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제 4 회) 98년 11월 14일(토) 방송
이것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언뜻 보면 무슨 그릇같기도 하구요,
종지라고 보기엔 좀 큰것도 같고.....
재질로 봐선 쇠로 만든 것 같은 데요.....
그냥 봐선 선뜻 짐작이 가질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쪽것을 한 번 봐주시죠.
(손에 출토된 복발 들고) 이 유물을 당시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 바로 저 투구입니다.
'복발'이라고 부 르는 이 유물은 바로 저 투구의 맨 윗부분에 얹 혀있던 것인데요,
투구를 쓰고 전투를 할때, 머리 의 가장 중요한, 정수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 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저 투구를 사극이나 혹은 그림에 서 많이 보아오셨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투구가 발견된 적은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번에 발견된 복발은, 남한북한 합쳐서 최초로 발견된 고구려의 투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발이 발견된 곳은 어디일까요.
상식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북한쪽이라고 알고 계시는데요,
그렇다면 이 복발도 북한에서 출토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복발은 바로 남한, 그것 도 한강유역의 아차산에서,
불과 두달전인 지난 9 월에 발견되었습니다.
천 오백 년 동안 침묵을 지키던 고구려가, 이 복발과 함께, 한강에 얽힌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9월의 일입니다.
1500년 간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가
이 복발과 함께 한강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반도의 상징인 한강유역
반도의 패권을 노린 많은 나라들이 이곳에서 싸우고 이기고 쫓겨갔다
그리고 그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는 고구려군이 있었다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
지난 9월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던 발굴팀은 흥분에 휩싸였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고구려군의 군사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한강유역 고구려 군이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아차산 일대는 이제까지 신라와 백제 고분만 150여개 이상 발굴된 것이다
상상도 못한 최초의고구려 유적
그만큼 고고학계의 흥분은 컸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토기들은
모두 1000여 점 붉은색의 점토 평평한 바닥 등 분명한 고구려의 토기들이었다
<임효재INT> 고구려 관계 산성을 완벽하게 발굴한 것은 처음있는 일입니다
북한 지역에서도 그렇고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그렇고
이러한 성을 완벽하게 발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단한 의미를 갖는데...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정리중에 있습니다만은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면은,
형태를 알 수 있는 토기류 무기류 등을 총괄해볼 때, 약 천여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정말정말 대단한 숫자인데, 북한에 있어서도 고구려관계 유적을 많이 조사했지만,
지금까지 나온 토기류를 전부 합쳐도 500 여점 밖에 안되기 때문에,
북한것 보다도 두 배 가까이 많이 나와 가지구서, 고구려 관계를 연구하는데는 획기적인 자료로 생각이 됩니다.
유적이 자리한 곳은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서북 방향으로 용마산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성벽에 둘러쌓여 발굴된 유적들은 모두 7개 건물로 구서되어 있다
최종택 서울박물관
이자리는 45m가 되는 큰 막사에 가운데 쯤에 서있는 지역인데
막사 내부는 공공장소 구간이 하나 있고 제일 남쪽은 아무 시설이 없는 빈터가 있습니다
집회장소로 추정이 되는 곳이고
나머지는 온돌을 낀 방이 세칸 있고 물을 저장하는 집수장 시설이 두개
그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온돌
*(신라와 고구려 온돌비교)
신라의 온돌은 벽과 직각으로 짧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
즉, 방바닥을 덮히는것보다는 취사를 위해서 주로 사용.
그러나 고구려의 온돌은 길다란 형태로, 벽과 같이 평행해서 이어진다.
추운지방이기 때문에 보온의 효과도 같이 노린 것.
온돌에 솟을대가 발견
철솥을 걸어 취사
벽을 따라 길게 뻗은 구조 또한 고구려 특징 중 하나
비교적 추운 지방 고구려 온돌은 취사뿐만 아니라 보온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
온돌 벽체 부분이 남아있고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 곳은 7개 건물 중 가장 큰 중앙동이다
길이 45m 폭 10m 대형건물인 이곳에는 기둥구멍뿐 아니라 초석을 놓아
남북으로 길게 뻗은 보를 떠받치고 있다
기둥초석
각각의 온돌이 있는 방들은 벽이 아닌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다
중앙동 한가운데 있는 구덩이는 물을 담아두었던 대형 집수정
내부에는 뻘흙을 발라 방수처리를 했다
배수구 시설을 이용해서 물을 버림
지붕의 흔적은 불에 탄 서까래를 통해 들어난다
맞배지붕을 얹였던 유적지 건물들은 모두 두차례 걸쳐 축조됐다
평면 배치로 볼때 일차로 4개의 건물을 먼저 지었고
그후 인원이 증가하면서 세개의 건물을 추가로 지은 것이다
유적아래쪽 성벽에는 군사유적의 증거가 있다
성벽을 튀어나오게 쌓아 적을 막았던 방어시설
'치' 바로 그것이다
<최종택INT>
이부분이 직선으로 된 성벽가운데 부분을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 또는 적대라고 부르는 시설이 되겠습니다
이런 성벽을 쌓는 이유는 직선으로 가는 성벽은 적을 대할때 일대일로 대하게 되지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부분을 쌓아놓음으로써 적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그런 유리하게 공격할 수있는 지형이 되겠습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고구려 성에도 똑같은 모양의 방어시설이 보인다
다만 아차산의 방어시설은 규모가 훨씬 작을뿐이다
작은 규모의 군사요새는 보루성이라고 불리운다
어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보다는 임시로 확보하기 위해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즉, 아차산의 유적은 고구려군이 전투를 하기위해 쌓은 군사유적이었던 것.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유적을 일컬어 보루성이라고 부른다.
