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제 2 회) 98년 10월 24일(토) 방송
[고종의 X파일! 군함을 구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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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진해관함식
지난 12일 국내 최초로 열린 국제 관함식에서 해군은
우리 기술로 자체 제작한 3천4백톤급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을 일반에 선보였다.
작은 배-광개토대왕함 등장
근대식 군함을 도입한지 100년만의 일이었다.
최첨단의 군함없이 더 이상의 해상방위는 불가능한 시대.
그것은 100년전이나 오늘이나 다름이 없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야 했던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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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고종의 X파일 군함을 구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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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MC
한 나라가 자주국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잣대중 하나가 군함 보유 상탭니다.
미국은 8만톤급 이상의 항공모함 13척을 보유하고 있고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9천톤이 넘는 이지스급 대형 군함을 갖춰놓았습니다.
선진 강대국이 아니라면 이런 배는 만들 수도,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3천4백톤급 구축함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 광개토대왕함을 보유하게 됨으로 우리의 해군력은 한 단계 발전을 이뤄낸 것입니다.
하지만 신식 군함을 직접 만들어낼수 없었던 1903년.
고종은 군함 한 척을 구입합니다.
이 배가 바로 그 군함, 양무호입니다.
우연히도 이 배는 광개토대왕함과 똑같은 3천4백톤급입니다.
당시 초대형급인 이런 군함을 도입했다면 그건 분명 대단한 국책사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이 배는 베일에 싸여 그 존재조차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해지는 모습도 이 사진 한 장뿐입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었던 양무호는 왜 역사속에 묻혀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먼저 이 배는 어떤 배이며, 고종은 어떻게 이 배를 구입했는지 부터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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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양무호가 대한제국의 군함이 되기까지
양무호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처음 찾은 곳은 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설명
해군은 양무호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해군이 갖고 있는 자료가 궁금했다.
양무호 사진
그러나 해군이 갖고 있는 것 역시 이 사진 한 장 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한 아마추어 연구자가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장학근
최초의 근대군함 양무호.이에 대한 연구는 10년안팎.그것도 논문에 불과
그런데 관련 사진을 한 독지가가 이렇게 보내줬다
김재승과 함께
전문학자도 아닌 그는 어떻게 그 사진을 찾아냈던 것일까.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김재승씨는 근대해양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자료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양무호에 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인터뷰/김재승
1881년 영국 미드스버그에 있는 알딕슨사에서 만든 화물선.
3432톤. 적지않은 크기의 화물선 당시로선..
당시 일본의 화물선 평균 톤수가 600톤.
이 배를 1893년 일본 정부 일본 미쓰이 상사가 석탄운반선으로 영국에서 사온 배.
원래 영국에서 만든 화물선 이름은 타라스. 일본에 가지고 와서 붙인 이름은 승립환.
도쿄
원래 화물선으로 만들어진 배가 일본을 거쳐 대한제국의 군함으로 탈바꿈했다.
미쓰이 문고
취재팀은 처음 배를 구입한 미쓰이상사에 보관돼있는 자료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미쓰이상사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이 배를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석탄을 싣고 홍콩까지 운반하는 화물선으로 사용했다.
취재팀은 이 화물선을 대한제국에 판매하게 된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중역회의록
이건 어떤 책입니까?
미쓰이상사 중역회의록입니다.
이것은 명치 36년도 분입니다.
미쓰이 상사 중역회의록.
이 자료는 당시 최고 결정권을 갖고 있던 중역회의 내용을 기록해놓은 자료였다.
2월3일 제6회 중역회의.....
승립환 매각의 건 가결.
이걸팔아도 좋겠는가, 하는 걸 가결했다는 뜻...
결정되고 난 후의 이야기를 여기다가
한 번 읽어봐 주시죠.
승립환 매각의 건 가결이 회사의 승립환은 만든 이래 15년간 우편선 또는 석탄선으로 쓰였다.
그러나 석탄선으로는 부적당하여 용도를 모색하던 중
다행스럽게도 한국 정부에 연습선으로 매각하기로 교섭이 성립됐다
아래 조항대로 55만엔에 매각하기로 결정됐다
취재팀은 이 자료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항을 발견했다.
당시 미쓰이상사는 하루에 석탄 43톤이라는 막대한 관리비 때문에 고민하던 중
대한제국에 팔게 돼서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다.
