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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폐셜 3 회<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98년 11월 7일

파라클레토스 2011. 3. 26. 02:06

역사스폐셜 (제 3 회) 98년 11월 7일(토)방송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뉴스 (앵커화면) (현장음)----------------------------------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발해의 혼을 쫓아서 천삼백년전 발해의 뱃길 탐사에 나섰던 발해 뗏목 탐사대원 네명이

오늘 새벽 일본해상에서 폭풍우로 모두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탐사 대원 네명이 희생된곳은 일본 오키군도 오고성 서쪽 7킬로미터 해상으로 항해를 시작한지 25일째인 오늘 새벽입니다.

이들은 어제 낮에도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결국 구조도중 풍랑으로 뗏목이 좌초되면서 세명은 숨지고 한명은 실종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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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아나운서 멘트

 

지난 1월25일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이 뉴스를 기억하십니까.
바로 이 사람들이 땟목에 탐던 네명의 탐사대원입니다.

이들은 1300년전 발해의 해상항로를 찾기 이해 목숨을 건 뗏목 탐사를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일본해상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추위,

그리고 거센파도와 싸우면서도 이들은 항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들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해보려 합니다.
1300년전 과연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가 존재했을까요?

존재했다면 그 출발지는 어디였을까요?

지금부터 1300년전의 왕국 발해가 긴직하고 있는 그 비밀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VCR1]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전경

 

발해인들이 동해로 떠났던 출발지는 어디일까?

블라디보스톡 종합대학 외경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취재팀은 블라디
학생들 보스톡 종합대학을 찾았다.
그곳에서 발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학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샤프꾸노프 박사(70)

취재팀이 찾아갔을 때 그는 좁은 연구실 안에서 발해의 토기 조각들을 맞추고 있었다.
의자위의 토기 조각들 이 조각들이 하나로 모이면 우리나라에는 단 한점도 남아있지 않는 발해의 토기가 또 하나 생기는 것이다.

샤브꾸노프 교수

평생을 발해 연구에 바쳐온 샤프꾸노프 박사는 발해사에 관한한 세계적인 권위자다.
조각맞추는 손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수집한 발해 유물만 해도 수만점.
발해 토기들에서 벽장식까지 그의 연구실은 작은 발해박물관이었다.

그는 취재팀을 만나자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발해의 유물부터 꺼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발해의 기와.
화살촉 그리고 쇠로 만든 날카로운 화살촉들

저울추 과자상자에서 꺼낸 이 유물은 토기조각을 이용한 저울추다.

 


허리띠 장식 잡은 손 (현장음)---

아 이거는 허리에 이렇게 대는겁니까?아,허리띠에다가 ..이거 아주 잘 만들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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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꾸노프 박사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취재팀 을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유물들
손으로 부절 짚으면 그가 가리킨 것은 물고기 모양의 작은 조각품.
1300년이라는 세월속에서도 녹하나 슬지 않은 채였다.

 


어린아이 손가락 길이만한 이것은 청동 부절이었다.부절은 주몽이 유리왕과 나누어가졌던 칼
부절 세로 처럼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물건이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부절의 왼쪽.

 


이 부절이 오른쪽과 합쳐지면 세로면에 세겨진 합동이란 글씨가 완벽하게 완성된다.

이 부절의 왼쪽부분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은 누구일까?

부절 뒷면에 새겨진 글씨가 그 단서였다.

 

 

좌효위장군은 당나라와 발해에서 사용된
관직으로 서열 2위정도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섭리계 글씨 그리고 섭리계는 사람이름이다.

이름끝의 계자는 발해인의 이름에서 흔히 볼 수있다.

가루계 미발계 공백계처럼 결국 섭리계도 발해사람이었던 것이다.


좌효위 장군 섭리계가 부절을 가지고 있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니꼴라예프카 마을로 향했다.

 


니꼴라예프카 마을 팬 인구 300명의 한적한 시골 마을.

부절이 발견된 곳은 이 마을 한켠에 있는 거대한 성이었다.

좀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성벽을 오르자
거대한 평지 15만평 가량의 넓은 성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벽의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지만 돌을 쌓고 그 겉에 흙을 다진 무척이나 견고한 토성이었다.

아직도 성터 곳곳에는 발해 유물들이 남아 있었다.

조각으로 남은 이 유물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왕조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사브꾸노프 교수 (인터뷰)
이 토기 조각들은 모두 발해토기들이다.형태로 보아 모두 고구려식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지금은 비록 하찮은 토기 조각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 발해인의 숨결이 살아있다.

