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동영상◈/◐시사♡교양◑

♣학자의 고향 : 명재상의조건 -방촌황희2부-♣

파라클레토스 2011. 4. 3. 19:45

 

♣학자의 고향

♣명재상의조건 -방촌황희2부- ♣

 

 

방촌황희(厖村黃喜)(1363~1452)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도 수십가지 이어져 내려온다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냐? 는 질문에 소가 들을 까봐 귓속말로 대답을 해주는

농부의 일화, 황희는 이러한 소소한 일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김낙효(문학박사)-

농부의 이 한마디를  평생에 생활근본으로 삼았습니다

 

박현모 연구실장(한국학중앙연구원)-

황희는 한국인들이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정승이거든요

우리를 늘 돌아보고,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우리를 돌아보는 그런 정승이었습니다

 

정승24년, 영의정 18년을 지낸 명재상

황희는 세종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끌어 냈다

24년간 정승을,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조선의 명재상이 된 방촌황희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황희의 인품이었다

 

 

'호산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문경에 황희의 흔적이 있다

한적한 시골마을, 도로옆에 자리잡은 아담한 촌각

이곳에서 그의 후손이 술을 빚으며 산다

 

낡은기와, 페인트로 칠한 벽, 멋내지 않은 시골집에서 술이 익는다

 

 

황규욱(장수황씨 시정공파22대종손)

서예가로 살며 한번씩 술을 담그는 이 사람

황희 둘째아들의 후손이다

선조들은 수백년간 술을 빚으면 문경에서 살아왔다

황규욱씨도 선조가 물려준 비법을 가보로 삼았다

 

이 술이 수백년간 우리종가에서 전승되어 왔기때문에,

또 선조들이 제사일이나 생신일에 항상 제삿술로 사용해 왔습니다.

(술을)담그던 비법이 전수되어서 오늘날까지 온 거니까,

아주 생명력이 긴 술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종택이있다

잠시 살피러 가는길 외출이라 할 것도 없다

 

황규욱(장수황씨 시정공파22대손)

저희 집에서 종택까지 1분 이내의 거리에 있습니다

종택은 제가 어린시절 나고 자랐던 집인데

지금은 잘 정비해서 시민들에게 고택 체험 공간으로 제공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경장수황씨종택

종택에는 한때 류성룡을 비롯한 선비들도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학하며 학문을 닦았을 것이다

'ㄷ' 자로 지어진 종택은 문경 양반가옥으로써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후손들과 지방유림들은 황희의 문경종택에서

황희의 탄신일인 음력 2월10일에 매년 제를 올린다

종택의 역사만큼 오래됐을 것이다

 

 

황규욱(장수황씨사정공파22대종손)

이집은 방촌황희의 증손자 중 한분인 사정공 황정이 자리를 잡으신 뒤

대대로 내려오는 사정공의 종택입니다

저희 집안이 여기에서 산것은 500년이 넘었죠

 

숙청사(肅淸祠)

이 집에는 방촌사당을 모시고 있는 숙청사와

 

숭모각(崇慕閣)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숭모각

 

그리고 사랑채 안채 대문채 이렇게 구성이 돼 있습니다

 

마을사람들도 특별한 절기가 되면 이곳에 모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종택에 모여 당산제를 올리곤 했다

마을과 가족의 평안을 빌 장소로 사람들은 장수황씨의 종택을 택했다

 

문경 장수황씨종택의 탱자나무

그 신령한 중심에는 400년된 탱자나무가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인 탱자나무는 두그루가 동서의 방향에서 함께 자라고 있다

아직도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이 집이 지어졌을 당시 함께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탱자나무는 수백년간 전해저 내려오는 황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과 함게 나이를 먹었다

 

숙청사(肅淸祠)

후손들은 황희를 더 세세히 기억하고자 영당을 짖고 선조를 모셨다

숙청사 황희의 맑은 정신과 마음에 엄숙하게 경의를 표하는 공간

 

이 숙청사에 황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꾸밈이 없는 작은 공간에  황희의 모습이 영정으로 남아있다

어진 인품으로 귀감이 되었던 황희는 후손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고있다

하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정승으로 이름이 높아진 만큼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황규욱(장수황 사정공파22대종손)

방촌선조의 영정은, 아주 오래된 영정이 있었는데, 30여년 전에 도난을 당하고

상주 옥동서원에 있던 영정을 모사해서 새로 모셔놓은 영정입니다

 

숭모각 황희정승의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다

 

황희의 직접 손길이 닿았던 유물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외로 많지가 않다. 채10점이 되지 않는 유물들..

