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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고향:한국의 세익스피어 -송강정철 1부-♣

파라클레토스 2011. 4. 4. 21:06

 

 

♣학자의 고향

♣한국의 세익스피어 송강정철1부 ♣

 

 

송강가사(宋江歌辭)

한국문학사의 거장 송강정철

주옥같은 한글가사로 송강은 조선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박영주교수(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우리말의 묘미와 말결,

(한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분입니다

 

이어령(고문학박사)

 

영국 문학의 세익스피어 처럼, 우리문학에 있어서

우리 언어를 아름답게 다듬어서 '문학어'로 만드신 분입니다 

 

송강정철[1536(중종31)~1593(선조26)] 

 

한글로 지어진 송강의 시는 우리말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청산별곡, 그리고 관동별곡

  

충정에 대한 뛰어난 상징과 자연에 대한 수려한 묘사로

송강의 시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시에 가려 시인의 삶은 그 만큼 드러나 있지 않다

송강은 어떻게 한글 가사의 대가가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녹녹치 않던 송강의 삶이 있다

 

송강의 삶을 통해 오늘 송강의 시를 깊게 만난다

 

 

 

전라남도 담양군

송강에게 평생에 고향같던 곳 담양

꼿꼿한 대나무가 선비들로 하여금 수많은 시를 짖게 했던 고장

빼어난  산수에 대한 창달로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했던 장소이다

이 푸른 빛이 아름다운 땅에 송강정철이 있었다 

 

 

송강정

담양시내로 부터 차로 10여분 송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425년전 정철은 이곳 송강정에서 시를 짖고 있었다

50대 초반의 송강이 담양으로 낙향해 시문에 열중하던 때

송강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시들이 태어났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사미인곡이다

 

 

평생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일로, 바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사미인곡 中

 

상징이 빼어난 싯구, 임금을 향한 것이다

 

이어령(교문학박사)

연군에 대한 정서와 한 여성이 남자를 사랑하는 정서

그 두가지 서로 다른 정서..

페러다임 시프트(인식의전환)라고 할 수 있죠

사랑과 연군의 경계영역을 넘나드는 특이한 장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업적을 문학사 위에 새긴 분입니다

 

속미인곡(續美人曲)

그리고 또 하나의 미인곡 속미인곡도 지어졌다

속미인곡은 특이하게도 두 여인이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다 

 

 

내 사정을 들어보렴 응석부리고 교태를 어지럽게 굴었는데

반기시는 낯빛이 어째서 예전과 다르신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소 - 속미인곡 中

 

 

이어령(국문학박사)

 

'반기시는 낯빛이 녜와 엇디 다르신고'

바로 그 말에서 모든걸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옛날과 달라진 사랑의균열, 묘한갈등, 인간의 변화

이런 것들을 한문으로 '안색'이라 합니다

 

'안색'이라는 한자어 대신 '낯빛'이라는 순 우리말 사용

 

우리나라 말 한자문화권 속에 선비들이

한문으로 시를 짖고 여러 문학을 해왔던 그런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문학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창조해 내신 분으로써 큰 업적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글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송강의 가사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 시작은 풍요로웠으나 그래서 더 어둠이 지텄다 

 

 

그의 어린시절은 어느 양반가 자제들과는 달랐다 

풍족하고 유복했다

 

정철은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며 왕자들과 어울려 놀았다

송강의 소꿉친구가 경원대군, 훗날의 명종이었다

집안이 왕실과 사돈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정일(문화사학자)

송강정철의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었고, 작은누나는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군의 부인이었었기 때문에, 궁궐을 정문으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그래서 명종과 어린시절을 소꼽친구로 보냈었는데.. 

