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來蘇寺
내소사(來蘇寺)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이었다. 즉, 다시 태어나 찾아온다..는 뜻이다. 633년 백제 무왕 때에 혜구(惠丘)가 창건한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기까지도 蘇來寺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仁祖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할 때 쯤에 來蘇寺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내소사
속설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고 이에 따라 당나라는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였다. 그 때 소정방이 蘇來寺를 찾아와 군중재(軍中財)를 시주를 하면서 .. "소정방이 왔다"는 의미로 내소사(來蘇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근거는 없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서도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설은 근처에 있는 개암사의 울금바위를 우금암(遇金岩)이라고 해서 소정방과 김유신이 만났다는 얘기가 전해 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아픔의 이야기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옳건 그르건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여들여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 660년이다. 이후 백제사람들이 멸망한 조국을 되찾으려고 도처에서 부흥군을 일으켜 4년 동안 싸웠는데, 부흥군의 마지막 전투지가 부안의 상서면 개암동 뒤의 고성인 위금산성일 것으로 주장하는 일부 학설이있다. 위금산성이 곧 주유성이라는 것이다.
이 학설과 관련하여 변산에 운집하여 있던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唐나라 장수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줄포만의 돌개(지금의 석포)에 상륙하여 내소사에 들려는데, 이때 소정방이 많은 재물을 시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그의 내방을 기념하기 위하여 (蘇將軍이 왔었다)는 뜻으로 소래사(蘇來寺)라 하였다는 전설이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소정방은 개전 초에 잠시 체류하였을 뿐, 백제의 부흥군 토벌 무렵에 소정방은 당나라에 있었다.
그러면 來蘇寺 또는 蘇來寺의 뜻은 ?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내자개소(來者皆蘇)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즉, 부처님의 도량인 이 절에 오는 모든 사람은 소생하리라... 이는 불교의 모든 생명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중심이 사집(邪執), 유견, 번뇌(煩惱), 업(業) 등으로 인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죽어서 자시나고 또 다시 죽으며 생사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내소사는 석축(石築)에 의해 상, 중, 하의 3단으로 나뉘어진다. 하단은 천왕문과 봉래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종각을 배치하였다. 중단은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설선당과 무설당을 두어 수도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상단은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관심당이 있어 예불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비스듬히 세워진 一柱門
일주문의 角度가 비틀어져 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고 있지만 공간의 내부를 신비롭게 또는 호기심이 나게 유도하는 건축적 사고의 한 반영일 것이다.
전나무 숲길
一柱門을 들어서는 순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전나무 숲길이 반듯하게 뻗어 앞서가는 사람이 꼬마의 키가 된다. 늘씬하게 뻗어오른 전나무 옆으로는 여러 잡목들이 뒤엉키어 숲길은 더욱 호젓하고 한걸음 내딛고는 심호흡 한번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 보고...
그러나 이 전나무숲이 오랜 연륜을 지닌 것은 아니다. 숲길이 장대해서 그렇게 여길 수 있지만, 이 전나무 숲길은 불과 50여년 전, 해방 직후에 造林된 것이라고 한다. 50년만 내다 보아도 이런 장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회림삼경 檜林三景
이곳 내소사 초입 바닷가의 얕은 산세에서 보기 어려운 바위봉우리 우뚝한 산세가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능가산 내소사라 쓰여있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눈 앞에 펼쳐지는 전나무 숲길이 장관이다. 이 내소사 입구 전마루 숲길은 솔바람 소리에 전나무 사이로 내리는 비(松風檜雨), 사월의 신록(四月新綠) 그리고 겨울의 눈꽃(冬期白花)으로 표현되는 전나무 숲 삼경(檜林三景)으로 변산팔경 중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다운 숲길이다.
전나무 숲의 한낮 풍요로운 태양과 새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는 절을 찾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비포장 흙길의 부드러움과 전나무 숲의 울창함에 마음을 빼앗긴 채 가다가 마지막 숲길을 벗어나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사찰 경내의 장엄함에 발걸을을 멈추게 된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능가산의 산세가 기상이 넘치고 있다.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능가산의 아리따운 바위들이 고개를 내밀고, 길은 다시 벚나무 가로수를 양 옆에 끼고 天王門까지 우리를 그 쪽으로 인도한다. 내소사는 근래에 손을 많이 본 절집이다. 그러나 손을 대면서도 어느 절처럼 화려함이나 요사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내소사의 원형을 다치지 않게끔 단정한 가운데 소탈한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다.그 것 또한 끝끝내 지켜오는 소중한 아름다움의 실천인 것이다.
