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백합 맛을 자랑하는 부안에 다녀왔습니다. “뻐글뻐글헌 것이 징그랗게도 많네 그려. 참말로 오져 죽겄네.” 뻘을 긁을 때마다 굴러 들어오는 조개를 보며 아낙들이 좋아라 하던 소리였다 합니다. 한때 아낙들의 웃음을 터뜨리게 했던 조개는 점점 줄어들고 이제 뻘도 그 활기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가운데로 쑥 들어간다. 서쪽과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다.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마루,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나서 햇빛을 가리고 있다. 골짜기 바깥은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이지만, 산중에는 좋고 기름진 밭들이 많다. 주민들이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된다. - 이중환 <택리지> -
골짜기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 산중에는 기름진 밭.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곳이 부안이었습니다. 여기서 과거시제인 ‘었’이 쓰인 까닭은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부안을 만나기 어려워진 까닭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도 부안 곰소 염전의 소금은 최고의 맛이고, 밭은 기름지고, 부안 바닷가에서는 철마다 싱싱한 것들이 어부들의 시름을 덜어줍니다. 하지만 갯벌의 조개들만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 부안의 변산면 대항리에서 고군산, 신시도에서 군산 비응도를 잇는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부안의 갯벌, 그중에서도 백합이 가장 맛있다는 계화도 갯벌은 막혀가고 있습니다.
백합, 아시나요? 전복 다음으로 귀히 치는 이 백합은 하구역의 고운 모래 갯벌에서 잘 자라는 조개입니다. 그러니까 만경, 동진강 하구인 김제의 심포와 계화도 갯벌은 지형상 백합에게 최고로 좋은 땅이지요. 이곳에서 전국 백합 생산량의 80%가 나오니까요.
백합은 봅고(밟고) 댕기면서 먹는 것이여
"부안은 보릿고개 시절에도 할머니가 호미와 대바구니를 챙겨 들고 갯가로 나가시면 조개, 굴, 고둥 등으로 바구니가 가득 채워지던 바닷가 마을이죠. 조미료가 없던 시절 갖가지 어패류를 넣고 요리를 하니 맛이 안 날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씩 어김없이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가에 나가 조개를 줍고 대나무로 살을 엮어 밀려드는 고기 떼를 잡고, 질펀한 갯땅 한 자락을 막아 소금을 굽는 제 고향입니다.”
부안에서 나고 자란 사진작가 허철희 씨에게 고향의 기억은 너무나 풍요롭습니다. 보릿고개를 지난 세대이지만 고향의 갯벌은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갯벌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있습니다.
눈알고둥, 비단고둥, 갯우렁이, 키조개, 피조개, 복털조개, 가리비, 개량조개, 동죽, 퇴조개, 맛조개, 대맛조개, 가리맛조개, 돼지가리맛, 개조개, 바지락 등등 그가 찾아내고 찍은 갯벌의 생명체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런 갯벌의 생물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바로 백합입니다. 부안 사람들은 전복 다음으로 백합을 꼽습니다.
“‘백합은 봅고(밟고) 댕기면서 먹는 것이여…’라는 부안 사람들 말이 있습니다. 백합은 입을 꽉 다문 채 겨울철에는 보름이 지나도 죽지 않고 사는데, 이렇게 오래 산다고 해서 생합이라고도 부릅니다. 백합이 입을 벌리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죠.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 백합이 입을 벌리지 못하게 문지방에 놔두고 들며나며 밟아서 백합을 자극했죠. 자극을 줄 때마다 더욱 움츠리기 때문에 백합의 수명은 길어지는 거죠.”
백합을 잡기 위해서는 ‘그레’라는 사다리 모양의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레의 밑바닥엔 폭 50cm가량의 쇳날이 달려 있어 어민들은 갯벌에 금을 긋듯 그레를 끌면 뻘 깊숙이 박혀 있던 백합이 그레와 마주치면 딸깍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에 어민들은 절로 신이 났겠지요.
