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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1회 <영상복원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98101

파라클레토스 2011. 3. 26. 02:03


역사스페셜 E001 -영상복원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어둠이 깔리면 적막과 어둠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최초로 문이열렸을때
사라졌던 역사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거기에
고구려인이 묻혀있었다.

 

영상복원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역사스페셜 첫 시간입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은 3차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가상세트 입니다.
앞으로 역사스페셜에서는 이런 최첨단 영상을 이용해
고려, 삼국은 물론 시공을 초월해 우리 민족의 원류를 밝히는 작업까지,
감춰지고 사라져간 역사를 복원하고, 실체를 추적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폭을 넓혀가 보겠습니다.

그 첫 작업으로 오늘 우리가 다룰 얘기는
고구려 벽화, 무용총에 관한 것입니다.

자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에서 벽화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문화를 일궜으며,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과연 무용총안에 어떤 벽화가 그려져 있는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것이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은 무용총 안입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이렇게 관대가 놓여있고,
그 관대를 둘러싸고 삼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화가 수렵도, 접객도, 무용도 순으로 나타난다)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수렵도가 여기에 그려져 있었고,
그 다음에 접객도, 그리고 이 무덤을 무용총이라고 부르게 한 춤그림,
바로 무용도가 이쪽 벽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벽화가 많이 훼손돼 있죠.
이것은 대략 1960년대 모습인데, 최근 공개된 모습은,
이 보다 휠씬 훼손이 심각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습만으로도,
벽화가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천오백년전에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이런 벽화를 제작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훼손돼 사라져가는 무용총 벽화를
3차원 최첨단 영상으로 재현해 보겠습니다.


압록강


이 압록강의 줄기를 따라 광활하게 펼쳐졌던
고구려의 옛 영토

고구려무덤군-만주 집안

 

거기에는 아직도 그 시대가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알리는 흔적들이 산재하다.
고구려의 도읍지가 있던 집안지역 일대에는
약 1만2천여기에 달하는 무덤들이
거대한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무용총-만주집안

그 고분들 속에 쌍둥이 무덤이라고 알려진
각저총과 무용총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무용총은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 조사된 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다섯번, 외부에 공개됐다.
그러나 공개후에 보존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무용총 벽화의 훼손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화면에 담긴 벽화 모습은
이처럼 색이 바랜데다,
그 나마 군데군데 벽면이 떨어져 나가
그 원형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특히 중국측이 벽화를 보존한다며, 화학안료막을 입혀
벽화는 지금 내부에서부터 부식돼 가는 중이라고 한다.



제작팀은 KBS 특수영상제작실과 함께 무용총 복원에 들어갔다.
첫 난관은 이렇게 훼손된 상태에서
벽화 본래의 모습과 색을 어떻게 알아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작팀은 가급적 오래된 사진 도록을 참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1960년대의 사진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고, 윤곽이 제대로 남아있는 30년대 도록은
그 색이 분명치 않았다. 

 

 
제작팀은 색채 전문가의 협조를 받아
도록에 나오는 사진 하나하나를 색 대조표를 가지고 확인해봤다

색채 전문가인 최미영씨는 무용총 안에
이 대조표를 가지고 들어가
직접 실제 그림과 맞춰봤다고 한다.

최미영인터뷰

 고분벽화 특징은 자연석 그대로 살려 선명,

적갈색이 주조색인데 거기서 5가지색이 나타난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옷 색깔부터 컴퓨터로
복원해봤다. 흰색은 실제로는 약간 노스름한 빛을 띠었고,
붉은색은 도록에 찍힌 사진보다 더 짙었다고 한다.


도록에는 단색으로 처리된 경우가 많은데,
실제 벽화 모습은 다르다고 한다.

도록에 이 인물은 검은 단색옷으로 입은 것처럼
나와있지만, 최미영씨의 주장에 따르면
옷깃과 소매깃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었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색을 보정해봤다.
완성된 모습은 전통 한복과 아주 흡사했다.

제작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벽화의 색을 일일이 재현했다.
그런데 무용도에는 다리밖에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
그려져 있다. 사진 도록에도 없고,
실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통구

우리는 최초의 고분 보고서에서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케 하는 단서를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완함 연주자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면 완함은 어떤 악기였을까?
그 모습은 조선시대 월금과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다행히 감신총 벽화에 완함 연주자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자료에 근거해 완함 연주자를 완성시켰다.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완성된 춤그림, 무용도다.
기록에 따르면 완함 연주자 옆에 있는 사람은 영무로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이고,

아래 일곱명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다섯사람은 영무에 지휘에 따라
춤을 추는 춤꾼들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춤을 추었을까?