< 심광주INT>
큰 성곽과는 달리, 작은 규모의 성을 만들 어서 전략적인 거점을 삼는다던가,
어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연결거점에 설치하는, 그런 형태의 성을 보루 성이라고 하는데,
저희가 생각할 때 이 지역 일대, 한강일대와 임진강 일대, 양주일대의 고구려 보루성들은
남진과 관련한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할 중요한 유적이 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유역의 북단, 즉 서울의 광진구에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속에서 아차산의 지명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수 있었다.
지형상 한강을 방어하는 중요거점이었던 아차산은
삼국사기에 아차 혹은 아단이라고 나타난다
삼국사기
(1) (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286년)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을 수축해 방비 하게 했다. (개로왕 전사로 갈수도 있음)
(2) (온달장군은) 아단성밑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죽었다.
삼국사기-아차와 아단
여기서 이상한 것은 아차산 외에 아단성이라는 또 다른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
이 둘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 이도학INT> 같은 지명임.
이성계의 이름이 '단'이었기 때문에 '아단'대신 '아차'를 사용.
그러나 이성계는 조선시대, 즉 훨씬 후대의 사람임.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아단'과 '아차'는 표기상의 오류일 뿐. 같은 것임.
아차산과 아단이 같은 곳이라고 볼 때,
아차산은 개로왕의 전사나 온달의 죽음 등 고대의 많은 비밀을 간 직한 곳이기도.
그러나 이 또한 기록뿐, 정확한 증거는 남아있질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들을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리문화원
지리적으로 아차산과 반정도 걸쳐있는 구리시의 구리문화원 사무실 내부,
몇 년전부터 이곳에서 중요하게 행해지는 행사가 하나 있다.
온달의 넋을 기리는 온달제가 그것.
온달제의 기원은 100여년전, 소머리를 놓고 지냈던 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마을에서 소머리를 놓고 제를 지낸다는 것은 그만큼 큰 인물의 넋을 기릴 정도의 규모일 것..
즉 온달의 넋은, 이곳 아차산유역 작은 주민의 제속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는 얘기.
그러나 이모든 것도 전해져오는 이야기일뿐.
이곳에서 유적이 발굴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김민수INT> 아차산은 구리시에 사는 사람들이 산제를 지내는 중요한 산.
잘 아시다시피 온달장군이 전사한 산으로도 유명하고,
고구려 장수왕이 내려왔을때 백제 개로왕을 잡아다가 죽인 곳.
그래서 관심을 가졌는데, 산불이 난 적이 있다.
그때 성곽의 유구를 제가 발견했다.
그로부터 계속 관심을 가져 조사를 했다.
전설로만 존재하던 아차산은 드디어, 작은 산불로 인해 그 유구를 드러내게 되고,
그때부터 시작된 활발 한 조사가 드디어 두 달전 전체 발굴로 결실을 맺게 된 것.
우연한 기회에 모습을 드러낸 보루성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 무려 15개의 보루성이 늘어서 있었던 것.
우리는 한 번 다른 봉우리들을 찾아가 봤다.
과연, 얼마가지않아서 비슷한 유적의 형태를 발견할수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공터의 크기가 발굴된 유적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크기뿐만 아니라 성벽의 자취도 발굴 된 유적과 똑같은 모양이다.
"아, 여기 성벽이 좀 남아있네요"
"이쪽은 잘 남아있네요. 이 방향으로 죽...성벽이 쌓여있어요."
남아있는 성벽들은 사각형의 큰 돌들을 둥글게 돌려 가며 쌓은 형태.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성법을 보이고 있다.
<심광주INT>
기본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구려식 보루성의 축성기법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됩니다.
신라가 쌓은 다른 축성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신라것은 보루성을 쌓더라도 특징이 고구려와 다른 양상 을 보이게 됩니다.
(신라와 고구려 성벽단면)
고구려는 적은 수의 큰돌을 쌓고 돌과 돌사이에는 찰흙으로 마감을 한다
신라의 성벽은 작은돌로만 속을 채우기 때문에 견고함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보루성벽 /신라보루성 성벽) - 근처의 신라 보루성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보루성 사이의 간격은 약400~ 500미터
아차산과 용마산 15개 보루성들은
서로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
외형으로 보는 규모는 유적하고 비슷합니다
<최종택INT>지금, 뒤로 보이는 부분하고, 높게 튀어나 온 부분이 다 보루성 유적인데요,
발굴이 안되서 정확 한 규모를 알수는 없습니다만, 외형으로 보는 규모는 이 유적하고 비슷합니다.
대략 같은 수의 군인들이 여 기에 한 100여명이면, 저기도 한 100여명의 군사들 이 주둔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발굴한 보루성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아직 아차산에 뭍혀있는 보루성들은14개
이 보루성들을 연결하면 거대한 두줄의 방어선들이 나타난다
1500년 전 이곳 아차산 일대에는 고구려의 대규모 군사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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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475년전 고구려와 백제
그렇다면 고구려는, 언제, 왜, 이런 대규모의 군대를 한강 이북에 배치한 것일까요.