내소사는 한 번에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씩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절이다. 위용을 자랑할만한 산세도 아니고 적당한 높이로 둘러친 능가산은 그저 듬직하다. 뽐내지도 기죽지도 않은 능가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뒤로 둘러싼 경내로 들어서면 절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지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다가가고 있다.
범부 해안지비 凡夫 海眼之碑
내소사 입구에 해안지비(海眼之碑)가 서있다.스님의 열반을 예감한 상좌들이 "열반송을 일러 주십시오"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해안스님은 "그런 것은 군더더기 같은 소리"라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한 말씀 일러주셔야지요"라는 간청에 스님은 드디어 마지막 말씀을 들려주었다.
생사불도처 生死不到處 생사가 이르지 못 하는 곳에
별유일세계 別有一世界 하나의 세계가 따로 있다네
구의방낙진 垢衣方落盡 때 묻은 옷을 벗어 버리니
정시월명시 正是月明時 비로소 밝은 달, 훤할 때이로다
生 死 於 是 是 無 生 死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
천왕문 天王門
사찰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一柱門) 다음의 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깨달음을 갈구하며 길을 가는 求道者에게 다다라야 할 부처의 세계는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가야 할 길만이 앞에 놓인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쉽게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보이는 것이 천왕문이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四天王)은 이곳에서 구도자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그 길을 지키면서 힘겨워하는 중생들에게 다시 한번 정진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번뇌를 떨쳐내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다.그들은 또한 청정도량인 사찰을 雜스러운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신성한 佛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神이라는 뜻이며, 東. 西. 南. 北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4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지국천왕 持國天王
東쪽을 지키며 손에 칼을 들고있고, 인간의 감정 중에서 기쁨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봄을 관장한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을 맡는다는 음악의 神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神을 지배한다. 동쪽을 상징하는 靑色을 띄고있고, 역할은 善한 이에게는 福을, 惡한 이에게는 罰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증장천왕 增長天王
南쪽을 지킨다. 손에는 용과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을 관장하고 계절 중에서는 여름을 관장한다. 구반다(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이며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의 신을 지배한다. 남쪽을 상징하는 赤色을 띄고 있으며, 역할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풀어 준다.
광목천왕 廣目天王
西쪽을 지킨다. 손에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노여움의 감정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가을을 관장한다. 용과 비사사(혈육귀)의 신을 지배한다. 얼굴색은 白色을 띄고 있고, 역할은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求道心을 일으키게 한다.
다문천왕 多聞天王
北쪽을 지킨다.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겨울을 관장한다. 야차와 나찰의 세계를 지배하며 얼굴색은 흙색을 띄고 있고, 역할은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금강역사가 守護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천왕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만물을 소생시키며 福樂을 나누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방위에 따라 靑.白.赤.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사천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33개의 하늘 중 여섯번째 하늘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이다.
이 곳 내소사는 근래에 손을 많이 본 절집이다. 그러나 손을 대면서도 어느 절처럼 화려함이나 요사스러움을 드러 내지는 않고, 내소사의 원형을 다치지 않게끔 단정한 가운데 소탈한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끝끝내 지켜오고 있는 소중한 아름다움의 실천인 것이다. 일부문과 천왕문을 지나 내소사의 앞마당에 이르면 낮아서 편안한 석축이 2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위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내소사의 속살을 보여줄 듯 말듯 조금씩 보여주면서 우리를 내소사로 이끌고 있다.
보종각 寶鐘閣
고려동종 高麗銅鐘 ... 보물 제 277호
이 鐘은 고려 고종(高宗) 9년(1222)에 청림사(靑林寺)의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1850년 (조선 철종 원년)에 이 곳 來蘇寺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鐘이다. 높이 103cm, 입지름 67cm의 크기이다.
사실적인 종뉴(鐘紐) 아래의 종신(鐘身)에는 이중여의두문(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像花紋帶)와 화려한 모란당초문(牡丹 唐草紋 .. 덩굴무늬)의 상,하대(上,下帶)가 있다. 당초문의 乳廓아래에는 4개의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을 갖춘 모습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양각된 삼존상(三尊像)이 있는데, 두 뺨이 볼록한 선정인(禪定印)의 본존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있고, 좌우협시상(左右脇侍像)은 입상으로 되어 있다.