 

이것은 정1품이 입궐할때 쓰던 서각대(관대)입니다

물소뿔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서각대구요

 

이것은 갓근입니다

산호로 된 갓끈이고요

 

이것은 옥으로 된 서진입니다

홍문관에 계실 때 쓰시던 서진이에요

 

옥연(벼루)

이것은 세종대왕이 하사한 벼루입니다

일명 '옥연' '무수연' 이라고 하거든요

'물없이 사용하는 벼루다' 이런 뜻입니다

 

이 문서는 방촌 황희가 사용하던 유물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문서입니다

 

상국(上國)이라는 말은 영의정을 지내신 방촌 황희를 뜻하는데,

상국께서 사용하시던  물건을 자손대대로 잘 유지, 보존하라는 당부의 말씀이 있고

마기막에는 입향 선조인 사정공 황정의 수결이 있습니다

요즘말하면 싸인이죠

 

방촌 황희 유물(지방문화재 제123호)

유물은 옛 이야기를 말한다

세종대왕의 총애가 벼루에 깃들어있고,

평생동안 정사를 돌보왔던 흔적이 서각대에 묻어있다

춘추관과 홍문관에 재직하던 시절 사용하던 옥서진(문진)도 그

모양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급제 후 중서성에 있었을 때 사용하던 갓끈도 훼손되지 않았다

60여년 조선정치에 몸 담았던 황희

그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모습은 청백리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희가 영의정이었을 때 세종이 미복차림으로 황희의 집을 불시에 찾았다

그의 밥상에는 보리밥과 푸성귀와 된장이 놓여있었고

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황희의 사정을 보고 세종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엔 좋겠다"며

너털웃음을 짖고 돌아갔다고 한다

 

청빈과 관련된 또 하나 일화가 궁안에서도 있었다

 

어느 겨울밤 세종이 황희를 급하게 찾았다

그런데 황희의 관복이 이상했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희의 관복안에 값비싼 양털이 보인 것이다

세종은 황희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오해가 있었다

마침 그날 황희의 아내가 한벌 뿐이던 관복 안에 솜을 뜯어 빨아놓았던 것이다

세종의 부름을 받은 황희는 속옷 위로 솜뭉치를 동여매고

관복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세종은 황희에게 미안해 했다고 한다

 

김낙효문학박사-

정승에 20년 이상 봉직한 황희가 평생을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명재상으로서의 황희의 업적도 돋보이지만, 검소하고 청빈한 삶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옥동서원(玉洞書院)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황희의 덕행을 추모하는 곳 경상북도 상주의 옥동서원

옥동이라는 이름은 정조로 부터 하사받았다

 

1789년(정조13) 나라로부터 사액서원으로 인정받았을 때다

 

옥동서원은 유림의 화합과 교육의 장소로 서원의 맥을 이었다

전국의 서원이 문을 닫다 시피 했던 시기에도 살아남아 황희를 기렸다

 

흥선대원군(1820~1898)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던 시기,

600여개의 서원이 사라지거나 통폐합 됐다

 

김낙효문학박사-

서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학기관이잔아요,

흥선대원군 시절에 여러가지 서원이 페단이 있으니까, 많은 서원이 철폐를 당했죠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이나 그중에 옥동서원도 남게 되었는데,

황희정승의 청렴결백하고 관용적인 그러한 삶이,

또 백성들을 위해줬던 위민사상이 계속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아마 옥동서원을 존속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등이 남아있다

유림이 회합하고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옥동서원 

후손들은 때때로 모여 황희의 덕행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일년에 두번 제를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옥동서원에는 황희의 특별한 유물이 간직되어 있기도 하다

 

황학연(장수황씨 소윤공파 19대손)

이것은 <방촌선생실기>목판입니다

이렇게 벽장에 쌓아 놓고 있어요

한군데 모아놓지 못하고, 200여 점 되는데 마루밑에 둘 수는 없어서

각 방의 벽장에 이렇게 조금씩 보관해 놓고 있습니다

 