이 지도를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쪽에 보이는 것이 아차산의 보루성들입니다.
그리고, 보루성 맞은편 한강 남쪽에, 바로 그 해 답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입니다.
이 토성들은 백제의 수도로 추측되 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상황을 짐작하실 껍니다.
즉 아차산의 보루성들은 고구려와 백제가 첨예하 게 대치하고 있었던, 전초기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백제를, 그것도 수도 바로 앞 에서 노리고 있었던 걸까요.
이야기는 160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4세기 중엽, 전성기를 맞았던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구려 국왕이었던 고국원왕을 죽입니다.
국왕의 전사, 이는 고구려에게 씻지 못할 치욕이었습니다.
이후, 원수 사이가 된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5세기 초 고구려에는 드디어,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장수왕이 등장합니다.
죽은 고국 원왕의 증손이기도 했던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증조부의 원수인 백제를 치기 위해 남하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쌓은 남진 기지 가 바로 아차산의 보루성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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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고구려군의 중대와 소대
그러나, 과연 보루성뿐이었을까.
보루성이 군사기지로서 존재했었다면, 그와 비슷한 성 격의 다른 유적들 또한 있으리라는 상상을 쉽게 해볼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아차산 보루성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다른 유적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로 덮혀진, 구의동 유적이 바로 그것 이다.
구의유적 사진
지금으로부터 21년전인 1977년,
성동구의 화양지구 택지개발 조사를 하던 팀들은 구획정리를 하던중 이상한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는 갓 무녕왕릉의 발굴을 끝냈던때.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백제고분일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볼 수 없는 토기, 온돌, 주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밖에도 이상한점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온돌이나 석축 등 주거를 했던 흔적과 함께, 직접 취사를 행했던 그을음,
부장품이라고 보기엔 너무 많은 무기들 이 출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윤덕향 INT>
조사 진행되면서 유물중 백제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많아.
그러나 당시는 무녕왕릉이 1970에 조사된 이후 얼마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는 백제유물중 묘한 것이 많다, 그렇게 생각.
그리고 고구려유물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새로운 유물이 어떤것인지, 그냥 이상한 유물 나왔다 정도로 결론을 내리게 됨.
일단 시신을 가묘하는 백제 빈전 장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다
당시에는 북쪽과 교류가 없었던 탓에 고구려에 대한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빈전장은 시신을 묻기전, 잠시 보관해두는 움집형태의 묘를 말한다.
무녕왕릉발굴의 흥분이 가시지않았던 고고학계는, 구의 유적을 무녕왕릉의 빈전장 으로 생각하고 다시 유물을 덮어두기에 이른다.
< 윤덕향INT>
당시 백제 무녕왕릉 발굴하면서 백제 관심 높아져. 이 지역이, 저 아래가 몽촌, 풍납이라는 백제 유적 있기 때문에 인접한 이곳도 백제유적일꺼 다, 외형상으로 고분처럼 보였기 때문에 처음 조사하 면서 백제고분일것으로 판단하고 조사해. 진행되면서 백제것으로 볼 수 없는 토기, 유물들이 출토되긴 했지 만, 그래도 당시 분위기, 그리고 고구려 유물에 대해 북쪽과 교류 없었기 때문에 지식축척 못해. 그래서 이 상한 형태의 백제유적, 빈전장 형태의 고분, 이런 식으 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1988년 몽촌토성에서 구의동에 진짜 이름을 밝혀줄 실마리가 발견됐다
그후로 계속 백제의 빈전장으로 인식되어진 구의유적
그러나 10여년후, 다시 구의유적을 재조명 할 수 있는 발굴이 이루어진다.
88년 올림픽사업의 일환으로 올림픽 경기장을 조성하던 중,
경기장 일대의 백제 몽 촌 토성에서 또다시 이상한 토기가 발견된 것이다.
몽촌토성에서 솟는 나팔입토기
그러나 학자들은 이번엔, 토기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집안지역에서도 많이 출토되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토기인 나팔입 토기였기 때문이었다.
한강유역의 고구려 상징인 '우물 井'만큼이나 확실하게 들어난것이다
다시말해, 백제의 지역으로만 인식되던 곳에서 고구려의 토기가 출토된 것이다.
그때부터 구의동유적은 고구려의시각을로 새롭게 재조명을 받게 된다.
고분이라고 보기엔 너무 높은 유적의위치
쓰임새를 몰랐던 돌무더기들
백제 것이라고 보기엔 생소한 성벽등이
하나 둘 해답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윤덕향 INT>
외각에 튀어나온 석축이라든가 아니면 돌무더기라든가
이런 것들을 군사시설로 보면 상당히 부합되고,
그런 시설들이 고구려 유적과 관련된 부분이 많았었기 때문에,
이것을 백제고분 아닌, 고구려 군사유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군사유적의 결정적인 증거는 출토된 무기들.
3000여 개의 화살과 창촉, 도끼 등등은 부장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즉, 구의동의 유적은 아차산의 보루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군사시설의 하나였던 것 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굴된 아차산 보루성과, 새롭게 조명을 받은 구의동 유적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구의 유적의 크기는 직경 14.8미터의 작은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즉, 아차산의 보루성넓이의 1/10밖에 안되는 작은 규모인 것이다.