이 동종은 1958년 청림리에 사는 최씨 문중에서 제각을 세우려고 땅을파다가 이 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종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하였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니 아름다운 종소리가 나서 내소사로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 위에는 운미(雲尾)가 길게 솟아있고, 그 위에는 장식을 흩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서 한층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내소사의 동종은 종신형(鐘身形)은 신라시대의 종형(鐘形)을 따르나, 고려 후기의 종의 특징인 立像 花紋帶를 갖추고 있으며, 표면의 묘사 수법은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고려 후기의 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봉래루 蓬萊樓
대웅보전의 바로 앞에서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는 봉래루는 1414년(조선 태종1`2)에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의 맞배건물로 1987년에 복원되었다. 속설에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없다고 한다.
봉래루는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여 원주(圓柱)를 세우고, 그 위에 널마루를 깔아 누각을 올린 모습으로 1층의 막돌초석에서 생긴 변형된 높낮이를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로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한 특이한 모습이다. 봉래루는 본래 1823년에 만세루(萬歲樓)라는 이름으로 중건된 것을 이후 봉래루라는 별칭으로 부르다가 1926년 봉래루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는 " ....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곳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萬歲樓)라고 하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來蘇寺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蓬萊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 "라고 하여 봉래루와 간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원래 봉래루는 불교의 탄압기인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말(馬)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진입하여 예불을 올렸는데,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보다 50cm정도 낮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즉 운주의 화암사와 같이 봉래루의 마루면이 대웅보전 앞마당의 바닥면과 거의 일치하였을 정도로, 누각을 통과할 때에 어른의 키가 닿을 정도의 높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년 전에 1층의 기둥을 높이는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법화경절본사본 法華經折本寫本 ... 보물 제278호
법화경(法華經)의 원래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으로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이다.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법화경의 내용을 흰 종이에 먹으로 옮겨 쓴 것으로, 모두 7권으로 되어있다. 각 권은 마치 병품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고, 접었을 때의 크기는 가로 14cm, 세로 36cm이다. 7권의 끝에 있는 기록을 보면...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이씨부인이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지에는 책의 명칭을 중심으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책의 첫 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金色으로 그려져 있다. 완전하고 깨끗하게 보존된 보기 드문 작품으로, 고려후기에 만들어진 다른 것에 비하여 글씨 솜씨는 떨어지지만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현제 전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광사 李匡師
내소사 대웅보전의 현판(위 사진)은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 이름 높은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이다. 그는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이다.
이광사의 초상화 ..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렸다.
이광사의 호는 원교(圓嶠)이다. 소론이 영조시절 세력을 잃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1755년에는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학문이 이름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다시 완도군 신지도(新智島)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뛰어나서 조선 4대명필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원교체(圓嶠體)라는 그만의 독특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 보물 제 291호
내소사의 대웅전은 1633년 (인조 11)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거의 다듬지 않은 덤벙 주초를 놓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다포계 건물로 외삼출목과 내5출목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단청이 퇴색하여 오래된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나 있어서 그 화려함이 부담스럽지 않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가둥은 민흘림을 두었다.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건물이 아주 안정감있어 보이게 한다.
전면 기둥 사이 문들은 꽃창살로 장식되어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꽃비가 내렸다는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연화와 국화꽃을 하나하나 조각하였다. 그 꽃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이 꽃읋 ㅏ나하나 조각해 나갔을 조각가의 섬세한 손길이 절로 느껴진다.우리가 내소사를 찾는 이유이고,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대웅보전의 내부는 이곳이 불국토(佛國土)구나 느낄 만큼 장식적이다. 대들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호법용(護法龍)들, 천장에 날아 다니는 극락조, 불국토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의 연꽃들 그리고 천장과 대들보 사이에 그려진 10여종의 樂器 공후, 생황, 바라, 소, 박 등이 모든 것들을 불국토(佛國土)에서 부처의 설법에 환희하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천장에 기어 다니는 게 몇 마리를 둠으로써 내소사가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몇가지 함축적인 상징물로 대웅보전을 불국토로 만들어버리니 우리는 이래서 그매력에 듬뿍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대웅보전 천정에 그려져 있는 악기(樂器)들... 유일한 사례
대웅보전 오른쪽 천정... 장구, 북, 해금, 비파 등의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부처를 찬양하며 불음(佛音)을 전하는 의미이다.