 

토기 그래픽 (완성되면)
이 토기는 원래 이런 모양이었을것이다.배가 불룩하고 밑바닥이 평평한 이토기는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해자 니꼴라예프카 성 밖에는 거대한 해자가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너비 10미터 깊이 3미터의 이 해자는 적을 가로막는 제1방어선이다.

1300년전 발해인들이 처음 지었을 니꼴라예프카 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 둘레는 4킬로미터,성벽의 높이는 10미터.
해자와 옹성, 치까지 설치해 놓은 니꼴라예프카 성은 한마디로 적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이 곳에서 청동부절이 발견된 것은 지난 85년,
놀러온 학생들에 의해서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륙을 잇는 시배리아 철도가 관통하고 있는 이 성이 부절이 발견되면서

발해 동경용원부 정리부의 소재지로 밝혀졌다.


 


수도에서 사신이 오면 좌효위장군 섭리계는
부절을 확인하고 왕의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부절이 발견된 동경용원부가 중요한 이유는
인근에 있는 엑스뻬디찌야만에서 그 해답을 찾 을 수 있다.

 

 


발해에는 외국으로 가는 5개의 길이 있었다
거란도 영주도 압록도 신라도 일본도가
그것이다.


상경에서 길림을 거치는 거란도,
영주를 거쳐 중원으로 가는 영주도,
압록강을 타고 산동반도로 들어가는 압록도,
동경에서 함경도를 거쳐 강원도로 내려가는 신라도,
그리고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들어가는 일본도.일본도의 출발지가 바로 동경용원부였던 것이다.

 

 

발해인들은 일본으로 가기위해 동경용원부를 거쳐 이 엑스뻬디찌야만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엑스뻬디찌야는 탐험이라는 뜻이다.
바다에서 그 이름처럼 발해인들은 이곳에서 일본으로 가는 탐험의 배를 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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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유인촌 멘트

발해인들은 러시아 탐험만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뛰웠습니다.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것은 발해인들이 배를 띄운 시기가 한결같이 겨울이었다는 점입니다.
목숨을 잃은 네명의 젊은이가 뗏목탐사를 시작한 시기도 바로 겨울이었습니다.

발해인들은 왜 하필 겨울에 항해를 시작했을까요.
거센 눈보라와 폭풍우를 헤치고 그들은 과연 무사히 동해를 건널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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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후꾸라 항

우리나라의 동해가 바라보이는 일본 후꾸라 항구


이 작은 어촌의 집집마다에는 눈에 띄는 독특한 풍경이 있다.

로 집 앞에 세워둔 성처럼 커다란 대나무 벽이다.

지붕 높이까지 세운 대나무 벽은 웬만한 힘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든든하게 만들어졌다.
대나무 묶은 자리 이 곳 사람들은 겨울바람을 대비해서 이런 대나무 벽을 만드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대대로 전해 엉성한 대나무 벽 내려온 지혜라고 했다.

할아버지 손짓하고 (현장음)--------------------------------
여기 대나무들은 할아버지 때부터 쓰던 것인데요.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이지역이 겨울에 그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가?
할아버지 무척 강합니다.저 위 지붕에 있는 물동이가 날아갈 정도입니다.

겨울에 바람이 어느쪽에서 불어옵니까?
할아버지 북서풍이 아주 강하게 불어옵니다.


아 북서쪽에서 이쪽으로 불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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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불어오는 북서풍이 발해인들의 항로와 무슨 관련이 있는건 아닐까
취재팀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한국 해양연구소를 찾았다.

해양연구소 이흥재 박사는 인공위성으로 동해를 관측해 동해의 자연조건과 게절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97년 1월 동해의 풍향도다.
시베리아쪽에서 시작된 북풍은 동해를 지나면서 북서풍으로 변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바람
만약 발해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띄운다고면 이 바람만 그대로 타고 가도

어렵지 않게 일본의 노도반도 지역인 후꾸라 항구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바람의 세기였다.

이흥재 박사 (인터뷰)--------------------------------
통상적으로 동해쪽에는 겨울내내 11월부터 3월정도까지는

강한 북풍 북서 계절풍이 불어가지고 파도가 많이 크게 일게 돼요.

상당히 거친 바다다 이렇게 얘길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강한 바람이 불때가 있거든요.