허철희 씨는 변산반도와 새만금 갯벌의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던 때부터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과 어민들, 그리고 부안의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방조제 길이가 길어질수록 물길이 바뀌어 갯벌 생태계는 심한 교란 상태에 있습니다. 20m였던 수심이 12m가 되고, 어제 없던 모래언덕이 오늘 생기고. 이렇게 바다 환경이 변하다 보니 어장 나가봐야 허탕이라 합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산 사람이 바다를 포기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새만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안 IC를 나가자마자 달려간 계화도의 갯벌은 퍽이나 쓸쓸해 보였습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김소월의 시처럼, ‘백합’은 이제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안 어디를 가나 즐비한 백합 집들도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백합이 나니 장사를 합니다만, 그도 많이 모자라 중국산이나 북한산 어린 백합을 들여와 부안 갯벌에서 양식을 하기도 해요.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부안 사람들은 알지요. 부안의 백합은 결이 진하고 매끄럽지만, 양식한 중국산은 결이 선명하지 않고 껍데기가 약간 거칠어요.”
백합죽을 처음 메뉴로 내놓았다는 계화회관(063-584-3075)의 이화자 사장은 80년도에 죽집을 열었습니다. 탕으로 끓여 먹거나 구워 먹던 백합으로 죽을 쑤니 부안을 찾는 외지 사람들 입맛에 딱 맞아 떨어져서 지금은 부안 어디를 가나 백합죽집을 볼 수 있습니다.
백합죽은 쌀을 씻어 생수와 백합국물을 섞어 끓이다가 백합을 다져 참기름에 한 번 볶아 죽에다 넣고 다시 한 번 끓여 그릇에 담아 참깨, 김가루를 얹어 상에 올립니다.
계화회관에서는 요즘 이화자 사장의 딸이 내놓은 백합찜으로 특허를 냈습니다. 아구찜처럼 콩나물과 야채를 듬뿍 넣고 백합찜을 만드는 것이죠. 숙성시켜놓은 양념장으로 만들어 탕이나 죽, 회 등 깨끗한 맛보다 매콤한 음식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깨끗한 백합탕을 한입 뜨고, 백합죽을 먹습니다. 백합탕의 맑은 국물 맛이며, 속살이 하얗고 졸깃한 백합, 내년에도 이 계화도 백합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모항 가는 길
백합죽 한 그릇 먹고 모항으로 갑니다. 물때를 기다렸다 갔는데, 날이 추워 백합을 캘 수 없다고 하여 갯일 하는 것도 못 봤습니다. 부안 가면 꼭 보라는 일몰은 봐야지, 하고 서둘러봅니다. 그런데 웬걸요, 바람의 도시, 부안이라는 팻말처럼 바람 불고, 잔뜩 구름 낀 하늘은 일몰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몹시 안타까웠지만, 모항으로 가는 작은 어촌 마을을 낀 길이 대신 위로해주었습니다. 모항에 서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 씨를 만났습니다.
시인을 만나기 위해 술 한잔쯤은 각오했습니다. 시인 입에서 시 한 수 들으려면 음주는 기본이지요. 그래도 술 석 잔이면 혼미해지는 까닭에 기자는 조심스레 몸을 사려봅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첫인사를 나눕니다.
“매실주나 백세주로 할까요?”
“아니, 술은 그냥 소주가 좋지 않아요?”
“아, 그렇죠. 깨끗하게….”
“낮에는 막걸리를 많이 마시는데, 저녁에는 소주가 좋아요.”