             

         

 

7(세조)

(1417~1468) 

 

 

덕종

(의경세자)

(1438~1457)

 

월산대군

(1454~1488)

덕풍군

계림군

(정철의 작은매형)

9(성종)

(1457~1494)

10(연산군)

(1476~1506)

 

 

11(중종)

(1488~1544)

12(인종)

(1515~1545)

인성왕후박씨

숙의윤씨

귀인정씨

(정철의큰누이)

13(명종)

(1534~1567)

8(예종)

(1450~1469)

인성대군

 

제안대군

  

                               

             윤여필(尹汝弼)                    윤지임(尹之任)    

        ┌─────┴─────┐                  ┌─┴──┐

덕풍군부인    윤임    장경왕후 - 중종 - 문정왕후   윤원형 

 (현부인)                          ㅣ     ㅣ

                                인종   명종

                                               

 

추강에 밤이드니  - 월산대군

 

추강에(秋江)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우니 고기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빗만 싯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송강정철(당시10세)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숙청의 바람이  한양에 몰아첬다. 을사사화가 터진 것이다

송강의 일가도 무사하지 못 했다

매형 계림군은 역모죄로 처형당하고, 맏형은 매를 맞아 숨졌다

 

신정일(문화사학자)-

어린날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결국은 을사사화로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나서

형님도 죽고 매형도 죽고...

 

정철의 아버지는 유배형을 받았다

어린 송강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했을 것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을 10대의 정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무려 6년이었다

 

정위(정철의 조부)의 묘

그리고 16살이 되던 해 선조가 태어났고 아버지의 유배형은 사면됐다

유배지를 떠난 정철이 정착한 곳은 주부의 묘를 묘신 곳 담양이었다

 

정뇌택(송강정철 13대 후손)

할아버지 산소가 있기 때문에 이곳(담양)으로 온거에요

여기에서 쉽게 말하자면 인생이 바뀐 것이에요

그래서 '산소를 이곳에 모셔서 정승이 나왔다'라고 합니다 

 

담양은 정철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곳에서 정철은 인생과 학문과 그의 스승을 만났다

 

면앙정 송순(1493~1583)

정철의 한글가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이도 담양에서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바로 면앙정 송순이었다 

송순은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강호가도' 자연예찬을 노래했던 조선시가의 특징이다

 

박영주 교수-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와 송강이 지은 성산별곡, 구절구절 대비를 해보면

그 스승의 영향이 분명하게 들어나는 묘사표현, 형상화방식,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말 시가에 대한, 우리말에 대한 감각과 그 시가 작품화하는 그 점은

면앙정 송순선생한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굼기든 늘근 뇽이 선잠을 갓 깨야 머리를 안채시니 -면앙정가 中

물 아래 잠긴 뇽이 잠 깨야 니러날 듯 -성산별곡 中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압 너븐 들에 올올히 퍼진드시 -면앙정가 中

창계 흰 물결이 정자 압에 둘러서니 -성산별곡 中 

 

광주호(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우리 말의 맛을 살려지은 송강의 시가 있기까지 빼어난 경관이 일조했다

정철이 산책하며 노닐던 명소들은 지금 광주호 아래 잠들어있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남아있는 곳도 제법있다 

광주호 곁에 '송강정철 가사의 터'라 불리는 유적지가 있다

 

 

 

서하당

정철의 처외제당숙 김성원이 지은 정자. 김성원의 호를 딴 서하당이다

정철과 김성원은 각별한 사이였다

  

식영정

그리고 서하당 위쪽으로 또 하나의 루정이 있다

10대와 20대의 정철이 수 백번 오르내렸을 이길

정철의 발길을 따라오르면 식영정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식영정', '그림자가 쉬고있는 정자'란 뜻이다

정자 앞으로 광주호 상류인 창계천이 흐른다

정철은 식영정에서 문학의 지우들과 교류했다

 

식영정 사선 -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정철

당시 사람들은 정철과 김성원, 임억령과 고경명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다

 

 

송강정철 (1536~1593)

엄억령은 정철의 스승이었고, 고경명은 정철과 막역한 사이였다

 

 

서하당 김성원(1526~1597)

김성원은 정철보다 11살이 많았지만, 정철과 동문수학했다

 

식영정 사선은 성산의 경치좋은 곳 20곳을 택해

한사람당 20씩 총80수의 식영정20영을 지었다

식영정20영은 훗날 성산별곡의 바탕이 되는 시가 되었다

 

어떤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생 세간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좋게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 나가시지 않는 고 -성산별곡 中

  

성산별곡 시비

성산별곡이 지어진 시기는 송강의 나이 대략 26살때 쯤

지나가는 손님이 김성원에게 좋은 세상을 두고,

왜 산중에 있냐고 묻자

이에 대해 김성원이 대답하는 내용이 성산별곡이다 

 

