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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그날[75회]홍경래의 난, ‘저항의 시대를 열다.‘

파라클레토스 2015. 12. 16. 10:59

홍경래의 난, ‘저항의 시대를 열다.‘


 

조선 왕조의 전복을 꿈꾼 반란인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한 항거인가?

평민 지식인, 장사, 상인, 양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
이들이 꿈꾸었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19세기, 잠들었던 백성의 의식을 깨운
‘홍경래의 난’
저항의 시대를 연 바로 그날로 돌아가 본다!


 

■ 홍경래,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1811년 음력 12월 18일. 한 무리의 무장한 백성들이 가산 관아를 덮친다. 이들을 이끈 건 바로 용강 출신의 평민 홍경래. 그는 과거 시험에 실패한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과 군자금을 모아 난을 준비한다. 홍경래의 주위로 사회적 모순에 불만을 품은 평민 지식인, 군사적 능력을 갖춘 장사, 군자금을 댄 상인, 관직 진출에 실패한 양반, 광산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모여든다. 마침내 전열을 갖춘 홍경래와 봉기군. 이들은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 8개 고을을 점령한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치밀하고 조직적인 저항. 과연 이들이 꿈꾼 새로운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 차별의 땅 평안도, 오랜 모순을 고발하다
영조 대 실학자 이중환이 쓴 지리서 <택리지>에서는 ‘서울 사대부는 평안도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평안도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평안도 출신이란 이유로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과거마저도 제 기능을 상실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직을 얻기 위해 세도가에 뇌물을 바쳤고, 그렇게 관직에 오른 자들은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백성들을 수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홍경래와 봉기군은 이런 모순을 바로 잡기 위해 ‘지역 차별 철폐’와 ‘세도 정치 척결’을 주장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그늘, ‘지역 차별.’ 홍경래를 통해 그 진상을 파헤친다.

 

 

 


■ 농민, 항쟁의 주역으로 거듭나다

1811년 음력 12월 29일. 봉기군은 평안도 박천 송림 평야에서 관군과 실질적인 첫 전투를 치른다. 하지만 결과는 대패. 봉기군은 수백 명의 전력을 잃고 정주성으로 철수한다. 관군은 기세를 몰아 반격을 개시한다. 이 과정에서 관군은 민가를 모조리 불태우고, 무고한 양민까지 죽인다. 관군의 초토전술은 백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수많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한다. 저항의 중심세력으로 거듭난 농민들.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봉기군이 정주성에서 넉 달 가까이 버티는 원동력이 된다.

 

 

  

■ 최후의 전투, 저항의 시대를 열다. 
100일이 넘게 이어진 관군과 봉기군의 대치. 1812년 4월, 관군은 1700근이 넘는 화약으로 정주성을 폭파시킨다. 성의 함락되면서  수많은 봉기군이 목숨을 잃고, 대원수 홍경래도 총탄에 맞아 숨진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봉기군 2,983명이 체포되고 그 중 여자와 10살 이하 어린 아이를 제외한 1,917명이 참수되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저항은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홍경래의 난이 남긴 저항정신은 백성의 가슴에 남아, 이후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