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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4회 <명성황후 실종사건> 2013/11/16

파라클레토스 2013. 11. 28. 23:09

 

명성황후 실종사건

 

 

1882년 6월, 명성황후의 국상이 선포된다.
하지만 관에 담긴 것은 시신이 아닌 명성황후의 옷,
죽음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국상이 강행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걸까?
베일에 싸인 명성황후의 행방과
시신 없는 국상의 비밀을 밝힌다!

 

 

 

■ 반쪽짜리 국상을 선포하다 

1882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이 심해지자 구식군대는 난을 일으킨다.

군제개혁을 주도한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왕비를 살해하고자 경복궁을 습격한 군병들. 하지만 왕비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태 수습을 빌미로 다시 정권을 쥐게 된 흥선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왕비의 죽음을 선포한다.

죽음도 확인되지 않은 채, 명성황후의 시신도 없이 진행된 국상.

흥선대원군은 왜 명성황후의 석연치 않은 국상을 서둘렀던 것일까? 왕비실종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힌다.


 

 

■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 조선의 역사를 뒤흔들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선택한 왕비 명성황후.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두 사람의 갈등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점에 이른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청에 납치되었는데, 항간에는 납치의 배후가 명성황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원군이 납치된 후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환궁한 그녀의 모습은 이러한 의혹에 불을 지폈다.

이들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그 갈등의 원인을 파헤친다.

 

 

 
■ 개화와 척사의 갈림길에서

19세기 말, 조선은 개화와 척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 앞에 조선의 운명은 흔들리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만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들의 갈등은 격변기 격랑 속에 조선을 약화시키고 만다.

치열한 정권다툼 속에 조선은 외세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조선왕조의 500년 조선왕조를 파국으로 몰아간 안타까운 역사.

역사저널 그날 5회에서는 <1882, 명성황후의 실종사건>을 통해 근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날’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