천변(하늘가)의 뜬구름,

서석(무등산의 서석대)을 집을삼아

나오는 듯 들어가는 모습니다 주인과 어떠한고 

 

나오는 듯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고 

 

정구선(송강 정철16대 후손)

'주인 서하당 선생과 어떠한고' 하면서 비교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산별곡에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사계절의 경관을 잘 읊어놓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송강선생은 여기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작품들을 창작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시를 짖고 학문을 닦으며 담양에서 10년을 보낸 송강은

과거에 급제하며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한다

하지만 정철의 벼슬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당시는 붕당정치로 조정에 바람잘났 없던 16세기였다

 

당쟁이 본격화되자 송강은  결국 조정을 떠나고 만다

그가 낙향해 다시 찾은 곳이 담양이었다

 

박영주교수-

담양 창평에 낙향해 계실 때인데, 그때 이제 40대 초반에서 45되실 때 즈음이죠

그 전에 여러차례 벼슬을 제수받습니다. 전부 거절을 하십니다

45이 되던 1580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하니까, 받아 들이세요

그 안에 은거하고 계시다가 이때쯤이면 다시 나아가서 활동을 해도 되겠다.. 

 

강원감영(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정철이 다시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을 때에는 

처음 낙향했을때로부터 5년이 지난 1580년

강원도 관찰사 직무를 위해 원주감영에 도착했다

 

수 차례 관직을 사양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정철

그러던 송강이 강원도 관찰서 직에는 흔쾌히 응했다 

 

그 이유는 당시 그가 지은 시 내용만으로도 추측해 볼 수있다 

강원도 관찰사 시절에 지은 시는 바로 '관동별곡'

관동지방의 풍경을 우리말로 노래한 한글가사다

그  시작에 원주로 향하는 송강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담양)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 리의 관찰사를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관동별곡 中

 

신정일(문화사학자)-

그 당시 당쟁이 치열하니까, 일종의 벗어나고도 싶고, 그렇게 되면서

자연과 벗하면서 세상을 있기도 하고, 거기서 문학적 어떤 업적을 이루고자 하는

꿈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감원감사로 나가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금강산

관동별곡의 본격적인 출발은 금강산이다

해양?을 거처 금강산으로 들어가,

금강산(만폭동, 금강대, 진헐대,개심대,화룡소,불정대)

해금강(산영루,해금강으로)

관동8경(총석정,삼일포,의상대,경포호수,강릉, 죽서루,망양정)등

20곳의 공간이 고루고루 등장한다

 

삼일포

그리고 고성을 옆에두고 삼일포 선유당 영남호 만경대로 이어지고 있다

431년 전 송강은 강원도를 두로 유람하며 총 146행이나 되는

장문의 시를 관동별곡으로 남겼다

 

금강산의 다음 행보는 낙산사, 양양의 명소 의상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세울 때 지은 곳으로 알려져있다

바닷가 암벽 위에 지어져 동해가 시야가득하다

 

의상대

낙산은 일출의 장관으로 유명하다

당시도 그러했 듯, 송강은 의상대에 올라 동해바다의 일출에 감동한다

당시의 상황과 풍경이 관동별곡에 상세히 묘사되어있다

 

낙산동쪽 갓길로 의상대에 올라앉아

일출을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니

상운(상서로운구름)이 피어나는 듯

여섯 마리 용이 받치는 듯 -관동별곡 中 

 

김갑기 교수(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일출광경을 노래한 시문학 중에서는 가장 송강정철의 관동별곡에

의상대 일출 묘사가, 제가 본 시가문학 중에서는 가장 사실적이고

또 지금도 연상할 수 있듯이,

저 울렁이는 대양과 그 대양을 불쑥 솟아 올라오는 태양의 생명을

이 만큼 실감나게 노래한 시문학은 전 아직 못 본거 같습니다

고로 우리 시가문학에서 일출광경을 노래한 싯구중에서는

가장 모범적인 작품이 아니겠는가...가장 우수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경포대

양양에서 40분을 달려 송강처럼 강릉에 다라랐다

송강은 경포의 모래사장과 송림의 경치에 빠졌다

풍류를 회고하며 선비가 사는 고장의 예절을 높이사는

아름다운 고을로 강릉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빠질 수 없는 '경포대'로의 일정

