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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여행] (3) 캄보디아 - 가난을 보셨나요? '공존의 삶'이 있어 미소가 가득합니다

파라클레토스 2016. 5. 13. 05:59



[경향신문] 캄보디아 밀림 속 앙코르와트는 언제 ‘발견’됐을까.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가 여행기를 남겨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무오는 “솔로몬의 신전에 버금가고, 미켈란젤로가 세웠을 법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비견될 만한 곳….

이 나라가 처해 있는 야만적인 상태와 슬픈 대조를 이룬다”고 했다.

그는 이전의 서양인 여행자들처럼 크메르인이 앙코르와트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로마와 같은 고대문명이 세운 것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그들의 시야에 정글의 나무와 폐허는 들어왔지만, 원주민들은 ‘배제’되었다.


현대의 여행자들은 어떨까.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호텔 리셉셔니스트와 툭툭 기사, 가게 점원, 가이드가 사실상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의 전부다.

그리고 좋은 곳만 보고 떠나간다. 현지 사람들은 여전히 시야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반면 ‘착한 여행’은 느끼고 체험하는 여행이다.

여행지의 사람들과 부대끼고 그들의 삶을 깊이 살펴보는 ‘다른’ 여정을 캄보디아에서 경험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의 해질녘 풍경. 제주도 두 배 크기인 톤레삽 호수는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 건기에는 물이 줄어 사람이 걸어서 오갈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의 해질녘 풍경. 제주도 두 배 크기인 톤레삽 호수는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 건기에는 물이 줄어 사람이 걸어서 오갈 수 있다.

■ 꼭스럭의 ‘천성급’ 홈스테이

밤 11시(현지시간) 캄보디아 시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원 달러 빌, 원 달러 빌.” 공항 직원이 비자는 내주지 않고 웅얼댔다. “소리(sorry)?” 여행자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직원은 “일 달러, 일 달러”라고 한국말로 짜증을 냈다. 시엠립 공항은 한국인 여행자에게만 1달러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이런 관행은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빠른 입국 수속을 위해 뒷돈을 주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인 바트 옛(28)이 “아이고~ 미안합니다”라며 연신 사과했다. 캄보디아는 아직 한국의 1970년대 수준이라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장(腸)마사지’라고 부르는 열악한 도로망이며, ‘호랑이 연고’로 상징되는 낙후된 의료 등 캄보디아의 빈곤을 설명할 거리는 많다. 건조한 관공서 언어에도 가난은 묻어 있다. ‘어린이들에게 사탕이나 돈을 주지 마시오.’ 아이들이 구걸에 나서면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시엠립 인근 꼭스럭 학교에서 여행자들이 어린이들에게 학용품과 과자를 나눠주고 있다.
캄보디아 시엠립 인근 꼭스럭 학교에서 여행자들이 어린이들에게 학용품과 과자를 나눠주고 있다.

착한 여행의 첫 일정은 ‘꼭스럭 학교’ 방문이었다. 시엠립 시내에서 30여분 거리인 작은 언덕(꼭스럭) 마을. 오후 5시 하교를 앞둔 오후반 아이들이 학교 정문에서 여행자들을 맞았다. 카메라를 보고 손으로 V 자를 그리며 웃는 모습은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 선물로는 과자와 학용품 그리고 ‘칫솔’을 준비했다.


1970년대 크메르루주 정권의 대량학살과 이어진 내전으로 캄보디아는 ‘죽음의 땅(킬링필드)’이 됐다. ‘안경을 썼다’(지식인)거나 ‘배가 나왔다’(부자)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시대였다. 그렇게 총인구의 5분의 1이 사라졌다. 야만은 단절을 낳았다. 후대에 지식을 전수할 계층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도 의사나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위생교육이 되지 않아 칫솔 등 위생용품이 필요하다.