황학연(장수황씨 소윤공파 19대 후손)-

목판  한장만 구경을  시켜드릴께요

<방촌설생실기>는 방촌황희의 기록입니다

목판이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옥동서원에서 목판을 제작했을 것이고,

여기(상주)의 후손들이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방촌선생실기 권지일(厖村先生實記券之一)이라고 되어있어요 

 

방촌선생실기(厖村先生實記)-방촌황희가 쓴글과 방촌희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목판

방촌선생실기

황희의 면모가 자세히 기록된 책으로 조선초기의 정치, 사회, 경제정책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경덕사(敬德祠)

옥동서원에 세워져 있는 경덕사

황희를 중심의로 좌우에 황효헌, 황맹헌,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옥동서원은 황희 후손인 황맹헌과 황효원등이 공부를 하던 글방이 효시였다

선조 황희의 영정을 이곳에 모시기로 하며 옥동서원의 모태가 됐다

 

나라의 큰 재상이기 이전에 집안의 큰어른으로 대대로 존경받아온 황희

후손들은 황희의 일생을 보며 얻는 깨닳음이 깊다

 

황의훈(장수황씨 소윤공파18대 후손)

'뭔가 청렴결백하게 잘 살아라'

'많이 누리지 말고 인간답게 살아라' 그 어른의 가훈과 유훈에 따라서

제대로 가진 것은 없지만 본분에 의해서 살고 있습니다.

 

백옥정(白玉亭)

옥동서원에서 이어진 작은길을 10분정도 따라 오르면 백옥정이 나타난다

 

상주의 여러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

 

백옥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은 황희가 주는 교훈을 잊지않기 위해서

특별한 이름들이 부처졌다고 한다

황간재를 넘어오면 오도(吾道)라는 마을이 있고,

좀더 내려오면 일관(一貫)

 

동산(東山)

 

신덕(新悳)

이걸 합해서 수봉리라고 그러죠

 

황학연(장수황씨 소윤공파19대 후손)

방촌황희의 둘째 아들이 낙향을 해서

자식들이나 후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업의) 목표설정을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오도'라든지 '일관' 이라든지 이름을 붙인것이고

특히 '신덕'은 새로운 덕을 쌓으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주기위해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옥동서원이 자리한 수봉리는 장수황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이름은 후진양성을 위해 부처진 것으로 옥동서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황희는 또 어떤 의미와 흔적을 남겨 놓았을까

 

방촌선조유묵-방촌황희의 친필 시를 제본해 놓은 것

 

후손 황학연씨의 댁을 찾았다

그가 보여주려고 할 유물은 손이 잘 타지 않는 집안 깊은 곳에 보관 돼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황학연(장수황씨 소윤공파19대 후손)-

여기는 방촌선조유묵이라고 적혀있습니다

 

600여년전 황희의 생각과 마음을 옮겨 담은 책

황희의 친필이다. 후손들은 황희의 글을 읽으며,

선조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겨보고자 했다

 

황의훈(장수황씨소윤공파18대후손)-

이 어른이 중국 가셔가지고 쓴글입니다

 

청산임황하하유장안도(靑山臨黃河下有長安道)

청산은 황하에 임하였는데 그곳에 다다르니

그 아래 장안으로 가는 길이있네

 

세상명리인상봉부지노(世上名利人相逢不知老)

세상 사람들이 명리만을 쫓으니 서로 만나도

어른을 몰라보는 구나

 

황학연(장수황씨 소윤공파19대 후손)-

그러니까 세상이 옳은 이상사회가 되고

윤리와 도덕이 가득차야 하는데,

너무 이익만 바라는 사회가 예나 지금이난 있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이 시를 해석을 해봅니다

 

이글은 여전히 현대 교훈으로 살아있다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세월이 흐른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황희의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강원도 삼척시

설산아래 바다는 봄을 맞고 있다

강원도 삼척에도 바람결에 슬슬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따듯한 햇살을 품기 시작한 바닷가, 이미 항구에는 생명력이 가득 차 있다

 

지금은 생기가 넘치지만 한때 강원도는 가장 척박했던 땅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살리기 위해 황희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을 했었다