경포대는 고려시대 세워져 그 역사가 685년이나 된다 

 

경포호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과거엔 더 대단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었다

현재 경포호의 둘레는 4km지만 본래는 12km에 달했다

경포호는 관동8경 중에 한 곳으로 오랫동안 수많은 선비들을 매료시켜 시를 짖게 했고

그중 송강은 이 가관을 한글로 노래하며, 한글문학의 자존심을 높혔다

 

김갑기교수(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 경포대에 와서 강릉의 풍속과 호수의 풍경, 그 다음에 동해바닷가의 광할한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개지륜(가마)이 경포에 내려가니

십리 빙환(고운바다)을 다리고 다시 다려

장송 빽빽한 속에 한없이 펼쳤으니

물결도 잔잔하고 잔잔해 모래알을 셀 수 있겠도다 -관동별곡 中

 

김갑수교수-

십리빙환이란 얘기는 바로 경포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마치 비단을 다려놓은 것 같이 잘 펴져있다는 그런 것이겠고요

물결도 자도잘샤 모래를 헤리로다

얼마나 이 호수의 물이 맑은지 내려다 보니 물밑의 모래알을 셀 수 있게 보인다
그런 얘기입니다

 

"시어가 주인을 제대로 만나 맑은 시가 되었다"

 

강문교

경포에 풍경에 이어서 강문교의 모습도 강문교의 모습도 관동별곡에 등장한다

강문은 강이 흐르는 입구란 뜻이다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 대양과 이어지는 곳이다 

 

김갑수교수-

관동별곡의 '강문교 넘는길에 대양이 거기로다'에서 말하는 다리가

바로 이 다리입니다

물론 이 다리는 최근에 다시 지은 다리입니다

 

위쪽은 민물이고 다리 아래쪽이 대양이라고 하는 동해 바다입니다

 

이 다리를 경계로 해서 민물고 바닷물이 합쳐진 상태죠

 

이 초라한 다리를 경계로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니까

인상깊게 노래를 했던 것 모양이죠

 

망양해수욕장

관동별곡 800리길

관동별곡 다음행로는 강원도 고성을 시작으로 강릉에 이어 삼척과 양양

그리고 울진으로 이어진다

 

동해안길은 1500년전 신라의 화랑에게서 비롯된 순례길이다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산수유람을 위한 선비들의 교양과목이 되었다

 

동해안의 생명력을 보며 정철은 울진에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바다를 바라보다 바다 끝의 하늘을 보게되고

다시 하늘 밖에 세상을 떠올린다

 

망양정

망양정에 올라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곳이다

우리 가사문학에서 미지의 공간에 대해 의문을 갖는 시는 매우 드물다

어쩌면 송강은 바깥세계는 신선과 통할지 모른다는 신비로운 동경에  빠진다

그리고 시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하늘 끝을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고래 그 누가 놀래켜서

불거니 뿜거니 어비럽게 구는가  -관동별곡 中

 

훈민가(訓民歌) 

이어령 (국문학박사)-

관동별곡 같은데 가 보면 아름다운 자연에 순수한 풍류

한국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쭉 내려와졌던 음풍명월

그러한 서경시, 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만은

실제로 훈민가라든가, 또 관찰사로 있으시면서  상소문 같은 걸 낸걸 보면은

순순히 경치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러한 시인이 아니라

어렵게 사는 당시의 백성들의 고충을 앞장서서 상소하는

현실 참여적인 마음이 굉장히 컸다는 것이죠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정철은 시조도 한편 남겼다. '훈민가'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적 윤리가 주 내용이 되어

백성들에게 도덕을 깨우치고자 지어졌다

한문이 존중받덨 시대, 한글로 지은 송강의 시는

고단한 백성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날이 샜다 호미  메고 가자 꾸나

내 논 다 매년 네 논도 좀 매어주마

오는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꾸나 -훈민가 中 

 

정철의 시가 높게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대표작들이 우리말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한글 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때에

정철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한글가사를 지어낸다

 

박영주교수-

즉흥적으로 어떤 주변에 있는 사물이나 사태, 현상을 두고

곧바로 그려내고자 하는, 거기에 곧바로 도달하는 점,

그 점에서 뛰어나셨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도 뛰어난 생동감, 그리고 작품성

미감이 깃들게 하신것은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고

그 직관력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특히 아주 세련된 언어, 그걸 그려나가셨기 때문에... 