이애주 춤
고구려 춤의 원형을 연구중인 이애주 교수는
무용도에 나오는 다섯사람의 모습에 기초해
최근 고구려 춤을 복원시키고 있다.

두팔을 완전히 뒤로 제낀 벽화의 기묘한 춤동작은
추정해보건데, 두 팔을 앞으로 한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한다.
또 손놀림이라든가, 발 추임 동작도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멋이
우리의 전통 춤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이애주 인터뷰

(춤무덤 우리 춤의 원형이 나타남)

그러면 다섯의 춤꾼들은 당시에 벽화에 그려진 대로
이렇게 일렬로 서서 추었을까?

이애주 -입체적인 것으로 서있다

힘차면서도 담백하고,
끈어질 듯 하면서 이어지는 고구려의 춤,
춤처럼, 고구려인들이 이룬 문화도
강하면서 섬세한 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벽화 우리가 다섯명의 춤꾼에서
고구려의 춤을 재현했 듯이
자세히 보고 느낌을 넓혀간다면,
고구려는 되살릴 수 있다.
벽화는 그런 점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열쇠다.


무용총이 만들어진 5세기초는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던 고구려의 전성기때입니다.


북으로는 거란과 동부여를 정벌해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 가야에 까지도
그 세력을 뻗쳐가던 그 무렵입니다.

무용총은 바로 이 고구려의 중심지에,
국내성 부근 통구지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심지에
이렇게 화려한 벽화를 남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을까요?



무용총 안을 들어가면 우선 널길과 만난다.
널길의 양 옆에는 앞방이 있다.
앞방은 아주 작아 폭이 1미터를 넘지 않는다.

앞방을 지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관이 놓여있는 널방이 나타난다.

널방안에는 관대만 놓여있을 뿐 무덤 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을 만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접객도

그런데, 손님을 접대하는 그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 접객도에는 무용총의 주인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사람이다.
무덤을 벽화로 치장한 것으로 봐서 주인공의 장례식도
대단히 호화로웠을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인들은 결혼하면 곧 수의를 만들고
금은 재물을 장례에 쓴다'는 기록이 있다.

서길수 인터뷰

고구려 사람들은 죽어서도 사람은 영원히 산다 그런 사상때문에

크게 무덤을 만들고   벽화에 실제 생활을  남기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임
 

훼손이 심한 이 그림으로는
무덤 주인의 신분을 유추하기는 힘들다.



영상으로 복원된 접객도다.
접객도는 음식이 올려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의 신분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음식을 올리는 시종위에
주인공은 당시 귀족들의 머리장식으로 알려진
백라관을 쓰고 앉아 있다.

주인공 뒤에도 두명의 시종이 서있고,
그림 맨 아래에는 여덟명의 시녀들이 늘어서 있어
그림만 봐도 주인공의 신분이 꽤 높으리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다른 고분과 비교해봤다.

무용총과 이웃한
각저총은 외형상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무용총은 널방의 너비나 높이가 3.5미터 정도다

전호태교수인터뷰

6세기 규모가 큰 석실분인 경우에는

너비가 4m 높이도 4m에 육박 



장군총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초에 축조된 고분이다.

 

천여개의 장대석들로 지어진 장군총은 규모도 거대해,

널방의 너비가 32미터,

높이도 지금의 7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된다.


강서대묘

 

무용총보다 1세기 후에 만들어진 강서대묘도
고구려 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널방의 높이만 8미터로 규모도 거대할 뿐더러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네 벽에는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알려진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은 이런 왕들의 고분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시 왕 바로 아래급에 해당되는
아주 높은 신분의 귀족이었을까?


안악3호분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초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라는 중국인 무장이다.

그는 고구려에서 높은 신분의 귀족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지위가 벽화에서 드러난다.
'동수'라는 무덤의 주인이 밖으로 행차할 때면
풍악대와 장송대가 도열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종들이
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무용도에도 비슷한 행차모습이 담겨있는데,
가수들과 춤꾼들이 주인공을 위해 공연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긴하지만, 말탄 주인공을 따르는 시종은
한 명뿐이다.