처치곤란이던 배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막대한 이득도 챙기게 됐다.
선체 20만엔, 무장 4만엔, 화약고신설 1만엔, 데크 장착 2만엔, 인천회항비 1만엔,
구조 수리비품 장식 일체 7만엔. 합계 35만엔.
구조 수리비 35만엔
9년간 사용하던 중고화물선을 개조해 55만엔에 팔게 된 총판매가 55만엔 것이다.
무려 20만엔의 프리미엄까지 붙였다.
일본외무성사료관/
일개 무역회사가 한 나라의 정부를 상대로 군함을 판매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일본외교문서/
취재팀은 일본 정부가 이 일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료/군함구입 1건
일본 외교문서에는 역시 군함구입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일본 정부는 미쓰이 상사로부터 이 계약과정을 상세히 보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이래 한국 정부는 군함 한척을 구입하기 위해 우리에게 내밀히
상의 하엿는데 3일전 한국 정부 군부대신과 미스이 상사 지배인 간에 계약이 조인됐다>
-미쓰이 상사 정보보고-
자료/군함구입 계약파기
게다가 뒤늦게 가격결정이 잘못됐음을 알고 계약 파기를
서두르던 대한제국 관리들의 움직임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정부 내에 군함 계약을 파기하려고 도모하는 다수의 세력이 있다>
-주한일본공사 정보보고-
규장각-서가
그러면 이 55만엔이란 군함구입비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1903년 당시 국가예산 규모를 알아봤다.
이윤상 자료 설명-
세출총계 1076만원
군부소관 예산 412만원
당시 환율이 2대 1. 양무호 구입비 55만엔은 우리 돈으로 110만원이다.
대한제국은 국방예산의 30%를 투자해 군함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윤상 인터뷰/
고종이 군함 의지 강했다는 증거. 당시 국가재정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무리한 셈.
독립신문(1897.5.25)
국내여론 또한 좋지 않았다.양무호를 사기 5년전인 1897년
독립신문은 사설을 통해 군함구입을 반대했다.
국가 재정상태를 무시하고 군함을 살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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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독립신문을 비롯한 각 신문들은 한결같이 군함 구입에 반대했습니다.
신식 군함보다 국가재정이 흔들리는 것을 더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군함 구입을 빠르게 추진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반도 지도 주변 각국의 배 둘러싸고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보유하고 있는 배는 범선이 아닌 증기선입니다.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조선의 범선과는 비교할수 없는 성능을 지닌
배들이었습니다.
이런 배들이 강화 해안에 나타나자 전국은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판넬 내용/주베르의 프랑스 배 스케치-2D-드라마중 강화도 전쟁씬)
이런 이양선들의 위력을 처음 느낀 것은 1866년 병인양요였습니다.
서양인들이 가진 증기선은 빠르게 움직였고,그 배에서 쏘아대는 대포는
강화 해안을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 조선이 가진 군함으론 맞설 수가 없었습니다.
MC
이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고종은 군함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식 군함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수는 없는 것일까.
고종 나이 16세때.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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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실패로 끝난 최초의 군함 제작
사진-병인양요
병인양요 당시 경험한 서양 증기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배들은 크기에서부터 속도까지 조선의 범선을 압도했다.
이때 대원군은 전국에 특명을 내려
장인들을 불러모았다.신식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해국도지 표지
당시 근대식 배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해국도지다.
책 내용
청나라에서 들여온 이 책에는 기관을 장착하고 동력을 이용한
근대식 증기선에 관한 원리가 자세히 정리돼있다.
특히 그림을 삽입해 배를 만들기에는 좋은 자료였다.
증기기관-수례 이 책을 토대로 배를 만들었다면 일단 증기의 원리를 알았을 것이고,
근대식 증기선의 특징인 수레도 장착했을 것이다.
책 내용
하지만 기본 자료는 이 책을 썼다 하더라도 실제 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전혀 알수가 없다.
배 모양이나 성능에 관한 기록 역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근대식 증기선.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취재팀은 그 배를 복원해보기로 했다.
이원식씨 거북선 모형놓고 설명
한선 전문가인 이원식씨는 근대식 배라고는 하지만 한선의
기본모양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인터뷰/이원식
이것은 거북선.. 평선 배에 동판이란 철을 붙였다.여기 위에서 죽 붙이는 물이 닿는 부분만
서양에서 증기기관이 발명. 증기를 이용해 이러한 수차를돌리는 기계 발명. 그 기계를
이러한 외륜선에 도입.
