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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그날 57회<[연말특집] 민생을 위하여 - 김육, 대동법을 지키다 > 2014/12/27

파라클레토스 2014. 12. 30. 17:49

<연말특집> 민생을 위하여 - 김육, 대동법을 지키다
  

 
『대동법을 시행하니,
백성들은 밭에서 춤을 추고 개들도 아전을 향하여 짖지 않았다.』
 
‘200년간 모색해 100년간 개혁한’
대동법.
백성을 살려 나라의 근간을 보전한
조선 최고의 조세 개혁이다.
 
“저를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영의정의 자리에서도
백성보다 가난했던 양반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대동법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일까.

 
 
 
■ <연말특집>으로 준비한 대동법의 모든 것!
지난 <한 돌 특집> 앙케트 쇼에서 ‘역사 교사들이 부활시키고 싶은 인물’ 8위에 올랐던 김육. 그는 10위권에 있던 다른 인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김육이 8위로 지목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동법이 시행되기 전 전국적으로 극심했던 방납의 폐단은, 불합리한 세금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방납인과의 은밀한 뒷거래를 통해 수령이 백성을 수탈하는 과정을 역할극으로 준비했다. 또, 대동법의 세액 ‘1결당 12두’로 기억되는 도량형을 실제 사용되었던 조선시대 도량형기를 통해 제대로 배워본다.
 
 

■ “내가 죽거든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까 걱정입니다”
김육은 죽음을 앞둔 때에도 효종에게 당부의 편지를 남길 만큼 대동법에 평생을 걸었던 인물. 1658년 9월 4일 김육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십시일반 부의금을 마련해 김육의 집을 찾아온다. 자손들이 한사코 이를 사양하자 백성들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직접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세우는데...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세제도로, 조선 후기 사회의 근간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동법. 실제 대동법은 백성들의 부담을 얼마나 줄여주었던 것일까? 100여 년 간 번번이 중도에 폐지되었던 대동법을 법제화한 김육의 삶을 통해 대동법의 가치와 의미를 살펴본다.
 
  

■ 백성보다 가난한 양반 김육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희생된 김식의 4대손 김육.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를 연이어 여의고 상주로만 8년의 시간을 보냈다. 27살이 되던 해, 늦은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해 가족을 이끌고 잠곡에 은거한다. 처음에는 집이 없어 굴을 파서 생활할 만큼 가난했고, 2년 뒤에야 겨우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김육은 생계를 위해 농사꾼, 약초꾼, 나무꾼 그리고 숯장수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그야말로 ‘백성보다 가난한 양반’이었다. 그렇게 생활하기를 10년. 김육은 인조반정으로 계기로 조정에 나가게 되고, 세금 수탈이 유난히 심했던 충청도의 관찰사로 임명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동법을 추진하기 시작하는데...
 
 

■ “저를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새로운 왕 효종이 즉위했지만 대동법은 여전히 법제화되지 못했다. 마침내 김육은 70세의 나이에 자신의 정치인생을 건 사직상소를 왕에게 올린다. 상소를 받은 효종은 김육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왕의 다짐을 받은 대동법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듯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대동법은 법제화되지 못했다. 조정을 기나긴 논쟁으로 몰아넣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대동법이라고 주장했던 김육. 12월 27일 토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연말특집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죽기 전날까지 안민(安民)의 개혁, 대동법을 외친 김육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