대웅보전의 왼쪽 천정에 쟁, 비파, 나팔 등의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부처를 찬양하고 佛音을 전하기 위한 의미이다.
장구
허리가 가늘어 세요고(細腰鼓) 또는 장고라고 한다.두 개의 오동나무 통을 가는 조롱목으로 연결시키고, 통의 양편은 가죽으로 메운다. 그리고 왼편 가죽은 두꺼워서 낮은 소리가 나고 오른편 가죽은 얇아서 높은 소리가 난다.
북
대표적인 타악기로 통의 마구리에 소가죽을 팽팽하게 씌워 두드리면 울리는 악기.
해금
속칭 깽깽이,깡깡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당,송이후 속악(俗樂)에 쓰이던 것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향악에 사용되었다. 해금에는 일정한 음자리가 없이 다만 줄을 잡는 손의 위치와 줄을 당기는 강약에 따라 음높이가 정해진다.
당비파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에서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당악에만 쓰였으나, 조선시대에는 향악곡에도 쓰이게 되었다. 주법은 전해지지 않고 악기만이 전한다.
박판(拍板)
신라말부터 박판(拍板)이라는 이름으로 춤과 노래의 반주에 사용되었으며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당악,향악,아악에 모두 사용되었다.음악의 시작과 끝,음절,완급을 지시한다.치는 법은 두손을 모아 잡고 아래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벌렸다가 왼손은 움직이지 않고 오른손으로 벌려 급히 접으며 소리를 낸다.
쟁과 적
쟁은 본래 중국의 속악에 쓰이던 13현의 악기이다. 1114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안직승이 악보와 함께 들여왔다. 적(笛)역시 중국의 고대악기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문묘제례악에 사용되었던 길이 약50cm의 피리이다.
생황
이 악기에 김을 불어넣는 통은 나무통이며, 이 통의 왼쪽 둘레에 돌아가며 구멍을 뚫고 거기에 죽관(竹管)을 돌려 꽂았다.소리는 죽관 아래 끝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쇠청(金葉)을 붙여 숨을 내쉬고 들여 마실 때 일어나는 기류를 진동시켜 낸다.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향비파
악기의 뒷면을 그린 듯 한데 향비파인지는 분명치 않다. 향비파는 거문고,가야금과 함께 신라의 삼현에 드는 악기이다. 원래 서역의 악기가 고구려를 통하여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당비파와 구별하기 위하여 향비파로 이름을 붙였다.
태평소와 나발
태평소는 호적,쇄납,날라리 등으로도 불렸던 악기. 나무로 만든 긴 관에 혀를 꽂아서 부는 세로악기로 화려하고 강렬한 음색을 지녔다. 나발은 금속으로 만든 관악기이다. 길이 115cm정도 되는 관의 모양은 취구(吹口)쪽이 가늘고, 끝부분으로 가면서 점점 굵어지면서 맨끝은 넓게 퍼져있다.
동발 (자바라)
구리나 쇠로 만들며 서양의 심벌즈와 같은 악기. 승무나 농악에 사용된 악기로 불교행사에는 특히 큰 것을 사용하였다.
그외 천정 장식물, 그림들
대웅보전 천정에 용(龍)이 물고기를 물고 있다.
이는 용이 물고기를 큰 바다로 건너 보내려는 의미라고..
극락(極樂)으로 인도하는 문고리
내소사 대웅전 단청 / 서정주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내벽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禪師, 선사 옆 아무 것도 칠하지 못하고 휑하니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 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헤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西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 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말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것이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마리가 천정을 파닥거리고 날아디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 보는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바닥에 납작 사지(四肢)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 이었다.
" 大虎스님 ! 大虎스님 !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來生에나 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에다가 미쳐 다 못한 그 빈 공간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영산회괘불탱화 靈山會掛佛撑畵 ... 보물 제 1268호
석가불을 중심으로 불보살들이 협시하고 있는 7존형식의 괘불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영산회상이란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한 법회를 말하며, 그 모습을 그린 불화가 영산회상도이다.
