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모
소나무와 정자가 있는 風情
전람회 기간 : 2014년 10월 8일(수)∼10월 14일(화)
장소 : 인사아트센터 전북관
156-859 서울 동작구 서달로 10길 110-3
osanart@hanmail.net 010-3654-9878
홍성모 선생의 전람회가 인사아트센터 전북관에서 열립니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담은 정자를 찾아 다니면서 선조들의 정취를 케치하고 이를 작품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서양화에서 한국화로 전과한 홍성모 선생은 남달리 소묘력이 뛰어나고 한국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작품을 보는 순간 한국적 정취와 한국적 예술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朴>
<목 차>
1. 약력
2. 작품 사진
3. 작가의 변
4. 평론
<약 력>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85)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한국화 전공)졸업
이당미술상 수상
개인전 8회(공평아트센터, 인사아트센타 등)
부스전 4회(독일,중국.서울.안산)
한국 전통산수화 소장 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현대미술 100초대전(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안산)
후소회 등 400여 회 초대 ,그룹전 출품
현재 :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겸임교수.
원광대학교 미술대학강사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강사역임.
국립현대미술관 시니어강좌 강사 역임
한국미술협회 , 원묵회, 동방예술연구회,
광화문 아트포럼 회원. 후소회원
<금강송 210x95cm> <상천리 소나무>
<정자 33x33cm> <정자와 폭포>
<솔바람 210x95cm> <소나무>
<작가의 변>
- 화폭에 담은 부안기행-
어느새 입에서 연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날씨가 추워졌다. 벌써 남쪽에도 오늘 첫눈이 와서 설렌다는 친구가 보내온 카카오톡 사연에 내 마음도 들썩인다. 얼마 전 선선했던 가을이 쌀쌀하게 변해가고, 곱게 단장했던 가로수 잎들은 늦가을 바람에 흩날려 차바퀴에 이겨져 나뒹구는 모습에 왠지 내 마음이 아려온다.
어릴 적 나의 고향의 가을,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이 늦가을의 끝자락에 벌써 마음은 고향을 향하고 있다. 설렘 가득한 봄은 소박한 쑥이나 풀뿌리를 캐며 산골에는 사는 애들처럼 진달래며 찔레꽃의 추억은 없지만, 소박한 논두렁에 핀 자운영 같은 보랏빛으로 시작하고 여름에는 녹색 물결의 논과 모정의 한가로움이 가득하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물들임이 수채화처럼 그려지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온 들판을 순백으로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고향은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그립고 또 그립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부안읍에서 가다리행 버스로 20여분 남짓한 조용하고 아늑한 농촌 마을이다. 지금은 대부분 고향을 하나둘씩 사람들이 떠나버려 비어있는 농가가 많고 쓸쓸한 마을로 변해가고 있어 가슴 아프기도 한 고향이다.
항상 눈을 뜨면 앞쪽에 고부 뒷동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변산의 우금바위가 우뚝하게 서있고 마을 옆으로 동진강 고부천이 흐르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의 고향의 모습은 늘 어머니의 품 같은 따스한 그런 곳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나에게는 화가로서의 실경 산수를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모태 같은 곳이었다.