전호태 인터뷰

무용총의 경우 2급 귀족 정도 파악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대규모 석실분에 나오는 석실도라든가

살아있을때 위용이 보이지 않는다

왕족에 해당하는 무덤은 아니다)

접객도 아주 높은 신분의 귀족이 아닌데도, 이 정도로
자기 무덤을 치장했다면, 당시 고구려가 얼마나
화려하고 번성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않을까.

무용총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4-5세기 고구려 고분중에는
이 무용총 처럼 생활풍속을 그린 벽화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이나
풍요로왔던 생활을 무덤에 남김으로써,
내세에도 그러한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이 벽화를 보면, 무용총의 주인은 가무와 함께
사냥도 꽤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덤의 한 쪽 벽면을 차지한 이 수렵도는
발견당시 부터 힘차고 정교한 사실묘사로
벽화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힙니다.

그렇다면 천오백년전 이 벽화를 그릴 당시로 돌아가보죠.
무덤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벽면이 대단히 거칠었을 것입니다.
그런 벽면에 어떻게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또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그 제작 과정을 재현해봤습니다.



쌍영총벽화조각(-국립중안박물관 소장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 벽화의 조각이다.
쌍영총 벽화의 것인데,
쌍영총은 무용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졌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 인들이 벽화를
어떻게 제작했는지,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재료다

제작팀은 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도움을 얻어
쌍영총 조각의 단면 조사를 실시 해봤다.
벽화를 그린 물감의 성분은 무엇일까,
벽화단면

붉은색과 검은색의 안료가 주로 나타났다.

안병찬 인터뷰

적색은  황화수은이 많이 나옴

흙색은 탄소, 먹 같은 것을 이용한 것



서울대 수업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벽화에 사용되는 안료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
이 대학에서는 전통 안료를 직접 만들어서
고구려의 벽화를 제작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붉은 안료

고구려 벽화를 그릴때 가장 중요한 색은 적갈색인데,
대부분의 벽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이 적갈색을 당시 고구려인들은
자연에서 얻었다고 한다.

이종상 인터뷰 -서울대 동앙미술

 

 

괴테석 -----------> 적철석

(황토)     가열           적색

 

 



천연광물 안료들

검은색은 먹으로, 적갈색은 황토로
그 외에 청색, 녹색등의 안료들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질을 산화시켜 만들었다.
벽화에 쓰인 안료는 이렇게 물에 녹지않는
천연광물성 재료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광물성 안료를 어떻게 돌로 만들어진 벽에
부착시킬 수 있었을까?

 

쌍영총 조각 단면을 분석해봤다.

아래 흰색은 석회부분다.
그런데 검은색 안료는 석회에 잘 붙어있는 반면
붉은색 안료는 엉성하게 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병찬 국립중앙박물관

석회와 안료가 함께 화학적으로 탄산칼슘으로 변화하는

프레스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두가지로 발견

우리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프레스코 기법으로 벽화를 제작해봤다

고구려 벽화는 안료로 그림을 그리기전에
먼저 벽면에 두껍게 석회를 입혔다.

석회도 한번 바른 것이 아니라
세번에 걸쳐서 바르고, 특히 마지막에는 아주 고운 입자의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벽화의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릴때, 프레스코 기법이 사용되는데,
젖은 석회에다 광물성 안료로 채색을 해서
석회안으로 스며들게 한다는 것이다.

진영선 고려대 서양화

젖은 석회위에 천연안료를써서

자연완료로 접착제 없이 그려서 석회가 마르면서

안료가 석회틈사이로 들어가서

석회와 같은 마르면서 굳어가는  프레스코 기법이다)

단면구성 고구려인들은 돌을 쌓고 그 위
굵은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1차 벽을 바르고,
그 다음에는 중간 굵기의 돌가루와 석회,
마지막에는 고운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세번 가량 회벽을 발랐다

화가는 그 위에 석회가 마르기전, 젖은 상태일 때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만 안료과 석회와 함께 굳어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프레스코 기법은 젖은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용총 벽화의 경우,

그 많은 그림을 회벽이 마르기 전에
전부 그리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검은색-프레스코기법과

붉은색-건식화법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프레스코가 아닌 방법이
쓰여진 것 같다. 석회와 안료가 밀착된 검은색 부분이
프레스코 기법이라면, 이 엉성하게 떠있는 붉은색 부분은
분명 다른 기법이다. 왜 안료와 석회가 잘 붙지 않은 것일까?