한 15내지 20미터분다 그러면 5m정도의 파고가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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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들은 과연 어떤 배를 타고 이 거친
바다에 나섰을까?


거센 파도를 타고 넘으려면 앞머리가 뾰족하고 높아야 하고

배의 방향을 바로잡으려면 발달된 키가 있어야 한다.

또한 강한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돛대가 필요하다.
배 길이는 20미터,백명정도의 인원이 승선할 수 있는 기동성 강한 이런 목선이 아니었을까!

윤명철 교수 (인터뷰)--------------------------------
황해나 남해같은 경우는 육지를 바라보면서 항해할 수도 있죠.

그러나 동해는 워낙 먼거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목적이라든가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자국의 해역내까지는 밑으로 최대한 내려옵니다.

그것은 육지를 바라보면서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다시 먼바다로 떠서 동해를 직항해야 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천문항법이라는 고도의 발달된 항해술이 있지 않으면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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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항해술을 갖춘 발해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서해안 각지역으로 도착하게 되는데,가장 대표적인 도착지가 바로 후꾸라 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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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라 항구는 1300년전 바다를 건너온 발해인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발해사절로 항구에 세워진 이 비석엔 발해 사절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지금은 한낱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지만
항구 전경 천년전 발해인들이 도착했던 이곳은 일본의 대 표적인 항구였다.

항구 인근의 하꾸이시 역사민족 자료관

 

이곳에는 몇 년전 이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당시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제사와 관된 것들이었다.
고대부터 방울은 제사에 사용된 주술기구다.이런 방울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면
그릇 이지역에서 빈번하게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제사유물들이 발해인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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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방에서 중요한 제사를 주관한 곳은
게다신사 간판 바로 이곳 게다신사다.

지붕 틸다운 8-9세기 발해인들이 도착했을 당시에는, 중앙정
부에서 이 게다신사로 사람을 보내 국가적인 차원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지마 요시다카 (인터뷰)--------------------------------
발해 선박이 일본에 도착하면 당시의 일본인들은 발해인들과 함께 들어올지도 몰를 여러 귀신들은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도 발해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안전항해를 염원하는 의식도 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배들 이 낯선 이국땅에 호기롭게 발을 들인 발해인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취재팀은 다시 발해의 흔적을 찾아 나라로 향했다.


8세기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의 평성궁터는 지금도 유적발굴이 한창이다.
오해전 수도의 자취를 찾기위해 유적발굴을 해온 지 올해로 35년째지만

앞으로도 발굴계획은 60년이 더 남아있다.
천년의 보고를 찾아내는 이 세심한 작업속에서
지난 88년 발해와 관련된 유물한점이 발견됐다.
그것이 일본에 온 발해인들의 정체를 알려줄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취재팀은 그 유물을 보기 위해 나라국립문화재 연구소를 찾았다.

<유물처리연구실>

연구원은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두 개의 유물상자를 꺼내왔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고 네모난 나무조각.


 

 

목간은 목종이가 귀했던 시절 나무를 사용했던
일종의 메모지였다.


야마시타 신이찌로 (현장음)--------------------------------
여러군데에 교역 교역교역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낙서 내지는 글씨 연습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 발해사라는 글자도 있는데 사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흘려쓴 글씨중에는 분명
발해라는 글씨가 있었다.발해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 살고 있던 한 일본귀족이 남긴 낙서이다.


 


발해사 목간과 같은 시대의 유물인 견고려사 간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공식문서인데 당시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목간은 발해에 갔던 사신이
천평보자 2년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개의 목간에 의하면 발해와 일본은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정확한 증거를 찾기위해 취재팀은 다시 도쿄에 있는 황궁을 찾았다.
출입구 앞의 자동차 황궁 궁내청에 보관돼 있다는 발해의 문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취재팀은 겨우 문서의 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복도에 선 PD 직원에게 받고 (현장음)
좀 열어봐도 되겠습니다까?
(일본어 통역)
하이

중대성첩

취재팀에게 건네진 것은 한 장의 사진,발해가 보낸 바로 그 문서였다.

중대성첩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국가와 국가사이에 오고간 일종의 외교문서다.

문서를 보낸곳은 발해의 중대성.당시 왕명을 맡고 있던 곳이다.
이문서는 841년 일본 태정관에 전해졌다.

중대성첩에는 당시 일본에 건너간 발해인들의 직책과 인원수를 자세하게 적고있다.