나의 태생은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화가로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화가로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장성해서 결혼하고 두 딸의 부모가 되어 생각해보니 아픈 아들 때문에 눈물과 한숨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부모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병을 알았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의 아픔을 혹시 알까 친구들한테까지 숨기고 어렵게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몸무게가 40 킬로그램을 넘기지 못해 학교까지 가는 신작로를 자전거로 통학을 하다가 몸이 가벼워 바람에 몇 번이고 논과 개울로 빠지기를 반복하니 그 길이 멀기만 했다. 어느 때는 눈이 내려 한 겨울 고향 신작로 길 걷기 힘들어 운 적도 있고, 밤이면 어김없이 방아 찧는 듯한 심장 박동은 가슴을 압박했고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가정형편까지 힘들어 겹쳐 몇 번이고 생을 마감하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그림이라는 유일한 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픔을 견디며 학교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 그 순간은 마음이 언제나 편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하였다. 돌이켜보면 화가가 된 이유가 밖에 나가 뛰지 못하고 항상 방구석에만 있으면서 만화와 극장 포스터를 보고 그림을 즐겨 그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리는 것이 재미있었고 그로 인해 내가 가진 소질을 발견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언제나 난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뻤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6,70년대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빈농이었던 가정에서 살았던 나는 미술학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미술 대학을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에 시작은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생활은 조금 힘들었지만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시화 그림도 그려서 생활비는 어느 정도 마련하였지만, 힘든 가정 때문에 생활하기가 빠듯할 정도로 힘들게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없이 묵묵히 뒷바지해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작업을 했다. 캔버스를 메고 금산사, 내소사를 다니며 열심히 대학생활을 하던 중 대학 4학년 봄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당시 24시간을 넘기기 힘들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렵게 심장수술을 받고 복학하여 동양화로 전공을 바꿔 지금까지 작업을 해오고 있다. 정말 생각해보면 천운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짧은 세월, 이 길을 걸어오면서 좌절하고 포기했다가도 고향의 부모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팔자 아니면 그림 그리는 일이 천직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리고 싶어서 그냥 그렸고 살기 위해서 그렸던 세월이었던 것 같다. 흔히들 배가 고파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지만 정말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산과 들을 헤매며 등산화를 1년에 한컬레씩 달아 버릴 정도로 작업에 몰입해왔다. 지난 삼십여 년의 시간은 나와 나의 고향의 자화상을 그려온 것이라 하겠다.
내가 즐겨 그리는 고향 소재는 주로 반도이면서 평야도 많고 낮은 야산이 많은 곳이다. 고향 부안은 바다와 강과 논이 적당한 비율로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면서 펼쳐져 있어 말 그대로 그 자체가 한 편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깨끗한 바다에서 채취한 부안 김, 서해에서 갓 잡아 올린 주꾸미와 갑오징어, 전어 등 먹거리가 풍부한 맛의 고장이기도 하며, 풍요롭고 행복하며, 이웃끼리 따뜻한 정을 나누는 정겨운 고장으로 예로부터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하였다. 아마도 미술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곳에서 좋은 글과 그림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초기의 그림 소재들은 주로 어릴 적 자란 환경으로 평범한 구도로 일관하다가 우연히 강원도 영월 풍경에 도취되어 동강에 위치한 폐교를 얻어 그림을 그리던 때가 있었다. 고향 부안에서는 볼 수 없는 작품소재들이 많았고 구도를 꾸며 내지 않아도 작품이 되는 풍경들이었다. 담배 건조장이며 S자형 밭고랑, 높은 산과 계곡들이 생소한 풍경이었지만, 나의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곤 했다. 그 후로는 중국의 황산, 무인산, 앙탕산 등을 여행하며 기암괴석과 명산들을 찾아 그렸고, 명승절경과 소나무 숲과 정자 등을 소재로 택하여 종횡무진 동서남북 주류천하면서 산하대지, 산천초목을 다 대상으로 아우르며 그렸다. 이는 사생을 중시하며 사실적 표현을 기조로 하고 있었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서정의 예술 경계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향 풍경도 많이 그렸다. 제일 많이 그렸던 소재는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과 개암사입구에 고목 느티나무와 대웅전을 둘러선 우금바위, 외변산의 채석강, 적벽강도 수차례 그렸고 아름다운 칠산 앞바다 풍경이며, 지금은 시들해진 곰소항을 즐겨 눈에 담아 그렸고 줄포의 계단밭과 솔숲들을 자주 그리곤 했다. 