교수 인터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매개물. 아교 사용했기 때문

소가죽안료 ,토깍가죽안료

프레스코와 다른 기법은, 석회가 마른 후에
안료에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결국 무용총 벽화는 젖은 상태의 회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 부분적으로 다 마른 상태에서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두가지 방법이 병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기법에 보존의 비밀도 담겨있다.

단면구성 프레스코 기법의 경우, 젖은 상태에서 안료와 석회가
함께 굳기 때문에, 마치 종유석처럼 단단해져
안료가 떨어져나가는 박락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수렵도

게다가 오랜시간이 흐리면서 습기나 빗물이
무덤안으로 스며들어와 석회수가 되면서
벽화에 일종의 코팅이 이뤄지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가 천오백년 가까이 그 모습을 간직한
보존의 비밀이 바로 이 프레스코기법에 들어있다.

 

 


이것이 영상으로 재현된 무용도, 접객도, 수렵도의 모습입니다.
벽화가 처음 그려졌을 당시 모습도 아마 이처럼 화려했을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호방한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벽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몇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몸을 완전히 돌려 앉은 기마자세나

화살의 모양이 매우 특이합니다 



이 화살도 보면, 마치 석류 모양 처럼 생긴 것이
어떻게 이런 화살로 사냥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벽화는 기록보다 더 정확한 역사입니다.
거기에는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감춰져있습니다.
그 의문들을 풀어봤습니다.


수렵도
보통 화살은 끝이 뽀족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에게 꽂혀 일격을 가할 수 있는데,
수렵도에는 명적이라고 부르는
둥근 화살만 그려져 있다.

 

명적(가야4세기)

 

 

 

 

명적은 소리를 내는 화살로
신라, 가야는 물론 흉노족 출토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김성태 경기도 박물관 고고미술부자

아마 구조와 모양으로 봐서 전투시 신호용으로 사용

실질적으로 짐승에게 타격을 가하는 실질적인 면



직접 명적을 제작해봤다.
유영기옹은 20년동안 화살만을 줄곧 만들어온 전문가다.
석류모양의 화살촉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다고 한다.
뼈나 뿔에 구멍을 파서 화살촉에 끼우는 명적은
고구려가 만든 대표적인 화살중의 하나다.

명적들 명적은 동물을 죽이기 보다 소리로 기절시키거나,
생포하는데 더 적합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명적을 수렵도에 그렸을까?
또다른 의미가 벽화에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

그것은 정치적 군사적의미. 군사훈련

사냥터 정치적인 단합 . 결속력을 다지는 행위

수렵도 수렵도에는 사냥하는 그림과 함께 나무를 사이에 두고
소 수레가 그려져 있다. 사냥에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수레는 당시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일반적인 교통 수단이다.

사냥은 모든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오락이면서 생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든 기동성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무사들의 활쏘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면 말 위에서 완전히 몸을 뒤로 제긴 채
활을 쏘고 있다.

마상무예시범(육군사관학교)

그런 자세는 지금도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


고구려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최고로 여겼다.
신기에 가까운 기마자세가 생겨난 것도
거기에 원인이 있다.
또하나, 이런 자세가 가능했던 것은 활에도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김성태 경기도 박물관 미술관장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러개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마디중엔 덪댄 부분이 표현

덪댄부분은 뼈를 갈아 나무뒤에 붙힌 것인데

기록에선 각궁이라 한다

각궁은 탄력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위에서 화살을 쏘는 가장  적합했던 것 같다



 

각궁은 활 길이가 짧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쏠 수 있고, 화살도 멀리 나간다.
 
조선시대에도 이 각궁을 썼는데 그 모습은
벽화에 나타난 각궁과 똑같다.
우리 활의 원형이 이미 4-5세기
고구려때 완성된 것이다.

수렵도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자기들의
중심 무대를 계속 넓혀나갔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광대했는가는
의외의 곳에서도 발견된다.


말탄 주인공은 점무늬 바지를 입었다.
부엌을 나오는 여자들의 옷에도 점무늬가 보인다.
요즘 말로 땡땡이 무늬라고 부르는 이 옷들은
다섯명의 춤꾼들의 의복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민길자 교수 국민대 가정학

요사이 말하면 방염직물

어떤 한 부분에 염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무늬에만 염색물감이 들어가게 하는 것

 

실렴

사라사 염법

 

사라사 염법은 인도에서 기원해서

지금으로 부터 2000전에 동남아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로 되어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쪽으로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고구려의 상류사회에서는

고구려에 사라사기법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증거가 됨


인도(기원전 6세기)

사라사염법으로 제작한 직물

가장 오래된 점무늬 옷감으로 알려진
사라사 공법의 이 인도 옷은
벽화의 옷 무늬와 비슷하다.
고구려는 이 인도의 '부분 염색법'을
사용해서 복식에 변화를 줬다.