즉 구의유적은 보루성의 말단 부대인 것이다
위치 또한 보루성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보루성은 한강에서 떨어진 아차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반면,
구의동 유적은 한강 변, 즉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전방 경계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 이렇듯, 작은 규모로서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이 구의동 유적이 보루성의 최전방 경계초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욱 확실한 근거를 얻기위해 구의동 유적과 같은 높이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한강의 수심 10미터에, 구의유적의 높이 20미터를 더한 높이,
즉, 같 은 위치의 30층 아파트 옥상위에서 전망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아차산의 끝자락...높이가 이 아파트와 비슷. 한강 너머 백제쪽을 조망할수 있는 곳으로 경계초소로는 확실 한 위치.
구의동유적에는 또한, 경계를 할 수 있는 치가 있었다.
그 치가 향하는 곳을 보면 이 초소의 경계임무를 더욱 확실하게 알수있을 것이다.
치가 향하는 곳은 정확히 백제의 토성들이었다
< 윤덕향INT> 구의동 유적의 성격을 생활을 겸한 빈 전장으로 생각했지만,
이번에 보루성 나오면서 구의유적 성격 보다 명확해짐.
보루성 유적이 조사가 되면서 구의동 유적은 보루성의 전방초소,
전방기지의 역할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
20년만에 구의동유적의 본래적인 성격이 더욱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5세기 중엽 한강변에는 고구려의 최말단 경계초소가 있었다
그 뒤 아차산에는 15개 중대급 보루성들이 맞은 편 백제와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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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구의동, 제4보루성 영상복원
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 려의 군사들은,
3만 기병, 5만 보병식으로 씌여져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해, 전투에 나섰던 총 병력 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어떤 세부 단위와 어떤 조직으로 나뉘어져 있었는지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병사들이 어떻게 생활이라든가 막사의 생김새, 나름대로의 규율등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발견된 유적들을 통해 바로 그런 의문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유적의 영상복원을 통해, 고구려군이 어 떻게 생활하고 주둔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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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구의 유적복원
영상복원을 위해 유적을 발굴한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함께 유적의 자료를 정리
유물의 분석 자료와 성벽의 축성방법 유물개개의 재질을 종합분석해
한달여 후 유적의 기본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구이동 유적의 경우 직경 14.8미터의 원형에, 큰 할석들을 차례로 쌓인다.
그리고 그위에는 작은 할석을 예닐 곱단, 그위로 다시 천석을 쌓는다.
벽은 통나무를 가로세로로 세운 다음, 그사이의 틈새는 짚새를 섞은 흙으로 메운다.
서까래를 묶어 기본 틀을 만든 지붕은, 역시 짚을 섞은 흙으로 미장을 한 다음에 판자를 얹어서 완성시켰다. .
이것이 바로 1500년전 고구려군 분초 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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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유적 둘러보기
(MC )
자, 드디어 고구려군의 최전방초소가 완성되었습니 다.
약간 모양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 의 초소와도 꽤 비슷한 모습이군요.
과연 이, 천오 백년전의 초소 내무반은 현재와 얼마나 다른 모 습일까요.
한 번, 안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여기가 바로 1500년전, 고구려 최전방 소대의 내무 반 입니다.
그릇이나 무기, 철솥 등등이 모두 발 굴당시 위치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무기가 여러개 보이는데요....창이군요. 당시에 가장 흔하게 쓰였던 무기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소총정도 된다고 볼수있겠죠.
아, 이거, 날이 굉 장히 날카롭군요. 함부로 만졌다간 다치겠 습니다.
무기들은...모두 이쪽, 문가에 모아놨군요.
요새 군대도 개인화기는 문쪽에 모아 쌓아놓지 않습니까?
천 오 백 년전 고구려군도 똑같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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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를 비롯한 모든 생활은 초소안에서 이루어졌다
물은 초소중앙 저장고에 받아놓고 썼으며
남은 음식이나 폐수 등은 배수구에 배출했다
*농기구들 한켠에 농기구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들은 식량을 직접 자급자족으로 생산했다는 것도 알수가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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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서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수 있어도, 경계에서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없다
요즘이나 옛날이나 경계임무는 항상 중요하게 여 겨졌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 보초를 한 번 서보실까요.
이곳이 바로 고구려군이 보초를 섰던 자리입니다.
모양을 보니까....보루성의 치와 거의 똑같이 생겼군요.
규모만 약간 작다 싶을 뿐이지, 규모나 역할은 어디의 치나 다 비슷합니다.
이곳에서도, 평상시에는 보초를 서면서 적들을 경계 했었고,
전투할때는 올라오는 적들을 효과적으로 막았었겠지요.
이렇게 당시 고구려군사들은 이곳에서 백제 군사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지켜보면서 견제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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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2-1 : 제4보루성 영상복원
구의동과 달리 보루성은 벽에 통나무 대신 돌과 점토를 이용했다
그 위에 지붕을 얹져 맞배지붕을 올렸고
주변에는 화강암석재를 쌓아 건물들을 보호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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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보루성 둘러보기
여기가 고구려군의 중대급막사입니다.
제가 서있는 곳은 역시, 치인데요,
아까보았던 구의동 초소보단 훨씬 규모가 크죠?