얼굴에 온통 선한 웃음을 머금은 시인은 부안 모항에서 나고 자라,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술이 술술 들어가는 시인의 입을 보니, 경이로울 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술술 나옵니다.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농부입니다. 농부인 그에게 땅은 팔거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족과의 오랜 유대의 상징입니다. 그가 새벽마다 밟고, 매일 들여다보고, 그의 손길을 받고 자란 농산물은 그냥 팔려나가는 물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농부의 마음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이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남기고 버리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술도 다 마시고, 밥도 다 먹었습니다. 부안이 어떤 곳인가 이야기를 들으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백합이 계화도의 뻘 속에서 나고 자라 그 맛이 나듯이, 부안에서 나서 오십 해 가까이 살아가고 있는 박형진 농부의 얼굴이 부안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기농 농사짓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데도 눈에 주름진 웃음을 펴지 않고, 술 한잔에 시를 읊어주는 모습을 보니, 부안의 넉넉한 품이 이런 농사짓는 시인을 키우나 보다 했습니다. 모항 바닷가에서 노래처럼 읊어지는 시를 들으니, 시 맛이 제대로 납니다. 시에 취해 잠을 잡니다. 시인이 권해준 모항 바다와 마을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모항 비치텔(063-583-5545)에서 바닷소리를 끌어안고 잠을 잡니다.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과 곰소의 젓갈
백합 맛에 시 맛까지 보고 다음날은 곰소의 젓갈 맛을 보러 떠났습니다. 곰소 젓갈 맛보기 전에 잠깐 내소사에 들렀는데, 내소사는 잠깐만 들를 곳은 아닙니다. 다들 입장료 내고 내소사 전나무 숲 한번 걷고, 대웅보전 찍고, 돌아들 나옵니다만, 찬찬히 오랜 시간 머물다 와도 좋을 듯한 곳입니다. 키 큰 전나무 숲도 천천히 걸어야 하고, 천왕문 앞 꽃길에서 산의 품에 안긴 내소사도 오래오래 보아야 하고, 내소사 안에서 천 년이나 산 나무도 차근차근 봐주는 예의도 있어야 합니다. 쇠못 하나 대지 않고 나무토막만으로 끼워 맞춘 소박한 대웅전은 나무의 빛깔이 참 깊습니다.
내소사 나오는 길에 전어구이집들이 즐비한데, 조금만 더 가면 곰소 젓갈집들이 나오니 허기진 배를 참고 달립니다. 눈 쌓인 곰소 염전과 허물어질 듯한 소금창고가 보이면서 젓갈집 간판이 줄줄이 섰습니다.
곰소의 젓갈을 으뜸으로 치는 건, 아무래도 소금 맛입니다. 곰소의 소금은 간수가 빠져 쓴맛이 없고, 끝맛이 답니다. 전라도 음식은 곰소항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 젓갈은 질이 좋아 가을 김장철이면 새우젓에서부터 각종 액젓류, 멸치젓, 밴댕이젓, 갈치젓 등을 사러 오는 방문객이 줄을 잇습니다.
젓갈정식을 처음 생각해낸 곰소쉼터(063-584-8007 )의 사장이 창란젓, 어리굴젓·황석어젓·낙지젓·갈치속젓·바지락젓 등 젓갈을 골고루 차려 냅니다.
“곰소 소금만 먹으니까 우린 잘 몰랐는데, 다른 데 소금으로 음식을 해보면 대번에 알아요. 음식이 그 맛이 안 나거든요. 곰소 소금은 창고에 오래 묵혀놓으니 간수가 빠져서 쓴맛이 없어요. 물고기들도 그렇고, 소금도 그렇고, 이래저래 바다 덕 보고 살아요.”
천일염 만드는 과정을 보면 곰소 소금 비싸다는 말 못 합니다. 맛있는 것은 찾으면서 좋은 재료의 값어치를 몰라주면, 염전에서 고된 노동에 땀 흘리는 분들에게 너무 미안치요.
가장 아름다운 길, 변산반도 30번 국도
갯벌이며, 나폴리 부럽지 않다는 모항의 일몰,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곰소 등 부안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해안도로로 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변산반도 30번 국도는 소설가 윤대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극찬한 길입니다.
한 바퀴 일주하는 해안도로가 90km 정도 이어지는데, 부안읍을 지나면 맨 먼저 새만금 방조제가 나타나고, 도로를 따라 더 가면 변산온천, 변산비키니해수욕장, 층층절벽의 채석강이 나옵니다.
일몰이 아름다운 솔섬과 모항을 지나, 곰소 염전이 나타나고요. 그 전에 내소사를 들러도 되고, 서해안 고속도로 줄포 IC로 나와 곰소염전 쪽에서부터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놓쳤다면 복수초 필 때, 떠나도 좋습니다.
출처 : http://www.menupan.com/Community/Travel/TravelView.asp?ID=50
'▒ 변산반도◈ > ◐변산반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만금 CI, 아리울로' (0) | 2010.07.27 |
---|---|
새만금-아리울 (0) | 2010.07.27 |
tv팟 고군산섬 둘레길과 새만금 (0) | 2009.11.08 |
부안지도 (0) | 2009.05.17 |
[스크랩] `부안 변산반도 해안코스여행` (0) | 2009.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