 

강원도로 가는 길, 한양에서 시작해 경기도 동부를 거처,

강원도를 이어주던 조선시대 간선도로,

그중 삼척 구간 60리는 황희정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던 옛길이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황희정승을 만나는 길이라 불리는 이곳

 

600년전 황희는 동해바다의 절경보다는

굶주림에 힘겨워 하는 백성들이 걱정이었을 것이다

 

1423년(세종5) 강원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흙을 캐어먹었다

 

박현모현구실장-

지금 가봐도 강원도는 수려한 곳인데,

황희 말을 보면 수려하고 아름다운데 먹을 것은 없는 그런 지역이라고 돼 있어요

황희가 가게 된것은 그 상황에서 더 심한 기근의 상황에 가는거죠

실록을 보면 강원도 인구의 27% 가량이 고향을 떠나고,

빌어먹으로 다니는 상황이었고

농토의 58% 가량이 황폐화돼서 추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 전에 세종이 가장 유능하다고 믿었던 이명덕(李明德)이란 사람을

관찰사로 보냈는데 실패하고 돌아와요.

두번째 누구를 보낼 것인가 고민하다가 황희를 보내죠

 

황희는 구호곡식을 급송해 15만4500석의 곡식을 마련한다

그리고 규휼식량을 나눠주는데, 남다른 원칙을 세운다

배분하는 역할을 아전이 아닌 승려들에게 맡긴 것이다

 

박현모현구실장-

황희가 보았더니 평안도 지역에서 어떤 아이가 하도 굶주려서 소에 얹혀서 왔어요

근데 그 담당하던 아전이 너는 우리구역이 아니라고 다른데로 내려보냈어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은 거지요

당장 죽게 생겼는데 우리 관할이 아니라고 돌려보냈단 말이에요

아전한테 맡기면 자기의 권역을 따지고, 평소 친하고 안친한것을 따져 농간을 부린다,

요즘말로 보면 선심있는 승려가, 종교 단체사람 이거나,

시민단체 사람이라 생각을 해요

그런 사람에게 맡겼을 때 규휼의 배분에서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

이렇게 판단 했던 것 같아요

 

 백성들에게 곡식이 균등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황희는 또 다른 제도도 만들었다

구휼의 평가를 수령의 근무평점에 반영하고 부족할 경우 벌을 주는 상벌제도였다

강원도의 굶주림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민심이 안정되었음은 물론이다

 

소공대비(召公臺碑)-

황희가 흉년이라는 난제를 수습하기 위해 강원도 일대를 돌며

관찰사로 재직한 기간은 1년여, 백성들은 그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소공대를 지었다

 

황희가 쉬던 곳에 대를 만들고 소공대비 또한 새웠다

소공, 중국의 주 문왕때 선정을 베푼이의 이름이다

 

비명은 영세불망소공대비

황희에 대한 충성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칭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덕망이 소공과 비슷해 주린자를 배부르게 하고

추운자는 따뜻하게 했다

관동에 은혜가 남았고 사모하는 눈물을 대 밑에 흘렸다

이 글을 굳은 돌에 새겨 천년토록 알리리라

 

강문식 학예연구사-

황희선생 오셔서 극복을 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를 하고,

그러한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시  강원도 주민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것이고, 소공대의 모습같은 것들이 그러한 형태를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산양서원(山陽書院)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그 덕은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부터 400여년이 지난 1824년  사림은 황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소동사를 세웠다. 소동사는 산양서원이다

 

사후 400년 철종8년(1857)에 서원으로 승격되고,

다시 4년 뒤인 철종12년에 묘정비가 세워졌다

 

 

산양서원묘정비(山陽書院廟庭碑))

서원앞에 자리하고 있는 묘정비

황희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나 세워졌을 만큼

백성들은 황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황희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믿는다

 

민경남(산양서원장)

강원도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먹여 살렸잔아요,

곡식창고를 털어서, 조상들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잔아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잔아요, 그러니까 (황희선생이)고맙죠

그분 아이었으면 우리서원이 그분에게 제사지내는 것도

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서원에서는 3년전부터 황희정승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100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봉행을 한다

 

황희는 백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사람에게는 높고 낮음이 없고 백성은 하늘이 내려준 이들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있다

 

한때 황희의 집에서 부리는 노비중에 특히 영특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기특하게 여긴 황희는 그 아이를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돈을 주어 떠나보냈다.