저 안은 또 얼 마나 넓을지, 한 번, 들어가보시죠.
7개 건물중 가장 큰 이곳에는
온돌 중심으로 나누어진 15평 남짓한 방 세칸이 보인다
벽 대신 칸막이를 설치해 쉽게 넘나들수 있는 등 번거로움을 없앴다
중앙동 북쪽에는 넓은 공간이 보인다
이곳의 병사들은 전방까지 내려온 최정예
별도의 훈련이 필요없는 그들이지만 정신무장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곳은 정훈교육장인 셈이다
지휘부는 중앙동 바로옆,
지휘부 전용의 부속실입니다.
이곳에 지휘관들은 별도의 귀중품 이나 식량들을 따로 보관해 놓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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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성 내부
저는 지금 보루성 여러방중의 한 곳에 와있습니다.
이방에는 특히 토기들이 많이 모여있는데요,
이것은 완이고 이것은 사발입니다.
이방에 특히 토기들이 많은 것을 보니까,
이곳은 아마도 취사반이었던 것 같군요.
뒤에 뭔가 씌여져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글씨같 은데....
토기마다 글씨가 다 다르군요. 저쪽도 한번 볼까요?
보십시오, 이것도 글씨가 각각 다르게 씌여져 있는데요. ...그렇죠?
이게 뭘까요? 얼핏 보면 사람 이름같기도 하고.......
군대 갔다오신 분들, 혹시 각 나십니까?
각자 자기 식판이 정해져 있었고, 또 그뒤에는 자기 이름을 커다랗게 써놓았었지요.
그리고, 고참이 되면서 부터는 부하를 시켜 배식을 받고,
씻은 다음 한곳에 보관하게 했었 경험도 있으실 거구요.
1500년전 고구려군에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군 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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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5세기 중반,
한강 하류에서 백제와 대치하던 고구려군은,
한강변에 분초소를 배치 1차방어선으로 삼고,
아차산 일대에는 15개의 중대를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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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까 보루성에서 가져온 토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시, 뒤에 뭔가가 씌여져 있군요. (토기 내려다보고)
'후부 도'...후부의 누군가가 썼다는 뜻인데, 이름부분 은 현재, 깨어지고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부는 무 슨 뜻일까요?
이 지도를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지도입니다.
고구려는 평양을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눠놓았었는데요,
귀족들은 주로 이곳, 왕이 있는 안학궁에 모여 살았습니다.
이 안학궁이 있는 지역의 지명이 바로 이 '후부'입니다.
다시말해, 이 그릇의 임자는 귀족이었고, 그는 아 마도 이곳을 통솔하는 지휘관급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휘관을 중심으로 싸웠던 아차 산 일대의 고구려병사들은, 어떤 체계를 가지고 싸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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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무기로 알아보는 군인들의 역할
1500년전 고구려 군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말을 탄 기병과, 타지않은 보병.
기동성에서 차이가 나는 기병과 보병은 전투의 지형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 싸우게 됨.
<김성태INT> -
삼국시대 문헌기록 볼때는 2만, 3만이 아무 체계 안갖추고 싸운 것 같이 되있지만,
실질적 으로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고 벽화내용을 볼 경우,
상당히 군사조직 가지고 싸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전투방식은 보병과 기병이 합동전술을 펼치는 보기전을 하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보통 기병 경우에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정면에 나서는 것 보다는
측면에서 상대편 전투 대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고,
보병 경우에는 그와는 달리 실질적으로 창을 들고가서, 실제 역할은 보병들이 했던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 다.
안악3호분
기록에 나타나는 기병과 보병들.....
그들을 실제 눈으 로 확인하는 것은 벽화를 통해서이다.
안악 3호분을 한번 보자.
오랜 세월 낡고 허름해진 안악3호분의 벽화, 이를 영상복원을 통해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려 보면.....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분은 고구려의 벽화속 기병과 보병
벼슬아치를 호위하는 행렬도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의장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기병과 보병이 나름대로의 조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즉, 의장행렬에 규칙이 있듯 실제 전투에서도 이들은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들인 창, 칼, 화살 등...익히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
그러나 낯선 것이 눈에 띈다. 보병들이 지니고 있는 도끼다.
< 이인철 INT> -
도끼는, 안악 3호분에 보면, 행진 하는 병사 모습 있다.
약수고분에도 있고.
기록상으로 는 삼국사기 눌체전에 보면, 백제와 싸울 때 백제병사 뒤로가서 도끼를 쳐죽였다는 기록있다.
도끼는 주로, 기병을 말에서 넘어뜨려서, 잘 안죽으로니까, 갑옷을 도끼로 쳐서 쳐죽이는 것이다.
고구려의 도끼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현재의 도 끼와 같은 모양인 전투용 도끼와, 가운데에 자루 구멍 을 뚫은 농기구용 도끼.
이 두가지 도끼들은 주조법에 서부터 그 차이를 보인다.
농기구용 도끼는 철을 두드려서 만드는, 단조철부의 방법을 통해서 만들게 된다.
오늘날 대장간 유적 부근 에서 많이 발견되는 단조철부는 농기구로 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날이 매우 많이 상해있기 마련이다.
반면 전투용 도끼는 끓는 쇠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조법을 사용함으로서 도끼의 강도를 훨씬 높였다.
때문에 이런 도끼들은 무기로서 주로 사용이 된다.
