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윤원형(尹元衡, 1509년 ∼1565년 11월 18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외척이자 문신으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넷째 아들이자 문정왕후의 남동생이며, 윤원량·윤원로의 동생이며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본관은 파평, 자는 언평(彦平)이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과 갈등했다. 서원군에 봉해진뒤 지중추부사와 예조,이조판서 특진관 등을 거쳐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내고 서원부원군으로 진봉했으나 그의 권력확장을 경계한 명종은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윤임은 9촌 아저씨였다.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파평이다. 경기도 출신.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초기 활동
윤원형은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 태사 윤신달의 19대손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15대손이다. 위로 형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가 있고, 누나인 문정왕후가 있었다.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누나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간 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관을 거쳐 1538년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응교 등을 지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후의 명종)을 낳자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또한 인종의 외삼촌 윤 임이 경원대군을 해하고자 한다고 모함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윤원형과 윤임은 친척이었는데, 윤원형의 5대조 윤번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로,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의 4대손이었다. 윤임은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후손으로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과는 8촌간이었다. 윤원형은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고손자였다.
[편집] 관료 생활
1544년에는 중국 명나라에 성절사로 연경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통정대부승정원좌부승지로 승진, 다시 좌승지, 공조참판 등으로 승진했다. 1544년 중종이 병으로 죽고 장경왕후 소생 태자가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편집] 권력 장악
을사사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인종은 병약하였는데, 그는 경원대군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공공연히 갈등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 공로로 보익공신, 위사공신 등에 책봉되었다. 이때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자신의 외조카인 계림군을 추대한다는 설을 퍼뜨렸고, 정난정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이를 문정왕후에게 전했다. 윤임은 귀양가던 길에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사당했다.
이어 윤원형은 1546년 1월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서원군에 책봉되었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 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무겁지 않게 됩니다. 개정하소서. | ” |
승진과 진봉을 사양하였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고, 곧 예조판서로 승진했고, 특진관을 거쳐 1548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그뒤 사사하였으며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 일로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그와 정적이 되었다. 1547년 동지춘추관사로 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을 도왔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1557년 영중추부사와 우의정을 지냈다.
[편집] 몰락과 죽음
1560년에는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 되었다. 이후 우의정·영의정에 등을 지내며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며,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고 강음에 유배되어 죽었다. 일설에는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를 보고 첩 정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이 빗발쳤고,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고 곧 명종도 바로 사망했으므로 복권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한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산4-20번지 선산 근처에 안장되었다.[1]
[편집] 윤원형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가계
정적이었던 김안로는 그의 장인 김안수의 사촌 형제였고, 명종의 외삼촌이며 인종과는 10촌간이면서 조카사위가 되는 이중 인척관계였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고조부 윤사흔의 누나였다.
- 할아버지 : 윤항(尹頊) 내자시판관 지냄
- 아버지 : 윤지임(尹之任, 1475년 - 1534년)
- 어머니 : 전성부대부인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 1475년 - 1511년)
- 처 : 연안김씨,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딸, 김안로(金安老)의 당질녀
- 첫째 아들 : 윤계(尹繼)
- 둘째 아들 : 윤효원(尹孝源)
- 셋째 아들 : 윤충원(尹忠源)
- 넷째 아들 : 윤담연(尹覃淵)
- 사위 : 이영민(李榮敏)
- 사위 : 김귀남(金貴男)
- 첩 : 정난정, 부총관 정윤겸의 서녀
- 기타 : 김안로(金安遂), 사돈이자 처당숙,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이 김안로의 손녀딸과 결혼했다.
[편집] 기타
- 뒤에 나타난 전설에는 그와 정난정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난정이 체포되어 노비가 된 뒤에 죽었다는 전설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은 아니나 정난정 및 윤원형에 대한 사림의 원한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 뒷날 선조 때의 동인(東人)의 영수 김효원(金孝元)이 한때 그의 집에도 출입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이를 문제삼아 공론화하면서 사림이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된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 ↑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61103140413945&p=segye
- ↑ 2002년 11월 파평윤씨 선산에서 발견된 윤씨 미이라의 친정아버지이다. 윤씨 미이라는 문정왕후의 친정 종손녀이며, 인종후궁 숙빈윤씨, 조선명종 등의 조카딸이었다.
[편집] 참고 문헌
- 중종실록
- 인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
- 연려실기술
- 대동야승
- 국조보감
- 파평윤씨 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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