서양에서는 돛을 이용하고 외륜성을 이용한 증기외륜선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취재팀은 한선의 기본모양과 서양의 근대식
증기선인 외륜선 모양을 혼합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컴퓨터 그래픽-대원권 배 복원
선체에는 동판을 입히고, 돛은 한선의 기본 돛을 달았다.
배의 양 옆에는 수차를 달아 노를 대신했다.증기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배인만큼 연통도 필수사항이다.
드디어 배가 완성됐다.
배가 완성되자 대원군은 노량진 앞 한강에 이 배를 띄우고
진수식을 가졌다.그러나 1시간에 십여보밖에 움직이지 않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인터뷰/장학근
증기선은 고도의 유체역학과 증기를 이용해 전기로 변화시키는 원리를 알아야하는데
대원군은 단순히 물을 끌어올려 전기를 이용해 추진력으로 배가 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배 속도를 조절할 수 는 엔진이 필요한데 그러한 엔진을 만들지 못해.
수뢰포실험
이때 배와 함께 만들어진 근대식 무기 수뢰포 역시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어뢰였다.
대원군의 배
이후 이 배는 강화도로 보내져 해군의 연습용 배로 사용하려
했다는데, 실제 사용한 기록은 없다.
실패였다.
근대식 증기선을 만드는 일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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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나이 16세에 고종은 우리 손으로 신식 군함을 만든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함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들 수 없다면 구입하면 되지 않을까.
아마도 고종은 이런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이 금덩어리가 그런 고종의 생각을 대변해줍니다.
고종은 양무호를 구입하기 20년전인 1881년
황실에 전해지던 이 금덩어리를 은밀히 군함 구입 비자금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애기로는 손가락만했다고도 하고, 목침만한 크기라고도 하는데요.
이 비자금은 어떻게 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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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고종의 비밀지령! 군함을 구입하라
비자금과 함께 고종의 첫 번째 비밀 지령을 받은 사람은 승려 이동인이었다.
그러나 이동인은 군함 구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만다.
<이동인 김홍집의 미움을 사 화를 입은 것 같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문서-
누가 암살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동인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죽음은 군함 구입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외교수완이 뛰어났던 이동인이 고종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일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막아야했다.조선이 근대식 군함을 갖는다는 것은 일본에게 큰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뷰/신봉승
영국측에서 봤을 때 국제정세에 너무 밝아 그건 방해대상
일본에서는 이동인 한 번 써보고 싶은생각. 투자 많이 했어. 하지만 너무 자세히 잘 알아.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이동인은 어디 의지할 때가 아니야.
이동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군함을 구입하려는 고종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고종의 비자금 또한 이동인과 함께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세창양행 자리
일본을 통한 군함 구입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고종은 독일과의 교섭을 시도했다.
인천에 들어와있던 독일 무역회사 세창양행에 조심스럽게 군함구입을 문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창양행측은 구입 문의를 묵살해버렸다.
그런데, 이 교섭내용 또한 일본 정부에 그대로 보고되고 있었다.
<조선 정부가 독일 세창양행에 군함구입을 의뢰했다>
-일본외교문서 명치문서번호 222-
인터뷰/김재승
화물선 창녕호, 현익호를 세창양행의 차관으로 배를 팔았지만
조선 정부가 그배의 원리금 상환을 제대로 못해 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군함을 달라고 하니, 배값을 받을 길이 없어 협조 안 하는 것.
일본 외교문서
군함을 구입하려는 고종의 노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과대한제국>
다시 영국에 구입 문의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과는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돼있었고,해군과 군함 보유상태도 최고였다.
이번에는 평양 일대 탄광 채굴권을 대가로 제시했다.
그러나 영국 역시 선 듯 군함을 팔지 못했다.
<조선 정부는 평안도 일대 탄광채굴권을 담보로 영국에서 군함 구입 시도했다>
-일본 신문집성 명치편년사 권 8-
일본이 이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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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조선이 군함을 갖는 것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군함은 조선을 강점하겠다는 목적에 방해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모든 첩보망을 총동원해 군함 구입을 원천봉쇄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여기서 중단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1893년 조선이 영국에 보낸 문서입니다.