아차산 보루성과 구의동에서도 도끼등을 비롯한 무 기들은 많이 발견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기를 통해 주 둔했던 고구려군의 인원을 파악해볼수는 없을까.
최말 단 초소인 구의동의 주둔군 인원을 알수있다면, 우리 는 고구려군의 기본이 되는 최소 단위를 알아낼수 있 는 셈이다.
< 김성태 INT> - 고구려의 벽화고분이나 삼국사기의 기 록, 그리고 실제 발굴, 출토되는 철제무기들을 볼때,
한 병사가 하나의 무기 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칼이나, 활의 숫자로 당시 병사를 유추해볼수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한병사가 하나의 무기만을 들 수 있다면, 우리는 간단히 무기의 숫자를 셈으로서 인원을 추측해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출토무기들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면에서 구의동 유적은 행운이었다. 주둔군이 모두 몰살당한채 묻혀진, 패배한 유적이기 때문이다.
<김성태 INT> - 실제, 고고학 자료의 승리한 전투는 유물이 없다.
그러나 일정단위가 몰살당했다던지, 무기 두고 패각했을때는 유물이 그대로 잘 남아있고,
그런 유적이 여러군데 나온다면 그때의 병력, 전투형태등 귀중한 자료를 얻을수 있다.
구의동 유적의 유물들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발견되 었다.
즉, 기습받아 불탄후 흙속에 묻혀져 버린 까닭 에, 마치 아이스박스에 냉동된 듯 몰살당시의 모습 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구의 유적의 무기를 통해 당시 구의동 초소에 주둔했던 군 인들의 인원을 추측해볼수가 있다.
구의동에서 발견된 무기들은 화살, 창, 칼, 도끼의 네종류. 하나하나 살펴보면....
가장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3000여개의 화살촉.
그러나 화살촉은 소모품임. 제외함.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이 대도.
즉, 이곳 구의초소엔 지휘관 두명이 주둔했었음.
그러나 대도역시 지휘관임을 증명하는 상징성이 강한 보조무기. 제외함.
다음으로 많이 나온 것은 창촉.
창은 1인 1무기 소지원칙, 즉 주무기에 속할수 있음.
즉, 구의유적에는 최소 창수 8명이상이 주둔했었음.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이 네 개의 도끼.
부월수, 즉 도끼를 든 군사가 네명 있었음 알 수 있다.
즉, 지금까지를 토대로 구의동초소의 인원수와 역할 을 각각 추측해보면....
창수 8명, 부월수 4명. 모두 12명의 군인들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김성태 INT> -
구의동에서 철제병기가 칼이 두점, 창이 8점, 도끼가 4 점 나왔다.
거기서 기본적으로 창 여덟점 나와서 8명 의 병졸은 확실시된다.
두 번째로 칼이 두점있는데, 칼 은 대체로 장교급, 지휘관급이 쓰는 것으로 봐서,
지금 군대로 따지면 하사관급의 장교가 한명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도끼 네점 나오고, 상황으로 볼 때 구의동에는 10명에서 12명의 군사가 있었던 것 같고,
아마도 지금 그 군대의 분대원이 10명인 것으로 봐서 그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구의동보다 윗단위인, 아차산의 보루성도 같은 방법으로 인원을 추측해볼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보루성의 경우에는 무기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다.
즉, 몰살당한 유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로 인원을 알 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말단 부대원의 수를 알아낸 만큼 대략의 추측은 가능해진다.
일단, 방이 8개 있는 것으로 볼 때, 구의동초소와 같은 인원이 방하나당 1셋트씩 나누어 거주했을것으로 예상.
모두 합하면 96명. 그러나, 온돌이 두 개있는 방 도 있는 것으로 볼 때 백명은 훨씬 넘었을 듯.
그렇다면 이들 각각의 역할은 어땠을까.
아직 우리는, 이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갖고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곳 보루성은 구의동보다 상급부대인만큼 병종 또한
보다 복잡하고 다양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충분히 예상할수 있음.
그 다양한 병종중의 하나를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것(등자). 구의유적에서는 없었던 것.
등자
<김성태 INT> -
유적지에서 등자가 출토된 것은, 말타 고 싸우는 기병이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병도 아마 중무장한 기병이어던 것으로 유추할수 있 다.
왜냐면, 등자는 말 올라타기위한것뿐만이 아니라,
실제 말타고 전투를 할 때 몸의 균형을 잡고, 전후좌 우로 몸을 움직이기 편한 받침대 역할을 하기 때문.
출토된 등자
이 등자는 기병이 말위에서 발을 걸치고 자유자재로 활을 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등자 발명 전에는 기병이 말갈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말위에서 적들과 싸울수가 없었음.
5세기 이후, 등자가 발명되면서 고구려의 기병들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됨.
보루성 기병의 성격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음.
투구위에 달린, 엎어놓은 접시 모양의 복발.
즉, 보루성의 기병들은 투구를 썼었다는 말. 투구를 썼으면 갑옷도 입었을 것.
즉, 보루성의 기병은 중무장 기병임.
이들 중무장 기병들은 고구려군의 핵심역할. 5세기 중엽, 동아시아 최강 군대로 불리웠던 고구려군의 주 력부대였음.
