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김홍집 제거한 고종 곁엔 친일 매국노만 득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사진가 권태균]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③친일내각의 갈등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12월 13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처단 요구가 드높은 외부대신을 되레 승진시키고 이완용에게 외교권을 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황현(黃玹)은
고종의 이중적 정치행보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10년 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전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해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을 역적으로 규정해 경무청(警務廳) 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참살당하게 했다. 황현은
1 일진회 회장 이용구(오른쪽)와 송병준. 둘은 흑룡회의 첨병이 돼 매국의 길에 앞장섰다. 2 통감관사. 이토는 외교권뿐만 아니라 내정을 총 간섭하는 사실상의 준총독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
일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 사이 고종은 1906년 1월 11일 일본 자작(子爵) 후지나미(藤波言忠) 등에게 훈장을 주고, 2월 28일에도 일본 육군중장 이노우에 미쓰루(井上光) 등에게도 훈장을 주어 일본 유력층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이런 한편 이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를 단행해 내각의 친일파들을 당혹하게 하기도 했다. 이토는 1906년 4월 21일 업무 협의차 일본으로 가서 6월 23일 귀국하는데 그 사이인 5월 28일 고종은 의정대신에 민영규(閔泳奎)를 임명했다. 민영규도 합방 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친일파이긴 하지만 고종은 자신이 정승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1906년 8월 28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훈2등을 서훈하는 등 매국적 친일파 달래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송병준의 배후는 1901년 2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이 결성한 일본 낭인 집단 흑룡회(黑龍會)였다. 만주 흑룡강 유역을 일본 영토로 삼겠다는 취지의 이름이니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대(對)러시아 개전론을 적극 주창하고 한국은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지역까지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大)아시아주의를 제창한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첨병이었다. 흑룡회 주간 우치다가 일본 정계의 흑막(黑幕:배후 실력자)인 스기야마(任山茂丸)의 추천으로 통감부 촉탁이 되면서 한국 점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흑룡회의 손발이 송병준과 일진회였다. 흑룡회는 1930년 편찬한
송병준은 일본에서 인삼 재배, 직물 염색 등을 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오타니(大谷喜藏) 소장을 따라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면서 직업적 친일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1897년 5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지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송숙준(宋肅畯:송병준)은 이때 이미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郎)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고 나오니 일찍이 창씨개명을 한 셈이다. 송병준은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8월 전 독립협회 회원 윤시병(尹始炳) 등 300여 명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이 필요해지자 그해 12월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해 만든 진보회(進步會)와 통합해 일진회를 만든다. 일진회는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만주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일본군을 도왔고, 1906년 2월 28일에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이토를 위해 ‘歡迎(환영)’이라는 큰 현수막을 남대문에 내걸기도 했다.
송병준은 1906년 10월 이일직(李逸稙=이세직(李世稙))의 옥새도용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다.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이 이일직에게 밀칙(密勅)을 내려 국내 이권을 외국인들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상납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자 고종은 이일직이 사적으로 옥새를 도용한 단독 소행으로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이일직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된 것이다. 상납금 일부를 가로채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고 총사직을 권고했다.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 무렵 박제순도 참정대신 자리에 목매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참정대신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이 1907년 5월 22일 사임한 뒤 그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했다. 내부대신은 임선준(任善準), 군부대신은 이병무(李秉武), 학부대신은 이재곤(李載崑)으로 바뀌었는데 사흘 후인 25일에는 조중응(趙重應)이 법부대신이 되고, 송병준이 삼품대신이란 조롱 속에 농상공부 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제순 내각이나 이완용 내각이나 같은 친일내각이지만 이번 내각은 이완용·조중응·송병준의 삼각 친일편대가 전면에 등장한 매국내각이었다. 조중응은 영조 때의 소론 영수 조태억(趙泰億)의 후손으로 노론 가문 일색인 친일 관료 집단에 소론 출신으로 드물게 합류했다. 이완용 내각은 고종 축출 특임내각이나 다름없었다.
궁지에 몰린 고종의 승부수가 헤이그 밀사 파견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906년 6월부터 10월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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