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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47회<정묘호란! 후금, 압록강을 건너다>2014/10/18

파라클레토스 2014. 11. 1. 10:16

정묘호란! 후금, 압록강을 건너다

압록강이 얼어붙자
기다렸단 듯이

후금군의 기병들이 조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묘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파죽지세로 도성을 향해 내려오는
후금군을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한다.
하지만 후금측은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먼저 화친을 제의한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던
정묘호란!
그 50여 일 간의 기록을 추적한다.

 

■ 정묘호란이 발발하다!
1627년 1월 17일. 조선 조정에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와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급보가 도착한다. 이 소식에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모두 당황한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인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정권. 그러나 ‘배금’을 외쳤던 이들은 후금의 갑작스런 도발에 우왕좌왕하는데… 왜 인조정권은 후금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교과서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정묘호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그 날. 정묘호란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되었을까?

 

■ 정묘호란이 발발한 이유는 모문룡 때문이었다?
정묘호란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에 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은 평안도의 작은 섬 가도에 있었던 모문룡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명나라와 조선을 잇는 길목을 차지한 모문룡은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을 다시 되찾겠다고 외치면서 수시로 후금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요동 수복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조선과 명으로부터 지원받으면서도, 자주 평안도에 상륙해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명나라의 장수가 왜 조선 땅에서 갖은 횡포를 일삼은 것일까? 정묘호란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교과서에선 언급조차 하지 않는 모문룡의 실체를 파헤쳐본다.

 

■ 270여 년간 중원을 지배한 만주족, 그들은 누구인가?
일찍이 북방에서는 “여진족(만주족)이 1만 명이 모이면 대적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족! 한족이 세운 명을 섬기면서 만주족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조선. 결국 이것은 정묘호란이란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만주족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중원 장악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 조선,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화의를 요구하는 후금. 한양으로 곧장 진격할 수 있었던 후금군은 왜 진격 속도를 늦추고 거듭 화의를 요구해왔을까? 그들이 내세운 화의의 조건은 명과의 국교 단절, 그리고 후금을 형의 나라로 모시라는 것이었다. 명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는 조선의 반응은 어땠을까? 쉽게 타협할 수 없는 화친의 조건을 놓고 고민에 빠진 조선의 선택은? 조선과 후금, 두 나라 간 화의의 과정을 ‘조선왕조실톡’으로 만나본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 또 한 번 외침을 당한 조선. 교과서에서 다하지 못한 정묘호란에 대한 이야기를 10월 18일 토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파헤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