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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문

파라클레토스 2011. 3. 15. 16:33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그리고 각 대문들의 사이에,
편의를 위해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동소문인 혜화문을,
동문과 남문 사이에 남소문인 광희문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서소문인 소의문을,
서문과 북문 사이에 북소문인 창의문을 두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동대문이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보물 제1호>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참고 사항 :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동 : 타락산, 서 : 인왕산, 남 : 목멱산, 북 : 북악산이다.)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한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헐리기 전 돈의문의 모습, 책자에서 스캔한 사진이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숭례문은 옛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며 정문이기도 했다. 국보 제1호>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얼마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했던 일이 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런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 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것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숙정문(肅靖門)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
'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음기가 강한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혜화문(惠化門)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도성의 동소문이었던 혜화문, 1970년대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광희문은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었던 광희문, 사방으로 길이 뻗친 가운데에 서 있어 애처롭다.>


1915년에 자연 붕괴도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현재와 같이 복원 되었다.

 

소의문(昭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었던 소의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었던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100년전의 남대문,동대문

 

동대문 성벽에서 성문 밖을 찍은 듯한 풍경이다. 사진을 찍는 것이 신기한지 아이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동대문 성벽위에 아이들이 올라와 있다. 전봇대와 전기줄도 보인다.

 

노인들이 남대문에 올라가 담소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고 길가는 행인도 보인다. 

 

남대문 안쪽의 풍경. 장이라도 섰는지 많은 사람들이 배추 같은 채소 지게를 내려 놓고 팔고 있다. 

서울 남대문(숭례문) 일원의 모습이다.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초가와 기와집 그리고 성벽 또 아이들의 모습이 더 없이 평화로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