내 마음 아프게 하여
涕淚沾衣袂 (체루첨의몌)자꾸만 옷깃에 눈물적시네
감우(感遇)
古宅晝無人(고택주무인) 오래된 집이라 대낮에도 사람이 없고
桑樹鳴鵂鶹(상수명휴류)뽕나무 가지에선 부엉이가 울고있네
寒苔蔓玉砌(한태만옥체) 차나 찬이끼가 섬돌을 덮고 있고
鳥雀棲空樓(조작서공류) 참새들이 빈 누각에 깃들어 있구나
向來車馬地(향래차마지) 지난날엔 말과 수레들이 몰려들던 곳
今成孤兎丘(금성고토구)지금은 여우와 토끼 언덕이 되었구나
乃知達人言(내지달인언) 이제야 알겠네 현인들이 하신 말씀을
富貴非吾求(부귀비오구) 부귀는 내가 구하는 바가 아닐세
감우(感遇)
東家勢炎火(동가세염화) 양반가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高樓歌管起(고루가관기) 높은 다락에서 풍악소리 울렸지만
北隣貧無衣(북린빈무의)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枵腹蓬門裏(효복봉문리)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 ※효枵
一朝高樓傾(일조고루경) 어느 날 아침 높은 권세 기울면
反--北隣子(반선북련자)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하리니
盛衰各遞代(성쇠각체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바뀌어도
難可逃天理(난가도천리) 하늘의 도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오
감우(感遇)夜夢登蓬萊(야몽등롱래) -지난밤 꿈에는 봉래산에 올라서
足躡섭葛陂파龍(족섭 갈파룡) 갈파의 용을 타고 신선세계에 갔다네
仙人綠鈺杖(선인녹옥장) 신선들은 파란 옥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邀我芙蓉峰(요아부용봉) 부용봉에서 나를 맞아 주셨네
下視東海水(하시동해수) 눈 아래 펼쳐진 동해의 물을 내려다 보니
澹然若一杯(담연약일배) 술잔의 술처럼 맑고 깨끗하구나
花下鳳吹笙(화하봉취생) 꽃 밑에서 봉황새는 피리를 불고
月照黃金罍(월조황금뢰) 달빛은 황금 술항아리를 비춰주었지
"허난설헌이 그 만큼, 그 시대의 여성의 한계를 너무 빨리 앞서 갔다 것이 나타나 있거든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비극이자 너무 앞서간 인물이
사회의 벽을 깨지 못하는 것들이 갖는 허난설헌의 비극이자~"
- 김성남 박사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이 어떻게 신분 차별을 꼬집는 저항시를 짖게 되었을까?
어릴적 스승이었던 손곡이달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달은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러한 이달의 모습을 통해 허난설헌은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비판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승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접한 허난 설헌
'가난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을 시로 담아 내기도 했다'
고된 노동을 주제로 한 것도 담아내고 있다.
빈 녀 음 (貧女吟) -가난한 처녀의 노래
豈是乏容色 (개시핍용색 ) 인물도 남에 비해 그리 빠지지 않고
工鍼復工織 (공침복공직 )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도 좋건만
少少長寒門 (소소장한문 ) 가난한 집안에 자란 까닭에
良媒不相識 (양매불상식 )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
不帶寒餓色 (부대한아색 ) 춥고 굶주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盡日堂窓織 (진일당창직 ) 하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唯有父母憐 (유유부모련 ) 오직 내 부모님만 가엽다 생각할 뿐
四隣何會識 (사린하회식 ) 그 어떤 이웃이 이내 속을 알아주리오
夜久織未休 (야구직미휴 ) 밤 늦도록 쉬지않고 배를 짜노라니
알알鳴寒機 (알알명한기 ) 베틀 소리만 삐거삐걱 차갑게 울리는데
機中一匹練 (기중일필련 ) 베틀에 짜여진 베 한 필
綜作何誰衣 (종작하수의 ) 결국 누구의 옷이 되는가
手把金剪刀 (수파금전도 ) 손에 가위쥐고 마름질하니
夜寒十指直 (야한십지직 ) 밤이 차가워 손가락 곱아온다
爲人作嫁衣 (위인작가의 ) 남을 위해 혼례복을 짓고 있지만
年年還獨宿 (년년환독숙 ) 나는 여전히 홀로 살고 있다오
신분의 귀천이 명확했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어갑받는 여성들의 고달픈 노동에 주목했는데,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자(貧者)들이 겪는 불평등이 같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시를 무기로 그릇된 현실에 저항했던 여류시인
시를 유일한 위로로 살아가는 허난설헌에게 견디기 힘든 불행이 찾아옵니다
6.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에 지다!
-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시인.
1580년(선조13) 경상도 상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사 직에서 물러나 한성으로 오던중 상주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난설헌은
질병으로 연이어 두아이 모두를 병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곡자(哭子) - 허난설헌
자식의 죽음에 곡하다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
哀哀廣陵土 (애애광능토)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 나란희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 (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부는데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숲속에선 도깨비 불이 반짝거린다,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종이돈 살라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 (현주존여구) 물탄 주로 너희들 무덤에 제 지내노라
應知弟兄魂 (응지제형혼)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만나 놀고 있으려나
縱有腹中孩 (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해도
安可糞長成 (안가분장성) 어찌 제대로 자랄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浪吟黃臺詞 (랑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픈 노래부르며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허균도 두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아,살아서는 부부금실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원통함이 한이 없다 " -허균(학산초담)
1588년(선조21) 강원도 김화
그런데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던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이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강원도 김화근처에서 객사한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던 오빠 허봉의 죽음
그 설픔은 난설헌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26세 이던 허난설헌은
의미 심장한 시 한수를 읊는다
夢遊廣桑山詩(몽유광상관시) -꿈에 광상산에 노닐며
碧海浸瑤海 (벽해침효해) 푸른 바다가 옥구슬 바다를 적시고
靑鸞倚彩鸞 (청란의채란)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와 어울리네
芙蓉三九朶 (부용삼구타) 아리따운 부용꽃 스물일곱송이
紅墮月霜寒 (홍타월상한) 붉게 떨어지니 서릿 달이가 차갑구나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일까?
허난설헌은 이듬해 1598년 스물일곱 나이에 생을 마첬다
※ 일곱송이의 부용꽃에 비유하여 자기가 27세에 죽을 것을 미리 예언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