당시 고구려 사회는 멀리 서역과 문화를 교류 할 만큼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었고,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
대외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옷을 통해
막연하게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무용총에는 벽뿐만 아니라

천장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장 벽화는 네 벽에 그려진 그림과 확연히 다르면서
그야말로 찬란하고 다양한 하늘세계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무덤안의 천장은 계단식으로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둥근 돔 양식으로 돼있습니다.

사학자들은 벽면의 벽화가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면
위 천정 부분은 극락왕생을 비는 영혼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천장벽화를 그린 고구려인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그림들을 그렸을까요?


무용총 천장부

천장 벽화는 계단식으로 좁아지는 그 단위에
촘촘히 그려져 있다.

고구려인들은 이렇게 좁아지는 계단에 그림을 남기기 위해
그들 나름의 건축 방법을 갖고 있었다.

김성태 경기도 박물관장

건축 양식에 대해서 들여쌓기


천장을 쌓을때 세 계단까지는
네 벽과 평행하는 사각형을 쌓았고,
그 위의 다섯 계단은 네개의 삼각고임을 써서
8면으로 쌓아 나갔다.
각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게 쌓아
벽화를 그릴 자리를 남겼고, 마지막에 큰 돌로
천장 입구를 막았다.

천장벽화도 그 제작기법은 네 벽과 같다.
회벽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사실적인 그림들로 채워진 네 벽과는 달리

천장은 상징적인 그림으로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살아생전의 모습을 담은 벽면 그림 위에는
빙둘러서 16개의 세모꼴 염화문(불꽃무늬)이 그려져 있다.
이 염화문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두번째 단에는 연꽃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죽어서 연꽃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강하다.

 

 

 


세번째 단에는 주인공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상서로운 동물, 백호와 청룡 그리고 주작(장닭)이 사면에 그려져있다.

 


즉 신선들은 주인공이 죽어 나쁜 곳으로 가지말고
신선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부정을 막는
수호신인 셈이다.


 

수박도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현세에 누렸던 삶이
내세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신선

 

전호태 울산대 사학

여러가지 모습을 하는 신선들은

기본적으로 연꽃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위에 존재하는 자들

연꽃이란 개념은 불교의 내세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도구가 됩니다

연꽃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부분



 

저승세계가 한층 깊어진 4 단부터는 연꽃은 줄고
신선과 사신을 형상화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기린,봉황과,


사람의 얼굴을 한 하늘나라의 새,

그리고 그 새와 노니는 신선들.

 


뿔나팔 부는 신선

학을 타는 신선


윗단의 벽화는 주인공이 신선이 돼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하늘나라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호태 인터뷰

고구려 벽화는 불교적 내세관

사신신앙 신선신앙 무용총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무용총에서 고구려 벽화가 몇단계 변해가는 축약과정을 읽어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죽음은 단지 육신의 소멸일뿐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인다고 여겼다.

그래서 무덤은 산자와 죽은자가 헤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가 신선으로 다시 환생하도록 이어주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중에서 무덤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모두 95기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22개의 고분에는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용총 천장벽화에도, 자세히 보면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그림들 속에
별자리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별자리들이 떨어져 내려와 성수도를 그린다

 

무용총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그리고 동쌈성과 서쌈성등
총 26수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는 자체 천문대가 있어 일본에 전해 줄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고, 그 천문체계도
서역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데, 그 독창성의 싹이 바로 이 무용총
별자리에서 부터 나타난다고 합니다.


천장그림들

언뜻봐서는 어느 것이 별자리인지 찾아내기가 힘들다.
꼬리로 이어지는 둥근원들이 사실은 별자리다.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별자리는
대개 백호나 청룡과 같은 사신와 함께 그려져 있다.

해(다리가 셋인 새)
붉은 빛 해 속에 검은빛의 가마귀는 해신을 뜻한다.