계약기간은 2년. 월급 5천원에 해군 교관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영국의 해군 교관을 영입해 근대식 해군을 양성하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1893년이라면...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보다 53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그동안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1946년의 해군병학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종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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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군함이 어려우면 우선 해군사관학교부터 설립하라
사진-코렐대위 살던 집
고종의 군함 구입 요청에 답변하지 못했던 영국은 서둘러 해군 교관을 파견했다.
인터뷰/김재승
당시 조선과 영국은 외교관계가 수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서울에는 영국총영사관이 주재.
답답한 것은 서울에 있는 영국 총영사관.
국왕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영국 정부가 계속 거절만 하면
영국이 대조선에서 경제적 이득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됨.
따라서 영국이 조선 정부가 요구하는 요청을 수용하는 방향에서 나오는 것이
군함을 움직이는 인재를 먼저 양성해야 한다.
자료/코렐대위 회고록중
이때 교관으로 파견됐던 영국 해군 대위 코렐의 수기에 따르면
당시 해군사관학교는 강화에 설립돼있었고 생도는 모두 160명이었다.
취재팀은 해군측과 함께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강화도 해군사관학교 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확인작업은 강화의 원로급 노인들을 취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100년전의 일을 확인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강화문화원 전문위원으로 강화의 역사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있는 이호경씨 역시 해군사관학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이호경씨
해군 관계는 잘 모르겠고 육군관계는 이동인선생이 연대장으로 있었으니까
그 양반은 문헌에 남아 있는데 그 외의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이 사진 한 장 확인해달라....
이 건물이 산세로 봐서 어디에 해당됩니까?
백4년전에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은 코렐대위의 회고록속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해군사관생도들의 단체사진인데, 그렇다면 이들이 서 있는
이곳이 바로 해군사관인 셈이다.
이호경씨 얼굴 EFFECT 자세히 모르겠는데...
사진 한 장으로 그 위치를 찾는 건 어려운 작업이었다.
성공회 신도회장을 지낸 올해 여든의 김옥룡씨가 확인작업에 합류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어린시절 들었던 해군과 관련된 목격담 하나를 전해줬다.
김옥룡씨
동네사람들이나 노인들 애기는 돛대를 나무 비슷한 데 매달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훈련을 했다는데.....그건 범선교육이니까....
그 분은 목격자신가....그렇지 지금은 돌아가셨지
김옥룡씨
이 사진 봐달라. 위치가 어딘가.이사진이 코렐대위가 가져와 찍은 사진이다.
강화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두 노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코렐대위의 사진을 해석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찾아낸 것이 갑곶진.
갑곶진 부근의 산세와 비슷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갑곶진
군인과 김재승
노인들 말씀대로 하면 저 안쪽. 저 안쪽에 건물 짓지 않았겠느냐
사진 속의 풍경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사진을 찍는 위치에 따라 같은 장소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김재승/
몇 군데를 옮겨다닌 끝에 가장 닮은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장학근/지금 저 양반 있는 곳....
사진 속의 모양과 비슷하긴한데, 바로 여기다라고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먼저 현장을 가 본 이호경씨가 돌멩이들을 들고왔다.
해사 유적들
고급자기들이 나오고...
100년전 이곳은 바닷가 갯벌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곳에 사관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생도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사진 속의 현장과 맞아떨어지는 그곳엔 건물을 세웠던 주춧돌과 기왓장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곳이 과연 해관사관학교가 있었던 자리인가.
다시 한 번 점검해보기로 했다.
참가했던 모든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보았다.
김포에서 구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오른쪽.
수병을 양성하기엔 안성마춤인 곳이다.
드디어 참가자들은 이곳이 해군사관학교 터임을 확인했다.
100년동안 잊혀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취재팀은 당시 영국 교관들이 살았던 사택도 확인해보기로 했다.
강화군 관청리에 남아있는 이 사택은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영국인 교관 코렐 대위와 영어교육을 담당했던
하사관 허치슨은 1년동안 이 집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김재승/ 이 대들보가 이거란 애기네
그러나 이 학교는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고 단 1년만에 문을 닫고 만다.
교관들은 영국으로 귀국했고, 집은 성공회에서 사들여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고종은 의욕적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 전역에 군사행동 금지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해군사관학교도 폐쇄됐다.