 

 

그들은 일국을 대표한는 105명의 공식사절단이었다.
직책 팬에서 천문관까지 발해의 사절중에는
천문생 한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항해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중대성첩에는 이런글귀가 적혀 있다.
항해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어 오래 때를 기다려 입국한다.

정당성 좌윤 하복연을 사신으로 보내 귀국과 교류하고자 한다.


 


이 문서를 조인한 사람은 건황, 훗날 발해 12대 왕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도착할 수 있는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만큼 동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발해 사신들에겐 목숨을 건 항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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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유인촌

발해인들이 험난한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발해는 사신파견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 때문에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한가지 놀라운 사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전 우리역사에는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해의 당나라 공격입니다.
이 전투는 우리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었고 또한 승전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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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등주성 산동반도에 위치한 당나라의 등주성.
성벽들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한 때는 732년.
대장군 장문휴는 수군정예 2만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성으로 진격했다. 

파죽지세로 등주성을 함락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인다.

우세한 군사력과 속전속결의 전략이 거두어낸 승리였다.

한규철 교수 (인터뷰)--------------------------------
우리한국사에서의 전쟁개념은 주로 방어의 개념이었습니다.

귀주대첩,살수 대첩이니 모두 방어에 성공했다는 거죠,.

근데 아마 우리민족사에서 최초로 정규군대가 외국을 공격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는 이 사건이 아마 최초였고

그 후로는 없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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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유인촌

이 사건과 발해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실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발해에게 무척 불리한 상황이였습니다.
발해에 복속돼 있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와 손을 잡음으로써
발해는 서쪽의 당나라,북쪽의 흑수말갈,
그리고 남쪽에 당시 당나라와 제휴하고 있던 신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는 형세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삼각구도를 깨지 않는 이상 발해로서는
존립자체가 위태로운 절대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MC 이런 불리한 정세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발해가 선택한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으 로 하여금 배후에서 신라를 견제하게 해놓고,
그 다음으로 발해는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제휴를 깨기 위해 등주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MC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했을 때 당나라의 대응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특이할만한 반격도 없었고 오히려 발해우대정책을 펼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발해가 당시 그 숨막히는 정치 외교전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것으로써 발해 사신들이 목숨을 걸고 동해를 건넜던 한가지 이유는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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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해안 일본 후꾸이현의 마쓰바라 해안
마쓰바라 해안 인근에는 작은 신사가 있다.
평화롭게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이 신사는

 

신사 훑고 발해사신들이 묵었던 숙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신사 어느곳에서도 발해 사신들의 머물렀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사 바로 앞 공터에서 오래전,발해사신들 유적을 발굴 했는데

이 땅이 사유지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 유적을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는 이 땅속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가와무라 도시히꼬 (인터뷰)----------------------------------
이 자리에서 사신단을 맞이하여 큰 불을 피웠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자리에 발해객관,즉 발해의 손님들을 맞이하던 장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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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사신들의 묵었던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한군데의 유물발굴 현장이 있었다.

한자리에서 나온 도자기 조각들 8세기경 집단거주지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이곳에 집단으로 모여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혹 시 발해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은 


 

 

이 온돌 유적때문이었다.온돌은 고구려인
아궁이 자리 들의 대표적인 난방 기구였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서도 널리 쓰였다.
원형그대로 남아있는 이 온돌유적은 분명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미야시타의 손 (인터뷰)----------------------------------
여기에 냄비나 가마솥을 올려 두었을 것입니다.

아궁이의 벽은 남아있지 않지만 여기에서 불을 때서 따듯한 공기를 저쪽까지 보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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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신들이 한번 일본에 오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대체로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오랜 시간동안 일본에서 무엇을 했을까?

 

발해사신들은 후꾸라 항구에서 여독을 푼후 수도인 나라로 이동한다.

평성궁 주작문

궁궐로 안내된 그들은 일본왕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는데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발해무왕 대무예는 주변의 여러나라를 정복하여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도다.

예로부터의 법도에 따라 이웃나라와 교류를 돈독히 하고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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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서와 함께 사신들은 고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일본왕에게 선물한다.

사신들이 가져온 물건은 호랑이 가죽 담비 가죽 같은 가죽류와 ,산삼 꿀 등이었다.

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생산되는 발해의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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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왕실 역시 발해사신들에게 선물을 내리는데

면,비단,황금,수은,우산등 종류는 물론 그 수량도 무척 많았다고 한다.