<김성태 INT> -
고구려의 광개토왕때 고구려군대가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
그 요인은 여러 가지 있지만, 첫 번째로 보기합 동전이 효과적.
기동성있고 산악전 익숙한 기병과 뒷 받침되는 발빠른 보병때문.
그리고 당시의 기병들이 중무장 기병.
지금으로 말하면 기갑부대가 떼로 몰려 가서 돌파력을 가지고 상대진영을 무너뜨리는 그런 전투를 했다.
지금으로 보면 땡크부대겠지.
하나의 쇳덩어리가 되서 밀어부치는.
즉, 중장기병은 고구려군의 돌격대역할.
동아시아 최강 군대였던 고구려군의 승리의 견인차였음.
다시말해, 투구나 등자등이 나왔다는 것은, 고구려의 최정예군인 중장기병이 이곳 보루성에 주둔했었다는 증거.
다음으로 눈여겨볼것이 월형부.
초승달모양의 도끼인 이 월형부는, 중국에서 사오정이 들고다녔던 무기이기도.
그러나 발굴은 이번이 최초.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출토된 적이 없는 최초의 유물.
형태로 보아 지휘관의 상징임. 즉, 고구려군 도끼부대의 대장급이 소유했을것으로 예상됨.
즉, 보루성에는 최정예인 중장기병과 도끼부대가 주둔했었음.
막강한 전력.그 외에도 몇가지를 더 예상해보면.....
<김성태 INT> - 출토유물을 볼 때, 일단 등자가 있다 는게 중요. 등자는 말타는 지휘관, 기병 있었다는 것.
즉, 기병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고, 대장간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병기들을 수리, 간단히 만들어서 지원해주는,
지금으로 말하면 공병과 같은 군사들도 있지 않았나 생각.
그리고 유물은 없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쇠뇌병, 투석병 등등등...
전체적으로 다양한 병종 있었고, 그외 주둔했던 군대가, 하급부대를 지휘, 통제했던게 아닌가 생각됨.
즉, 한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구려군의 말단 초소는 최소12명 이상을 기본으로 지휘관과 창수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중대급인 보루성에는 기본단위인 보병외에중무장 기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종들이 백여명 이상 배 치되었을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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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
이제까지 우리는 한강을 사이에둔 고구려군과 백제 의 팽팽한 대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 삼국의 역학관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오백년전,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등,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기반을 둔 동맹관계를 펼쳐왔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손을 잡았다고 놓고, 다시 합치기를 반복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삼국의 역학관계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졌 던 것이, 바로 이 시기, 보루성이 쌓아졌던 5세기 중엽 이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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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 삼국의 형세
고구려의 고국원왕 전사후, 예성강 유역에서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고구려는,
5세기에 접어들면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하게 된다.
고구려의 남하, 이는 바로 신라의 변신에 힘입은바 도 컸다.
당시 삼국중 가장 약했던 신라의 선택은 딱 한가지, 강한편에 서는 것 뿐이었다.
즉 신라는 고구려의 힘이 강성해지자, 백제와 형제관계를 맺고 있던 이제가지의 태도를 바꿔,
백제에서 고구려편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꿨던 것이다.
<이도학INT> - 고구려의 힘이 강력해지자, 신라는 고구려 편으로 붙었다.
삼국사기 -
백제에서 고구려의 편으로 돌아선 신라.
신라는 왕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강성한 고구려의 우산속으로 숨어들어간다.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이사금/ 37년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 지도<2> -
신라에 배신을 당한후 홀로남은 백제, 그또한 또다 른 자기편을 찾아야 했다.
백제와 연합한 것은 가야와 왜. 즉, 이시기 삼국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가야, 왜 와 손을 잡은 백제로 양분되어진다.
신라에 대해 뼈아픈 배신감을 느낀 백제는 새로운 연합군은 가야, 왜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신라에게는 이미 고구려라는 강력한 원군 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가장 강력했던 시절, 광개토왕때의 일이었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왔다.
그 사신은 태왕에게 그들의 국내엔 왜인이 가득찼으며, 선지도 모독 파괴당했으며,
태왕의 신하인 신라왕은 천민으로 변해서 신라왕은 태왕께 귀의하여 대왕의 지시를 들기 권했다.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원군으로 도착한 고구려군은 신라에 쳐들어온 백제 군을 퇴각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승리후, 그들 고구려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신라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들 고구려군은 계속 신라영토에 주둔했 던 것이다.
그 증거가 남아있는 것이 충주에 있는 중 원고구려비이다.
- 비문에 글씨-'신라토내당주'
< 공석구INT> 신라토내 당주가 무슨 말인가?
이거는 그, 일찍이 고구려 광개토왕 이 경주를 점령한 왜군을 쫒아내고,
그들을 쫒아 가야 지역에까지 갔다 돌아오게 돼죠.
이후에, 군대를 철수 하게 되죠. 근데, 완전히 철수한게 아니라
경주 부근에 일부 주둔군은 두게 됩니다.
오늘날 미8군같은 경우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군사를 주둔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고구려의 야심은 급기야,
신라에 내정간섭까지 행하게 된다. 고구려 스스로 신라왕을 선택하고 맞지않는 왕은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공성구INT> - 당시 신라에는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 돌아온 실성왕이 있었는데,
그의 강력한 라이벌로 눌지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결국 고구려는 실성왕과 눌지중에 눌지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기 위해서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앉히게 합니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계승문제까지 간섭을 하는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선택한 눌지는, 그러나 고구려의 생각보다 훨씬 영특했다.