구성은 중아에 석가불을 큼직하게 그리고, 조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그렸다. 그리고 뒷쪽에 증청묘법다보여래와 극락도사아미타여래,관음보살,세대지보살을 배치하여 7존 형식의 구도로 영산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각 상의 형태는 둥근 얼굴에 체구를 다소 살지게 표현하여 부드럽고 원만하며, 양 뺨과 눈자위, 턱 밑, 손과 발바닥 등은 옅은 분홍빛으로 칠하여 배우 밝은 표정을 보여 준다. 불상의 경우 높고 뾰족해진 육계에 계주가 선명하고 각 상의 이목구비는 장식적인 면을 띠고 있다.
線은 윤곽선을 굵게 처리하여 경직되어 보이나, 귀와 콧속의 털까지도 묘사하는 등 정밀함과 함께 유연함이 남아있다. 전반적으로 홍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색상은 금색을 사용하지 않고 연한 하늘색과 분홍색 등 비교적 밝고 명랑한 중간 색채를 많이 사용하여 화면에 경쾌함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탱화의 기명(記銘)에 "康熙三十九年庚辰六月日菱伽山來蘇寺安宇掛佛撑"이라 적혀 있어, 제작 년대가 조선 숙종 26년(1700)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10.5m X 8.17m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볼 수 있는 불화이며, 또 像마다 각기 名號를 지니고 있어 당시 불화양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과 관련된 창건설화
임진왜란으로 절이 전소되어 그 중건에 노심초사하던 청민선사(靑旻禪師)가 하루는 그의 사자승인 선우를 불러 "법당을 지을 도편수가 지금 일주문 밖에 왔을터이니 가서 모셔 오너라"하므로 선우가 기쁜 마음으로 나가보니 과연 한 꾀죄죄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연장망태를 걸머진 채 문기둥에 기대어 자고 있거늘 다소 실망한 선우가 깨워 모셔 왔다.
도편수(우두머리 목수)는 다음 날부터 재목을 자르기 시작하였는데, 몇달 몇일이 되어도 법당은 짓지 않고 목재를 깍고 다듬어 부재 만드는 일만 하는 것이었다. 도편수의 하는 꼴이 미덥지가 않아 선우스님이 그 부재 하나를 몰래 감추었다. 3년 동안 목재만 깍던 도편수가 이제 법당을 짓는다며 부재를 세고 또 세더니 크게 탄식하며 청민선사에게 " 스님, 저는 이 법당을 지을 수 가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하는것이 었다.
깜짝 놀란 청민선사가 " 아니 이게 왠말이오"하니, 도편수는 " 소인이 3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목재를 다듬었다고 믿었는데, 이제 헤아려보니 하나가 모자랍니다. 이러한 선심과 부족한 정성으로 어찌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 하면서 연장을 챙겨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영페서 듣고 있던 선우스님이 깜짝 놀라 몰래 감추었던 부재 하나를 내 놓으며 용서를 빌었더니 도편수가 웃으면서 " 그것은 이미 부정탄 목재이니 내 그것을 빼고 지으리라 "하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우측 천정 한 칸의 빈자리가 있다고 한다.
마침내 법당을 다 지은 도편수가 화공(畵工)을 데려와 내부의 단청을 하는데, 화공이 말하기를 단청일을 하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도록 단단히 당부하였다. 그러나 참을성이 부족한 선우스님이 99일째 되는 날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게 왠일인가. 화공은 보이지 않고 황금빛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넋을 잃고 들여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같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오면서 황금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리고, 법당 앞에 쓰러진 집채 만한 호랑이 앞에서 청민선사가 법문을 설하고 있었다. " 대호선사(大虎禪師)여! 생과 사가 둘이 아니거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지은 이 법당은 길이 법연(法緣)을 이으리라 " 법문을 마친 청민선사도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한다.