 

중대성첩

일본왕실은 발해 사신들에게 관직을 내리는데

대사에서 수령에 이르기까지 사신들은 모두 일본의 귀족지위를 얻는다.

그런데 발해의 사신중에서 가장 많은 65명의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대수령

이 수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송기호 교수 (인터뷰) ---------------------------------
발해사회라는 것은 왕과 중앙의 관료들이 있지만은

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상당히 많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런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중앙의 관료체제 밖에 있으면서도 상당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발해 중앙정부 에서는 이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관료로 일부는 편입시켰지만은 그대로 두면서 일본에 사신보낼때도

같이 참여시키는 이런 여러 가지의 역할을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수령들은 일본에 갔을때는 교역에 참가하기도 하고 아마 다은 일도 했을것으로 생각되지만은

대체적으로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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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글씨 발해에서 줌아웃 수령을 중심으로 발해 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역을 전개했다.

첫날은 관리들과 둘째날은 수도사람들과 셋재날은 시장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사신들은 첫날의 관무역에서 일본화폐로 40만냥을 얻었다고 한다.

 

 

발해의 수도에서 당시 일본의 화폐 화동개진이 출토됐는데 이는 발해사신들이 무역을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일본 화동개진

그렇다면 당시 발해 사신들이 물건을 팔고 받았던 40만냥의 돈은 어느정도의 가치일까?

일본책 화동개진의 가치가 가장 높을때는 700엔,가장 낮을때는 33엔이었다.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40만냥은 요즘 돈으로 6억6천만원.!

서길수 교수 (인터뷰)----------------------------------
얼마만큼 일본시장에서 그게 인기가 있었느냐면요.

일본시장에서 발해의 담비나 가죽을 금지시킬 정도로.

한번은 발해의 사신이 갔는데 그쪽에 왕족의 한사람이 담비 가죽으로 여덟벌을 입고 나왔다 이거예요.

그게 신분의 상징이었어요.

발해의 가죽옷을 입는 다는 것은 최고의 신분을 나타낼만틈 발해물품은 일본에서 인기있었다는 거죠.

이런 것으로 봤을 때 이것은 충분히 경제적인 요건이 양쪽에 맞아떨어졌다 그런 부분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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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사신들은 이듬해 5월,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후꾸라 항구에는 사신들이 타고갈 배를 만들기 위해 2개의 조선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발해인들은 그 조선소에서 직접 목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지마 요시다카 (인터뷰)----------------------------------
9세기 헹이나 시대의 문서를 보면 바로 이곳에서 발해로 돌아가는 배를 만들기 위해 벌채를 많이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 사실로 볼 때 이곳에서 발해선박을 건조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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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신들이 돌아가는 그날까지 일본왕실의 대접은 극진했다.

비석 발해사절 글씨보이면
사신들이 한번 다녀갈때 마다 심각한 무역역조를 감수해야 했지만 일본으로서는 발해가 필요했다.

이미 발해는 일본을 능가하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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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MC

1300년전 발해는 뛰어난 항해술로 동해상을 장악하면서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그 증거로 한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은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입니다.

이 책속에는 발해에 대한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발해 13대 경왕에 이르러 고금의 문물과 제도를 완비하여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나라.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가 발해를 이렇게 부른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발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융성한 국가가 아니었을까요?

지금 이 그림은 발해의 한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속의 인물들입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이 두사람은 무사,

그리고 악기를 천으로 감싸고 있는 이 두사람은 악사,

우산을 들고 있는 이 두사람은 시종입니다.


이 1300년전의 발해인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했을까요?

발해의 융성했던 면모를 알기 위해 이들이 살았던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복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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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국내 남아있는 발해의 유물은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은 360여 점이 전부다

그나나발해의 뛰어났던 예술을 찾아보기 거의 어렵다

 
화려했던 상경성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발해 유물들이 있다.
벽화조각
불교예술이 뛰어났던 발해,


 


그 중에서 눈여겨 볼 것은 문자기와다

기와에 나타난 이 글씨는 한자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 발해가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연화문 벽돌 1300년을 거쳐온 이 흔적만으로도 발해인들의 예술성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 흑룡강성.
수도 상경성의 터는 남아있지만 화려했던 지난날의 영화는 없다.

170여년동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은 발해문화의 꽃이었다.