주된 테마는 고향이지만 왠지 고향을 그리다보면 옛 생각을 떠오르게 하고 가슴 뭉클하게 한다. 내가 고향 작품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주제가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서 돌아보는 고향은 실제로 자신이 그곳에 살았었는지조차 의아할 정도로 신비로움과 환상으로 항상 가득 차 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낯설음까지 느껴도 보지만, 미소 속에 담긴 친근함은 구체적 형상으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이미지로서의 고향이다. 즉 환상적 이미지로서 설명되는 옛 고향의 그림자는 동양화의 여백과 친근감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장점을 지닌 것이다. 구체적인 듯하면서도 구체적이지 않고,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 그것이 고향이며, 그 속에서는 상반된 사물이나 사람이 어울린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움으로 한데 묶여 승화되는 것이다. 고향 그림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들의 고향은 어쩌면 우주 전체가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고향 부안은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속같이 늘 우리들을 지켜 주었고, 지금도, 어제도, 그 수많은 과거의 날들에도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 믿고, 살아 숨 쉬는 날까지 열심히 고향을 화폭에 담으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또한 나의 예술 세계가 이 시대 가물거리는 ‘실경산수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참고문헌-평론>
소나무와 정자가 있는 風情
- 사생을 중시하며 서정성이 담긴 사실적 표현이 궁극의 목적 -
朴明仁(미술평론가·소설가)
한국화 또는 동양화에서 크게 대두되어 온 장르는 진경산수와 관념산수이다. 진경산수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하여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경향으로써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경관을 묘사한다. 그러나 관념산수화는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연관을 반영하기 위해 상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다. 특히 실사든 관념이든 먹(흑색)으로 사물을 표현하기 때문에 서양화와는 달리 창조적 예술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재선택과 개성표출이 중요하다.
홍성모의 이번 전람회에 발표되는 작품의 소재는 소나무와 정자이며 필법은 전통을 이어 가는 고법에 있어서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즉, ‘전통에 있어서의 실재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분석하면서 표현영역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립해 나가는 것이었다.
작금에 현대수묵화라고 해서 번지수도 없는 작풍을 유행시켰지만 수묵화라고 할 수도 없다. 먹과 물로 그린다고 해서 수묵화라고 한다면 전통과 고법은 필요조차 없게 된다. 중국화론에는 수묵화를 문인화와 선화(禪畵)로 구분했다. 당나라의 현종제(玄宗帝) 때, 궁정 시인 왕유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묵화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서예가 번성하면서 오도자(吳道子)가 서(書)의 필의(筆意)를 살려 백묘법(白描法)을 창안했고,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라 인격이 지필묵에 의해 미묘하게 이루어지는 정신성의 선이라고 강조했다. 왕유는 여기에서 먹과 물에 의한 선담법(渲淡法)을 생각하여 이른바 수묵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고법을 중시 여기는 홍성모는 스승의 교훈이나 화론의 모든 기능, 그리고 이론을 매우 소중하게 마음에 담고 있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화법을 창출해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이나 역사성이 무시되는 것은 창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없다며, 선인의 작품을 명품수세(名品守歲, 훌륭한 작품이 오래 간다)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국화의 정신을 살려야 세계적 작품이 탄생한다고 강조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만이 존재하는 소재, 기법, 사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심적 현상에 작용하는 지향성(指向性)의 중요한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자신을 파악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회화에 대한 개성정립의 계기확립이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휴학하였다가 다시 복학하면서 한국화로 전과(轉科)한 홍성모는 그런 만큼 어느 한국화가보다 소묘력이 뛰어나다. 특히 채색보다는 먹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개성표출이다. 대학 은사였던 벽천 나상목 선생은 직선을 반복해서 그으며 먹의 농담을 가르쳤다. 이 때의 먹 선은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묵일색 하모니는 음일색 하모니와 같다’라는 말이 있듯이 음역(音域)과 개성이 각기 다른 악기들이 모여 한 음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먹 역시 단순히 흑색이라고 간과하기 쉽지만 무한한 색의 하모니를 나타내고 있다.