후불벽화 .. 백의관음보살좌상 白衣觀音菩薩坐像
대웅보전 삼존불상의 뒤로 돌아가면 후미진 벽면에 백의수월관음도(白衣水月觀音圖)가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수월관음도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순조로운 出産과 어린 아이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는 백의관음(白衣觀音) ..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根機 ..정신적 수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나는데, 흰옷을 걸치고 있는 백의관음이 그 중 하나로 백의관음신앙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의 수월관음(水月觀音)이 형성되기 이전에 성립되었으나, 당나라 말기부터 수묵화의 발달과 선종의 융성에 따라 수월관음상에 흰 옷을 입히면서 두 신앙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마곡사의 대광보전에 있는 백의관음도는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수월관음도는 고주 사이에 한지를 여러 겹 발라 후불벽을 조성하여 일반 화폭에 그린 것처럼 섬세하게 그렸다. 관음보살이 물결이 넘치는 해상 위의 기암괴석에 앉아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백색의 장포(長袍)를 입고, 정면을 향하여 반가좌를 한 모습이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었으며, 얼굴은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과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그리고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하였다. 양손은 반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고, 맨발인 상태인 왼쪽 발은 홍련의 청록색 연밥을 밟고 있다.
대웅보전 꽃창살
대웅보전의 전면 기둥 사이 문들은 꽃창살로 장식되어 있다.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구절을 생각나게 해 준다. 연화와 국화꽃을 하나하나 조각하였다. 그 꽃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이 꽃을 하나하나 조각해 나갔을 목공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내소사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보전은 전면에 꽃창살문을 달았다. 별개의 독립된 예술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정면의 문짝에 새겨진 꽃창살무늬는 연꽃과 국화 그리고 모란꽃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으나 비바람에 씻겨 지금은 나뭇결이 다 드러나 있다. 자연의 손길이 한참동안 만지고 간 나무는 살의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색도 사라지고 나무의 근육이 깊은맛을 내고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쓰다듬고 빗물이 사선으로 치며 쓰다듬은 흔적이다.
꽃문양은 우리 전통 문양 중의 하나이다. 꽃문양 이외에도 호랑이 문양, 용 문양, 봉황 문양 등 다양한 문양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미의식이 얼마나 심오하고 깊은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들이다. 더군다나 문창살을 꽃문양으로 장식할 정도로 생활 미학이 발달되어 있는 문화민족이라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소사 대웅전의 꽃문양 창살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세월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다. 나무에 새겨진 문양 사이로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한 것도 보이고 세월에 의해 떨어져 나간 부분도 눈에 띤다. 내소사에서 멀지 않은 금산사 대웅전의 문도 꽃창살이다. 그러나 이 문양은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비교해 보면 옛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詩가 있는 내소사 꽃창살
등푸른 햇살이 튀는 전나무 숲길을 지나 / 내소사 안뜰에 닿는다 / 세 살배기나 되었을 법한 사내아이가 / 대웅보전 디딤돌에 팔을괴고 절을 하고 있다 / 일배 이배 삼배 한번 더 / 사진기를 들고 있는 아빠의 요구에 / 사내아이는 몇번이고 절을 올린다 / 저 어린 것이 무억을 안다고 / 대웅보전의 꽃창살무늬 문이 환히 웃는다 / 사방연속으로 새겨진 / 꽃창살무늬의 무늬와 나뭇결을 손끝으로 더듬다보니 / 옛 목공의 부르튼 손등이 만져질 듯 하다 / 나무에서 빼낸 옹이들이 /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들어 앉았을 옛 목공의 손 / 거친숨소리조차 끌 끝으로 깎아 냈을 것이다 / 결을살릴려면 다른 결을 파내어야 하듯 / 노모와 어린것들과 아내를 파내다가 이런 ! / 꽃. 창. 살. 무. 늬 / 옹이 박힌 손에 붉게 피우곤 했을 것이다.
부도밭에서 나오면 천왕문으로 그 좌우에 앙증맞고 야트막한 토담이 앞을 막고 있다. 담은 밖과 안을 단절시키지만, 내소사의 담은 그리 높지 않은 담으로 안 경내를 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예술이 있는담으로 단절감보다는 중생을 끌어안은 따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석탑이 세워진 시기는 확실치 않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이 올려져 있으며, 상대(上臺) 中石과 탑신(塔身)에 우주(隅柱)가 있다.
1층 옥개석(屋蓋석)은 낙수면(落水面)이 물매가 가파르나, 2층과 3층은 완만하다. 상륜부(上輪部)의 노반(露盤) 위에는 보주(寶珠)가 올려져 있다.
조사당 祖師堂
조사당(祖師堂)은 조사전(祖師殿)이라고도 하며, 조사(祖師)스님을 모신 당우로서, 처음에는 중국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를 모셨으나, 뒤에는 한 종파를 세운 스님, 존경받은 스님들을 모시게 되었고, 요즘에는 더 나아가 그 절의 창건주, 역대 主知스님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기도 한다.