그러나 1300년이 지난 오늘,성터의 소중한 유
쓰레기 적들은 훼손되고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6m높이의 거대한 석등.
불교를 숭상했던 발해는 상경성에 9개의 절을 지었고,절 앞에는 석등을 세웠다.

상경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해자와 곧고 반듯하게 뚫린 도로의 길이이다.

성터에 남아있는 흔적을 모아서 1300년전 영화로웠던 상경성의 원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 보았다

상경성의 성벽은 안에다 돌을 쌓고 겉에다 흙을 바르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완성된 성의 둘레는 총 16킬로미터,조선시대 한성과 비슷한 크기다.

성내부로 들어가면 잘 정돈된 도시계획을 볼 수 있다.


 

 

중앙으로 시원하게 뚫린 주작대로는 폭이 무려 110미터.

상경성엔 모두 81개의 주거지가 있었다.

한 구역당 크기는 가로 500미터 세로 300미터.

이 크기로 보았을 때 당시 상경성 안에는 대략 2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경성 내에는 내부에 또하나의 성이 있었는데 궁전과 관청이 있는 황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전 주춧돌의 크기만으로도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춧돌


 


이번엔 황성을 복원해보았다.
당시 황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궁전이 있었다.
1궁전 2궁전은 왕이 국사를 보던 곳이고
4궁전에는 침전이 있었다.


 

 

그리고 궁전 동쪽편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두 개의 섬과 호수 정자가 있는 이 인공정원은
통일신라의 안압지와도 그 형태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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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MC

지금 보신것처럼 수도 상경성은 그 규모의 거대함은 물론

내부의 화려한 건축양식에서도 발해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단 수도의 면모뿐만이 아니라 발해의 국력을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영토입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나라입니다.

과연 발해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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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광활한 황야 발해의 영토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유적이었다.

취재팀은 연해주 옵자리브 지역에 남아있는 발해의 유적을 찾아갔다.

산성벽

이곳에 있다는 유적은 산정상에 위치한 이름없는 성이었다.
정상에 다다르자 넓은 평지가 펼쳐졌는데 이곳이 성의 내부였을 것이다.

한바탕 치열한 전투라도 치른것처럼 허물어져 있었지만 성의 규모나 지리적인 위치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미터 ,무너진 정도로 보았을 때 원래의 높이는 4미터 정도였을 것이다.

삼면은 이렇게 높은 성벽을 쌓았고


 


성벽의 한 쪽면은 강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까마득한 천연절벽이 그대로 성벽을 이룬 천혜의 요새였다.

취재팀은 무너진 성벽에서 의외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PD 벽에서 뼈조각 꺼내고 (현장음)--------------------------------
이거 갈비뼈네

성벽의 한쪽에는 불에 탄 자리도 보였다.

"손위의 부서지는 재 같은데"

혹시 전쟁의 흔적은 아닐까.잔해도 거두지 못할만큼 급박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솔빈강 팬 이 산성을 끼고 도는 라즈돌나야강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수이푼 강이라고 불렸다.
수이푼, 그것은 발해의 한 도읍지이름인 솔빈부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성은 연해주의 솔빈부를 지키는 발해의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발해의 유적은 연해주 일대를 포함해서
최북단으로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지역에까지 이른다.

발해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장소를 파악하고 외국의 기록들을 꼼꼼이 분석,종합한 결과
한규철 교수는 발해의 영토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한규철 교수 --------------------------------


 

 

요동,요하를 중심으로 해서 송화강 이게 송화강이죠.제1송화강 2송화강으로 돼있습니다.

가다가 여기서 흑룡강으로 내려오는 흑룡강 흑수 지역입니다.

여기서 흑룡강 중하류로 바로가지 않고 여기서 좀 남쪽으로 잘라서 흑수말갈과 연접해있지 않느냐

 


지도 ①

MC 여기 한 장의 지도가 있습니다.
이런 모양의 땅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좀 더 자세한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도 ②로 바뀐다. MC 어떠십니까,
무척 낯익은 땅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처음 보신 이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이북지역.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우리의 역사무대였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입니다.


 


지도③로 바뀐다. MC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

다시 이 드넓은 영토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왕조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무대는 지금의 한반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지도 ④로 바뀐다. MC 우리 역사상 만주를 최후로 지배했고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그 왕조의 이름은, 바로 발해입니다.
지도에 발해 글자 떠오른다.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시대 이후의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시기 통일신라의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들어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고 끌어안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역사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것,
그것이 우리가 1300년전의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