160명의 생도들은 육군으로 편입됐다.
인터뷰/김재승
당시로선 최첨단 교육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육을 받게 되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거나 경제식민지화시키는데 엄청난 장애요인이 되기 ㄸ문에 이걸 막아야 한다는 게
일본의 기본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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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강화도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는 불과 1년만에 문을 닫고 맙니다.
군함 구입은 둘째치고, 군인을 양성하는 것조차 일본은 철저하게 감시하고
방해공작을 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뒤 군함 한 척이 인천항으로 들어옵니다.
3천4백톤급 증기선 양무호.
군함 한 척없이, 나라를 지키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고종의 결단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주국방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양무호의 실제 모습을 재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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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군함 양무호
자료/서양의 여러 배들
양무호가 만들어진 것은 1888년. 당시만 해도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선은 전체 건조 선박의 35% 수준에 불과했다.
증기선 건조는 초보단계였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영국이나 일본, 어디서도 이 배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없었다.
다만 양무호의 크기만이 전해질 뿐이다.
배 길이 105미터, 높이 8.3미터. 그리고 배의 폭이 12.5미터다.
한나라호
그렇다면 이만한 크기의 배는 실제 어떤 모습일까.
취재팀은 이와 비슷한 크기의 배를 찾아 비교해보기로 했다.
김재승 인터뷰/
제 뒤에 보이는 한국 해양대학 실습선 한나라호가 양무호와 크기가 거의 유사.
양무호는 배 길이 102미터.폭은 12.5미터.한나라호가....유사한 크기
톤수로 애기하면 양무호는 3400톤, 한나라호는 3600톤으로 유사한 크기
양무호를 상상할 때 크기가 유사한 선박으로 생각하면 크기 다르지 않다.
동경상선대학 실습선 명치환
크기는 확인됐지만 배에 장착된 각종기관은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번에는 양무호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 배의 모습을 살펴봤다.
한바퀴 돌면 갑판 위 구조물과 선실의 모양새가 현대식 배와는 다르다.
방향을 잡는 키와 위치를 확인하는 계기판들. 첨단 전자장치로
가득한 요즘 배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만을 점검한 채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컴퓨터 초기작업 그림
양무호의 선체의 모양은 사진을 참고해 앞 뒤로 2개의 돛을 달았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통이 가운데 배치된다.
포의 위치도 결정됐다.
증기기관 완성 -
양무호 겉모습 완성
김재승 인터뷰/양무호의 장착된 적성호 구식대포는 8센티짜리 대포.
승리에 좌우에 각 두 문, 선미에 각 두문 8문에 팔 센티 포 8문 장착.
함도좌우에 40센티 기관포를 두 개씩 4문.
14문의 기관포 장착해서...
양무호의 포는 일본에서 개조할 때 장착된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는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포가 없었다.
완성된 양무호
드디어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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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드디어 고종의 원대한 꿈은 이뤄졌습니다.
이만한 크기라면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대포를 장착해 유사시엔 언제라도 전투를 벌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소원하던 군함을 구입했건만
2년뒤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고, 7년 뒤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시기, 양무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대한제국은 이 배를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이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이 분입니다.
양무호에 승선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는 신순성씨.
황성신문에 따르면 신순성씨는 최초의 양무호 선장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순성씨의 행적을 통해 양무호의 항해상황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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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양무호 항해일지를 찾아라-선장 신순성을 통해서
동경상선학교
양무호의 선장이라면 근대식 해군교육을 받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여기있는 기록은 어떤내용의 기록입니까?
1897년 9월에 입학한 한국 유학생 5명중 2명은 7월에 졸업하였다.
한 명은 12월에 졸업하였다.
당시 조선은 5명을 관비유학생으로 이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졸업생 명단에 신순성이란 이름은 빠져있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을 선장으로 임명할 리가 없다.
신순성이란 이름은 여기 안 나오는 군요. 안 나온다.
이번에는 다른 서류를 찾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신순성에 관한 기록이 불투명해지면 양무호 항해일지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양무호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그가 쥐고 있었다.
아하,찾았다
관계자가 다시 찾아온 자료엔 신순성의 이름이 있었다.
왜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뒤늦게 졸업했던 것일까.