 

상촌 신흠(1566~1628)

송강의 시는 아낌없는 칭송을 받아왔다

조선을 대표하는 4대문장가 중 한사람인 상촌신흠은

송강의 시를 두고 극찬했다

 

시상이 기발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지만, 여기에 미친 이는 보지못했다

 

(관동별곡을 보면) 사물을 형상해 낸 묘한 솜씨라든지

말을 만드는 기발한 재주라든지 실로 악보 가운데 절창이다-홍만정,<순오지 중>

 

문학평론집 순오지에 실린 관동별곡에 대한 평가 

 

신정일(문학사학자)-

송강정철 선생이 한글로 그렇게 글을 쓴 것은

소통하는 사람들 아무나 글을 배워가지고, 같이 읽을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그당시 기생들도 송각의 문학을 가지고, 노래로 지어가지고 부르기도 하고... 

 

송강의 가사는 민간에서도 유행했다

정철의 나이 31살 함경북도 지방을 살피러 갔다가

우연히 지은 시 한수는 20여년이 지난뒤에도 불리고 있었다 

 

정철이 함경도 관찰사가되어 길주에 이르렀을 때 

한 기녀가 여전히 송강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송강은 다시 시 한편을 짖는다

 

이십년 전 이곳에서 읊었던 노래

어느 해에 이렇듯 기방으로 떨어졌나

 

우리나라 시는 눈으로 읽는 독서물인데

당시에 '시'라고 하지않고 '시가'라고 하듯이 가창이 되었다 말이죠

가창 전승 이렇게 됨으로써 파급 효과가 독서물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이죠 

 

뮤지컬<사미인곡>

송강의 시는 지금도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지난 해에도 뮤지컬로 재탄생해 선을 보였다

 

강릉원주대학교 

그 뿐만이 아니다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도 우리문학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도

송강의 시는 필수관문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누구나 한번쯤은 송강시의 호방함을 접하게 된다

 

한글로 지어졌기에 우리말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더 빼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송강의 시

 

박영주교수(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글을 만든 것은 세종이지만, 한글의 묘미를 살려서 완성시키고,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분은 송강이다 하는데,

그 실체를 따져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점이 그러하느냐 하는거에요

어떤 작품을 놓고  주제를 형성화할 때 동원되는 사물이라든가

그리고 동원되는 언어들, 언어의 표현들, 이게 간결합니다

간결한 그 단어를 잘 고르고, 우선 단어 선택이 탁월해요 

 

세종문화회관

한글을 아름답게 구사한 송강의 시는 그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세종문화회관에도 전시되고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종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마련된 전시관

이곳에 정철의 시가 있다

관람객으로 북쩍이는 이곳에 송강의 시 4편이 선보이는 중이다

 

사대부 가운데 가곡을 지은이는 드물게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가집을 낸것은 송강이 시초로 보여진다

송강은 한글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기에 우리말로 노래를 지었다

그로 인해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한글문학을 부흥시키는데 기여했다

 

강봉진(관람객)-

당시에는 한글이 박해받아서 쉽게 쓰지 못하던 시절이라고 알고 있는데,

송강정철 선생님이 한글을 이용해서 문학작품을 쓴것을 보니까 감회가 새롭고

우리도 한글을 더욱더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령(문학박사)-

정철선생은 우리말을 문학으로써, 요즘말로 업그레이드 시킨

어느 의미에서는 가사문학을 통해서 '우리말의 사용체계를 정형화'한

우리말에 '프레임'을 준 그러한 분으로써 큰 업적이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김만중이 그런 역할을 했다면,

가사에서는 단연 정철 송강문학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한글을 문학으로 승화해   세상에 글을 더욱 높혔다

한문에 뒤지지 않는 우리말의 아름다움

빼어난 섬세함이 송강의 시로 표현되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송강의 시는

80여수의 시조와 700여수의 한시, 4편의 가사와 한편의 사설시조다

800여점의 시 중에 가장알려져 높힘을 받는 시는

단연 우리말로 지어진 한글가사 4편이다

 

 시인은 그래서 한국 문학의 거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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