설선당 說禪堂
설선당(說禪堂)은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이 수학, 정진하는 곳이며, 요사(寮舍)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설선당은 조선 인조 18년(1640)에 청민대사(靑旻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요사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듯하고, 우측은 요사채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현재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설선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간략화된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넓이는 34평의 규모이다. 건물 동쪽 측면 한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서 거대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설치하였다.
요사(寮舍)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넓이는 69평의 규모이다. 2층으로 구성되었는데, 1층은 현재 승방과 식당 및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마루로서 식료품이나 기타의 물건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시설해 놓았다.
이 설선당과 요사를 연결해 주는 건물이 북쪽 끝과 남쪽 끝에 2동이 있어서 회자형(回字形) 건물을 이루는데, 설선당 동쪽과 요사의 서쪽 서까래 일부를 발라내고, 건물의 용마루를 끼워서 두 건물 사이에 연결하였다.
그 북쪽 연결 건물은 설선당의 높은 대지와 요사의 낮은 대지를 연결하는 관계로 2층 건물의 내부 마당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1칸 두고, 다른 1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남쪽 연결 건물 2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고, 남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해우소 解憂所
400년 묵은 해우소
해우소(解憂所) .. 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 절에서 화장실을 일컫는 말이다. 전북 부안 내소사의 "해우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재래식 화장실 가운데 하나이다.
부안 능가산 내소사, 입구에 늘어 선 600m길이의 전나무 숲과 대웅전 창살문이 내소사의 이름을 높여 주고 있지만 숨겨진 명물도 있다. 바로 거의 400년 묵은 해우소, 조선 인조11년 (1633) 청민스님에 의한 중창 불사 당시 세워져 현재까지 原形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전해진다.
8평 남짓의 아담한 고건물에는 3칸의 "超 재래식" 변소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뒷간 그대로의 모습이다. 지금까지도 스님들이 근심을 푸는곳으로 사용된다.
늙은 불곰을 연상시키는 바깥 모습이 이채롭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천년 동안 오래고 고된 풍화를 견디며 오늘날까지 버텨왔다는 사실이 더욱 신비하다.
똥이 쌓이면, 중간 중간에 톱밥을 뿌려주면 냄새도 안 나고, 훌륭한 퇴비가 된다.
외부 손님들을 위한 현대식 수세화장실
범종각 梵鐘閣
사찰에서는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梵鐘, 法鼓, 木魚, 雲판등 4가지를 걸어두고, 타악기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예불이나 의식, 식사 시간을 알리는데 쓰이나 상징하는 것은 각각 다르다. 이들 法具들을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한다.
범종 梵鐘
범종은 본래 대중을 모으고 때를 알리기 위하여 두드렸으나, 점차 朝夕의 예불이나 의식을 치를 때 치게 되었다. 치는 횟수에 따라 의미가 다른데, 28번은 부처로부터 6조 혜능(慧能. 638~713)까지 이어진 법맥이 28명이란 뜻이고, 33번은 불교의 세계, 곧 33天을 의미한다.
108번은 백팔번뇌를 타파하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의미이다. 종소리가 지옥으로 울려 퍼지라는 의미에서 종의 입구를 아래로 향하게 한다.
법고 法鼓
법고는 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畜生)들을 제도한다. 몸통은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면은 한쪽은 숫소, 다른 쪽은 암소 가죽을 대야 소리가 잘 난다고 한다.지금은 보통 종각에 걸어두고 예불을 알릴 때 사용한다
목어 木魚
목어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배 부분을 파내고, 그 속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형태이었으나 점차 龍머리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길게 두 번 두드리면 공양시간, 한번 두드리면 모이라는 의미였으나, 현재는 독경이나 의식에 사용한다. 목탁(木鐸)은 목어가 변형된 것이다.
운판 雲板
운판은 구름 모양의 얇은 청동판이다. 판 위에는 보통 보살상이나 진언(眞言)을 새기고 가장자리에 승천하는 용을 조각한다. 본래 부엌이나 식당에 걸어두고 대중들에게 공양시간을 알릴 때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의식용구로 예불 때 다는 四物과 함께 친다.
김규봉의 사는이야기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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