다들 눈은 포도알처럼 큰데 체구는 작다. “쑤어 쓰데이!(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줄지어 서더니 인사를 했다. 준비한 물품을 나눠주자 표정은 밝은데 조용하다. 선생님이 흩어져도 좋다고 하자 그때서야 아이들은 “꺄아아악” 환호성을 질렀다. 수줍음이 많아서 좋다는 표현을 못했던 것이다. 이내 친해져 아이들은 “어쿤 쯔란쯔란(감사합니다)”이라고 인사했다. 이전에도 한국인 봉사자들이 왔던 곳으로 외국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학교를 찾아오고, 도움을 ‘받는 일’이 불편하지 않을까. 교장 예 럼(49)은 “부담이나 불편을 느끼기보다는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 럼은 1988년 이 학교에 일반 교사로 부임했다. 초토화된 학교에는 움막 2동만 있었다. 비정부기구(NGO)의 도움으로 20여년 만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학교는 놀이터를 갖추고 있고, 마을 축제를 열기도 한다. 쓸모없어 보여도 학교 시설이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에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 달 수입이 100달러 남짓인 캄보디아 가정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은 당장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되는 무용한 일이다. 이 때문에 총 290여명이 다니는 학교에서 한 반 30~40명 중 4~5명은 늘 결석을 한다. 예 럼은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하는 모습을 부모들이 보고 마음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12세기 말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타프롬 사원.
12세기 말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타프롬 사원.

열대지역에서 쓸데없는 움직임은 낭비다. 해질녘 꼭스럭 마을은 밥 짓는 연기와 퇴근길 오토바이가 피우는 먼지가 거리를 채웠다. 조용한 집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은 해먹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하는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주민들과 함께했다. 꼬치구이, 계란부침, 파파야를 넣은 닭고깃국, 쌀밥 그리고 앙코르비어가 차려졌다. 보통 반찬 하나 놓고 밥을 먹는 캄보디아에서는 생각지 못한 성대한 만찬이었다. “쪼르께오!”라는 건배 제의에 “건배~”라는 화답이 이어졌다.

오후 8시가 되자 TV 불빛만 보일 뿐 마을은 어둠에 잠겼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2층집 나무 바닥에 모기장을 치고 가만히 누웠다. 너무 더워 물을 끼얹고 누웠는데 금세 땀에 젖었다. 창밖에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뒤척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홈스테이를 함께한 여행자들이 웃으며 말했다. “호텔이 사성, 오성급이면 꼭스럭은 천성급이다.”


■ “열심히 살지 말고 잘사세요”


‘앙코르와트’를 단일 유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시엠립에 ‘앙코르 유적’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12세기 무렵 동남아시아를 석권한 전성기의 앙코르 제국은 사원 1200여개를 세웠다. 하지만 13세기부터 쇠락하기 시작한 제국은 15세기쯤 완전히 멸망해 화려했던 도시와 함께 정글 속에 묻혔다. 남은 유적 중에선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타프롬’ ‘반티에이스레이’가 유명하다.

왕의 도시인 앙코르톰에 있는 바이욘 사원. 54개의 탑에 200여개의 부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크메르의 미소’로 유명하다.
왕의 도시인 앙코르톰에 있는 바이욘 사원. 54개의 탑에 200여개의 부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크메르의 미소’로 유명하다.

타프롬은 앤젤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툼레이더>에 신비한 모습으로 등장해 유명해졌다. 흐르는 액체처럼 건물 사이에 뿌리를 박은 벵골보리수 등 거대한 나무들이 무너져가는 사원을 붙잡고 있는 광경은 관광객들을 압도한다. 타프롬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자연이 어떻게 ‘공존’할지 많을 걸 생각하게 했다.


사원을 복원하려면 나무는 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직 공무원으로 30여년 동안 복원에 참여한 인 팔리(58)는 “나무도 이미 사원의 일부”라면서 “발견 당시 모습을 역사로 남기기 위해 두기도 하고, 때로는 뽑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때 그때 논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 이를 위해 인도,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사원은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지만 세계유산이기 때문에 모두의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복원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빈국 원조에 나서야 하는 이유와도 맞닿는, 설득력 있는 대답이었다.


물 위에 비친 앙코르와트의 아름다운 모습도, 분위기 있는 펍과 클럽이 늘어서 있는 여행자거리의 밤도 캄보디아 여행의 좋은 추억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본 캄보디아는 여러 가지 의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고된 삶을 미화하는 것은 19세기 탐험가들과 같은 또 다른 ‘대상화’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캄보디아인들은 웃음이 넘쳤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여행 내내 캄보디아의 정치부터 경제까지 속이야기를 시원스레 들려준 바트 옛은 10년 뒤엔 부자가 돼 ‘공짜’로 안내해주겠다며 그때까지 건강하시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뜨끔한 한마디를 남겼다. “열심히 살지 말고 잘사세요!”

<시엠립 | 글·사진 배문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