인터뷰 /신순성이란 사람이 이 학교 졸업한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때 실습 나가있는 걸로 봐서는 분명히 졸업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확실히 졸업했을 겁니다.
특히 성적이 우수해서 학교에서 주는 상을 많이 받았답니다.
일단 첫 번째 의문은 풀렸다.
신순성은 우수한 성적으로 근대식 해군 장교 교육을 마쳤다.
일본에서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였다.
양무호의 구입과 때맞춰 졸업하게 된 신순성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선장 임명을 받고 귀국했던 것이다.
신태범의 집으로
취재팀은 신순성씨의 후손을 찾아보기로 했다.
후손들은 무언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아들 신태범씨는 아버지가 남긴 몇 가지 자료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자료화일 넘기고 졸업장.....
이건 뭡니까 졸업장입니다.
신태범씨가 갖고있는 자료속에는 일본에서 확인한 것과 같은 졸업장과 우등상장이 있었다.
북청사변 종군기장
양무호 사진
그러나 양무호 관련 자료는 사진 한 장 뿐이었다.
신태범씨는 아버지가 양무호를 운항했다는 애길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신태범 인터뷰/내가 듣기에는 양무호에서 근무한 실적은 없는 것 같다. 모르겠다.
형식상 한국의 해군사관이 있어야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으로 양무호를 움직이던 것은
일본 선원들이었고 아버님은 거기 근무한 일은 없는 것 같이 나는 듣고 있다.
광제호수병들 사진
양무호에 근무한 기록은 없고, 광제호의 항해사로 활동했던
당시의 사진들만이 남아있었다.
광제호는 1904년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발주해 들여온 근대식 군함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총독부의 등대순시선으로 전락해버린 배였다.
대한제국 두 번째 근대식 군함이었던 이 배의 역사와 함께
신순성도 해군 장교가 아닌 사복입은 신순성
일반 상선의 항해사로 일생을 마감해야했다.
신태범 인터뷰
내가 짐작하기에는 젊어서 대한제국의 해군을 창설해보겠다는 긍지를 가지고
해외까지 나갔었다가 결국은 그런 처참하고 불행한 결과가 됐을 적에 심중에는
아마 말할수 없을만큼 울적한 감정을 가졌을리라 생각.
신태범씨는 지금도 아버지가 남겨논 광제호의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일합병으로 더이상 태극기를 달지 못하게 되자 평생을 몰래 숨겨두었던 태극기였다.
그렇다면 1903년 인천항에 입항했던 양무호는 어떻게 된 것일까.
황성신문 수기생 모집
취재팀은 당시 자료을 뒤지던중 1907년 황성신문에서 한가지 기사를 발견했다.
양무호에서 해원양성을 위해 수기생을 모집한다는 기사였다.
자료/러일전쟁 참가자 사담회기록
그러면 일본쪽 기록은 어떤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9차례나 참가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대한제국의 군함이 어떻게 러일전쟁에 참가한 것일까.
김재승 인터뷰/
조선 정부는 군함을 인수했지만 운항유지비를 댈수 없어 배를 인천에 장기 개선해놓고
제대로 관리못해.
1904년 노일전쟁일어나니까 당시 일본 해군에서 파견나와있던
도오야마 해군소자가 그때 감독으로 나와있었는데, 이 사람이 일본으로 끌고가
일본에서 개조해 일본연합함대의 수송성으로 활용
양무호
결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는 우리의 해상방위를 위해 단 한 번도 출항한 기록이 없었다.
고종이 나라의 사활을 걸고 구입한 배였지만 양무호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 것이다.
1909년, 양무호는 구입가의 10분의 1도 안되는 4만엔에 다시 일본에 매각됐고,
1916년 석탄을 싣고 싱가폴로 가던 중 동지나해에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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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5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최초의 군함.
고종은 이것만 있으면 나라를 지킬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과는 한낱 고철더미, 무용지물이고 말았습니다.
그 군함을 운항할 군인도, 군함을 관리할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배만 들여온 것입니다.
결국 그토록 열망하던 군함을 도입한 뒤 고종은 대한제국의 패망을
지켜본 비운의 황제가 되고 맙니다.
당시 군함을 보유해야한다는 고종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방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기 몇 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종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의 비극적인 운명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굳건히 지켜줄 군함이 필요하다는 고종의 꿈은
오늘 우리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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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태극기 휘날리는 배
광개토대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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