서당에서 나는 소리를 곧 잘 따라 외웠던 아이,

떠난 아이의 소식은 그후 알 수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떠난지 10년이 되었을때

 

어느날 그 아이는 청년이 되어 장원급제를 해 황희를 만났다

선비가 황희에게 인사를 하며 어릴 때 이름을 대자

황희는 급히 선비의 말을 막고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벼슬길에 구애를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란 말만 전할 뿐이었다

 

황희의 주요한 역할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을 하는데요

한마디로 능력은 있지만 학벌이 약한 사람들, 문벌은 없지만 능력있는 사람들을

계속 추천을 합니다

장영실도 결정적인 순간에 황희가 추천을 합니다

장영실을 승진시키려고 하는데, 많은 신하들이 

천민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앉히려 하느냐 반대하자

황희가 얼마전에 평양의 관노출신 김이?제 라는 사람을 추천해서,

능력있으니까,  벼슬을 터 주지 않았느냐 장영실보다 더 귀한 사람인데

못할게 뭐 있느냐 , 추천을 해서, 세종이 발탁해서 등용하고

고위직으로 올리기도 하지요

 

황희는 신분에 메여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아버지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들도 양인인 아버지를

따르게 해달라 주장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들도 양인으로 하는

종두법을 따라야 합니다 -선조실록 中

 

또 황희의 집에서는 양반과 노비의 아이가 차별을 받지 않았다

노비의 아이들은 황희에게 올려진 밥상의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우기도 했고

황희가 작성하는 문서에 오줌을 싸기도 했다

심지어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했지만,

황희는 '허허정승' 답게 언제나 '허허' 웃을 뿐이었다

 

종 아이들하고 자기 아이들하고 손주들하고 뛰어노는데

종의 아이를  꾸짖으니까 왜 차별하느냐

천민(天民), 하늘천(天) 백성민(民) 하늘이 내린 백성이니 모두 귀하다

신분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반대를 합니다

 

황희는 옥중의 장기수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옥중 장기수들을 사면케 하거나, 법정형의 기준을 낮췄다

 

그것은 어떤 날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어느날 황희가 보니 쥐 두마리가 배를 옮겨가며 옮기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부인이 계집종을 다그치자,

종이 자신의 짓이라며 거짓자백을 했다

황희는 이일을 보고 형벌과 거짓으로 자백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감형과 사면을 추진한 것이다

 

강문식 학예연구사-

죄수들을 처벌하는 경우에도 죄사항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에

또는 그 죄에 대한 법률상의 적용이 애매한 경우에는 가능하면 가벼운

형벌로써 처리하도록 하는 그런 모습들이 강조되어 보이거든요

이런면들,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관대하게 대하는 모습들이

분명했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러한 것들이 일화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황희는 말년에 이를때 까지 관직을 떠나지 못했다

 

 

세종의 허락을 얻어 벼슬에서 물러난 때는

황희가 세상을 뜨기 겨우 3년전이었다

87까지 정사를 돌보다 90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황희는 4대왕을 모시며 60여년 세월을 백성을 위하고 스스로 실천하며

그렇게 살다갔다

 

존경에는 반드시 뒷바침 되는 사연이 있다

황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그를 바로보는 사람들이 얻은 깨달음으로 알 수있다

 

황두하 -

청백리 정승의 후손으로써 자부심을 느끼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하나의 생활지표로 삼고 있는점이

여러가지가 많습니니다. 청백한 사상이라든가,

남을 배려한다든가, 민본적인 사상이라든가,

이런것에 대해서는 항상 제가 후손으로써 이어받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정 익성공 방촌황희지묘(領議政 翼成公 厖村黃喜之墓)

계배 정경부인 청주양씨부(繼配貞敬夫人 淸州楊氏부 )

 

그의 마지막 말로 황희다웠다

 

내가 죽은 후에 장례를 치를 때는 

 

집안 형편과 분수에 맞게 치러야 하며

 

허례허식은 일체 행하지 말아라

 
홈페이지
http://www.kbs.co.kr/1tv/sisa/hak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