서법에서는 중봉을 사용해야만 필선이 산다고 강조한다. 붓을 물에 적시고 절반을 먹을 묻혀 선을 그르면 처음에는 강한 흑선이 나오고 점점 흐려져서 마지막에는 흰 선만 남는다. 중봉만이 가능한 붓과 물의 성질이다. 만일 측필(側筆)을 사용하면 농선(濃線)과 담선(淡線)이 동시에 생긴다. 이것이 먹과 붓의 관계의 기초적 현상이며 붓과 물의 함수관계를 체득하지 못하면 한국화의 개성표출은 불가능해지다. 설령 표현한다고 해도 졸속해진다. 먹의 일획에는 시작하는 선의 농선과 끝나는 지점의 담선, 그리고 마지막 흰선(無色)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자면, 시작에서 끝, 또는 생과 멸의 이치가 담겨 있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생을 중시하며 사실적 표현을 기조로 서정성을 궁극의 목적으로 했습니다.”
홍성모는 이 같이 자기만의 확실한 사상과 목적의식으로 개성표출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서정성이 넘친다. 원근법에 있어서도 주로 먹의 특성을 파악하여 먹의 농담과 선의 굵기와 변화로 표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의 소나무와 정자를 찾아 다니며 이 같은 자연의 이치를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소나무와 정자에서도 선조들의 정서와 낭만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크게 조선소나무와 왜송(倭松)으로 구분하는데 왜송은 곧게 뻗는 단순함이 있지만 대한민국 소나무는 매우 다양하다. 붉은 표피의 적송, 표피가 검은 해안가의 해송, 나뭇잎 끝부분이 금색인 황금송, 줄기가 흰색을 띄는 백송, 뱀 허물과 같다는 사피송, 호랑이 가죽과 같다는 호피송, 키가 작은 반송, 잎이 두툼하고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금송, 제주에서 자생하는 곰솔, 이 밖에도 금강송, 내장송, 공작송, 파마송, 무학송, 등 매우 다양하다. 또한 특이하게도 흙이 없는 바위틈에서 자라면서도 500년 이상 생존하고 있어서 껍질이 용비늘처럼 생긴 용송도 있다.
이 같이 다양한 소나무는 민족성을 강하게 나타내며, 정자는 대부분 경관이 좋은 자리에 세워져 한국정서가 빼어난 특징이 있다. 형상도 사각정자, 육각정자, 팔각정자 등 다양하다. 특히 홍성모 전람회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전라도 지방에는 가운데 방이 있어서 불을 때는 정자가 있고 경상도 지방은 거의 방이 없고 마루로 되어 있으며 소나무가 많은 곳에 묘가 있는 것도 특색이다. 그러니까 정자는 선인들이 풍수지리의 이론을 근거로 명당에 세웠던 것이다.
“영월군 주천면 무릉리 묘선정에 가면 정자가 있는데 그 곳 미륵불 바위틈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자리가 명당인줄 어떻게 알고 소나무가 자리를 잡았는지 놀랬습니다.”
홍성모는 실사를 다니면서 놀라운 현상이 하나 둘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정자가 명소에 세워졌고 다양한 소나무의 형상과 정자가 있는 곳은 어디나 경관이 좋은 곳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소나무와 정자를 소재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단순소재가 아니라 홍성모의 시야에 비친 대한민국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으로 포착된 우리만의 정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마치 관념적으로 의도한 것처럼 아름답다.
고법이나 선인들의 화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홍성모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는 자연을 보라, 자연에 따라 많이 그리면 저절로 자연의 마음이 보이게 되며, 기교도 향상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자연을 실사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금수강산이 바로 세계 속의 한국적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태라고 생각하며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흔히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하지만 말처럼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소나무와 정자가 있는 풍경은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자가 있는 이러한 정서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절경인 것이다. 소재 선택의 중요성을 피력한 이유이다. 소나무 표피를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홍성모는 산세를 묘사할 때와 같이 준법을 활용하여 마디마디 끊어지는 절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 준령과 같은 영기(靈氣)가 있고 힘찬 생동감이 있다.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이어지는 수업에서 갈고 닦은 기능을 바탕으로 고법을 준수하는 가장 철학적인 개념정립, 가장 한국적인 소재선택, 가장 한국적인 풍정, 가장 세심한 소묘력, 이것이 홍성모의 작품세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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