신라를 장악하고자하는 고구려의 속셈 을 꿰뚫어본 눌지왕은 고구려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주 화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고,
이 결과물은 433년, 나제 동맹으로 나타난다.
즉, 신라는 표면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력아래 있으면서, 속으로는 백제와 다시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던중, 고구려와 신라사이를 급속히 냉각시키는 사건이 터진다.
신라영토인 실직, 오늘날로 말하면 강릉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장수 한명이 신라의 성주에게 살해를 당한 것이다.
<공석구INT> -
신라는 고구려로부터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중 하나로서 실직성에 나온 고구려장수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심기가 당 연히 불편하게 됩니다.
그러자 신라는 고구려에 사과 를 하게 되죠.
그러나 이러한 사과는 표면적인 것이었 을 뿐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0여년 후에,
오히려 신라에서는 경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군 백여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이미 아차산의 보루성에 대규모 군사 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백제와 신라, 양쪽에 적을 맞은 고구려의 고민은 컸다.
한강 맞은편의 백제, 그리고 급 속한 반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신라....
여기에 더욱 고구려의 분노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한다.
백제가 북위에 보낸 한 장의 국서, 코앞까지 내려온 고구려를 두려워한 백제는,
북위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선동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와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 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신 생각 이 먼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 리나라를 구해주소서.
그러나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고 만다. 당시 고구려의 힘은 북위도 두려워할만큼 강성했던 것이다.
<공석구INT> -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에 북위로서는 이러한 백제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는 그당시 북방민족과 손을 잡고, 북쪽에서 북위를 압박해내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힘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사례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북위라는 나라의 수도인 북경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사절들이 파견되어 오는데 이때 고구려의 사절이 받았던 대우는 랭킹 2위였다고 합니다.
그 첫재는 나머지 중 국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남제라는 나라이지요.
이렇 게 볼 때 북위로서는 이러한 백제의 요청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입니다.
몽촌토성으로 - 북위가 거절한 국서는 대신, 고구려의 귀에 들어간다.
분노한 고구려는 드디어 한강을 넘어 백제를 쳐들어가고,
백제왕인 개로왕을 죽임으로서 증조부의 죽음 에 대한 앙갚음을 하게 된다.
엄청난 패배를 겪은 백 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는것도 바로 이때이다.
고구려라는 강력한 적을 맞은 백제와 신라, 선택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이름뿐이었던 나제동맹을 군사동 맹으로 더욱 강력히 발전시키는 것이다.
< 공석구INT>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깊숙이 들어가 영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제동맹이 힘을 발휘하게 되면서 삼국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들게 됩니다.
이후 고구려와 나제 동맹군은 일진일퇴 의 공방전을 되풀이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한때의 국경선은 한강유역이었을때도 있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한강유역 에 행차하는 기사가 자주 나오고 있거든요.
이렇게 볼 때 고구려의 최전방 국경선이 한강일대의 아차산일대 가 아닐까, 이렇게 사료됩니다.
이후, 고구려군과 나제연합군은 70여년간이나 힘겨 운 공방전을 되풀이한다.
사정은 보루성이 세워진 아 차산의 한강유역도 마찬가지였다.
백제와 계속 대치하 고 있었던 한강유역의 고구려군인들은
백제와 두어번의 싸움을 주고 받으면서 팽팽한 대치를 이어갔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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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브릿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렇듯, 팽팽한 대치관계를 70 여년간이나 이어옵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언 젠가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평양천도이후, 이곳 구의동 초소와 보루성들은 백제를 치기위한 전진기지로 세워졌었습니다.
그러나 백여년 뒤, 힘의 균형이 깨어진 후, 강력 한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가 밀고올라오면서,
이곳 기지는 다시 수비에 급급한 방어기지로 변 하게 됩니다.
551년 어느날 밤,
이곳 구의동 초소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 구의동초소는 토기나 무기들이 이곳저곳에 그대로, 널려있는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온돌에 철솥까지 그대로 걸려있는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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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 551년
어스름의 구의초소. 보초서고있는 고구려병사 실루엣.
날라간 불화살들, 초소 지붕에 불 붙고. 함성
초소안, 쓰러지는 창들, 깨지는 그릇등 이미지
어둠속 부딪히는 창들...격렬한 전투....
비명, 불꽃, 연기등등....활활타는 구의동 초소 외경......
초소안, 불꽃과 연기가 자욱한 속에 아직도 김 모락모락 내면서 걸려있는 철솥......
활활 불타는 구의동 초소.......
초소 천천히 빠지면서 3D로....아차산 일대, 불타는 보루성들.....최후......
고구려의 중대 제4보루성은
얼마전 보존을 위해 다시 흙에 덮혀졌다.
700년 고구려의 역사도, 이곳에 주둔한 고구려군도
같이 역사속으로 묻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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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 엔딩
5세기 중엽, 고구려군은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는 그동안, 어디에 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두달전, 이 유물들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말 입니다.
(발복 들어보이며)
...이 낡은 발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군은 중대, 소대단위의 체 계적인 편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중장기병을 비롯 한 화려한 전술로 최대의 영토를 누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천오백년전, 우리의 고구려 군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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