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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그날 73회<청년 박지원, 과거시험에 백지를 던지다>

파라클레토스 2015. 12. 16. 10:56

청년 박지원, 과거시험에 백지를 던지다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 북학사상의 리더,
연암 박지원!


18세기 조선에 분 새로운 변혁의 바람!
그 중심을 이끌던 백탑파의 정체는?
정조시대 일어난 문체반정,
열하일기는 왜 금서가 되었나?


노론 명문가 출신에 능력까지 갖추었지만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박지원!
조선 시대를 넘어 오늘날 그가 던지는 시대의 화두는 무엇일까?


 


■ 박지원, 과거시험에 백지를 던지다!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장력 좋기로 소문난 인재, 박지원. 영조 46년에 열린 1차 소과시험에서 박지원은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그의 답안을 본 영조는 친히 침전으로 불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합격을 당연시하던 상황에서 치러진 2차 시험. 그런데 정작 박지원은 답을 쓰지 않고 백지를 제출한다. 급기야 이후로는 더 이상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데! 조선 시대 선비들의 꿈, 입신양명의 통로였던 과거시험, 출세가 보장된 그 길에 박지원은 왜 백지를 낸 것일까?
이후 양반전, 허생전 등을 써내며 작가의 길을 간 박지원, 그가 ‘글’을 통해 하고자 한 말을 무엇이었을까?

 
 

 

■ 정조,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목하다?
연암 박지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열하일기’! 박지원이 44세 때 쓴 청나라 기행문으로, 완본이 나오기도 전에 9종의 필사본이 돌 정도로 당시 대중들 사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1792년 정조는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 하나로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를 거론하며 그 근원에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다고 지목한다. 당대 인기 베스트셀러에서 금서가 돼버린 열하일기!
당시 대중들은 열하일기의 어떤 점에 열광했으며, 정조는 어떤 점을 문제시했던 걸까?
한편,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실상을 전하며 ‘이것’이야 말로 청나라의 진수!라고 주장했는데,
스튜디오에 등장하자마자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이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박지원, 실학을 실천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출세지향을 거부하던 연암 박지원. 그는 친구의 천거로 50세 늦은 나이에 종9품 말단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청년시절의 행보와 달리 뒤늦게 관료가 된 이유는 힘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청나라에서 보고 온 것들을 실험해보자 하는 마음이 컸다. 실제로 그는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면서 수레, 벽돌굽기, 물레방아 등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청나라식으로 직접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관리가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할 때 박지원은 그가 추구해온 이용후생(利用厚生)사상을 직접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정조는 크게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문체반정으로 시작된 정조와 박지원의 인연. 과연 그 끝은 어떠했을까?
또한, 개혁의 바람이 불던 18세기,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 교수가 특별출연, 당시 세계사를 재밌게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