달(두꺼비)

흰빛 달 속에 엎드려 있는 두꺼비는 달신이라고 한다

 

 

 


성수도 무용총에는 북두칠성, 남두육성과 같은 별자리와
청룡, 백호등의 사신과

 해, 달이 늘 함께 나타나는데
이것이 고구려 천문도의 특징이다.

김일권 인터뷰

3중 천문방위체계

해와 달 사신도

사방을 뜻하는 별자리그림

세가지로 고구려 천문사상을 표현

방위별자리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은 고구려적인 전통



 

무용총의 별자리는 덕화리 2호분에 가서
네 방위 체계가 보다, 더 정확하고 정교해진다.
약 백년동안 고구려인들의 천문체계가 그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고구려의 천문체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별자리가 남아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고구려 천문도의 흔적이 다시 발견된 것은
그로 부터 천년 후,
조선초 태종 4년에 만들어진
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적도, 황도, 븍극원과 경도선, 그리고
은하수까지 그려졌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다
이 지도가 고구려의 것을 본뜻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석각에 기록된 제작자 권근의 기록때문이다.

평양성

병란때 강물에 빠졌던

예평양서의 천문도를 복원해 만들었다

 

 

권근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될때 강물에 빠진
천문도의 탁본을 토대로 일부 달라진 별자리만 보완해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일권 인터뷰

조선시대 천문도가 고구려에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

고려시대 천문학도 상당했을 것

고구려 천문학도 상당했을 것

고구려의 천문지식 상당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이 완성시킨 천문도의 모습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기토라 고분
얼마전 일본에서, 7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가 공개됐다.

세계최초의 천문도가 되는셈

기토라천문도는 당시 일본의 천문도로 봐서

독자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긴 어렵다


 

기토라의 천문도는 당시 일본의 천문지식으로 봐서
독자적으로 그렸다기 보기는 힘들다.

 

중국의 순우 천문도중국1247년)나

 

천상열차분야지도(조선,1395)의 원본이랄 수 있는
고구려 천문도를 본따 그렸을 확률이 높다

박창범모습 박창범교수는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를 가지고 관측지점을 알아냈다.

박창범 인터뷰

 

 

 

관측자 위치가 39도... 당시 고구려에 해당

지구본 북위 39도의 유력한 관측지점은 한반도의 평양이다.
평양은 당시 고구려 수도다.

그리고 중국은 당나라 수도 였던 장안과는 거리가 먼
만리장성이 있는 유타이산이라는 곳으로 나타났다.
수도 아닌 그것도 변방지역에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보긴 힘들다.

기토라 고분이 고구려 벽화의 영향을 받아 축조됐을 것이라고
기토라 내부 보는 이유는 또 있다.
고분내부 측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자.
네 벽에 고구려 벽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기토라 천문도 이와같은 이유로,
7세기초에 만들어진 기토라 천문도는
천상열차지도에 원본이 됐던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
그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쌈상성이 그려진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 모양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권 인터뷰

북두육성, 남두육성, 동쌈성 서쌈성이란

사방의 별자리구조는 중국에서 확인하기 힘듬

중국과 다른 별자리가 그려졌다는 사실들은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문도를 구축하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인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천장벽화 무용총 별자리는 이런 고구려의 독창성이 싹트는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별자리가 독창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을 개의치 않고 대등한 위치에
서려 했다는 뜻이다..

 

 

 

 

 


광개토왕비문

무용총이 축조된 그 시기,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혀가던
그때 고구려는 자기 중심의 천하관을 갖춰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광개토왕비에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추모왕을
하늘이 낸 자손이라고 본 것이나,

모두루 묘지에서

河백之孫  日月之子

하백(물의신)의 자손

해와 달의 아들이다

 

고구려의 연원을 하늘과 일월이라고 표현한 등이
바로 중국과는 별개로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봤다는 증거다.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은

고구려인들이 대륙에 있으면서

독창성과 아울러 개방성을 동반

독창성과 세계성을 찬양할만한 위치


당당하고 아름다운 고구려이야기들이

이 무용총 벽화속에 그려져 있다



'세계의 중심은 고구려다'
'자신들은 하늘의 자손이다'
이렇게, 당시 고구려인들은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고,
호방한 기질과 어우러져
드디어 5세기 말에는 주변국들을 정벌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고구려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이 무덤안에 벽화의 모습으로 살아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고구려가 잊혀져가면서,
살아있어야 할 역사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그 화려한 모습을 다시 눈여겨보죠.
그리고 벽화를 남긴 1500년 전의 고구려인들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