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의 타박타박 역사기행
옛날 과거 시험 때도 부정행위가 있었다
역사학자 정구선 교수
조선시대 과거시험
시험장을 감시하는 관리가 새벽에 문을 열고
응시자 명단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순조때 응시자가 너무 많아
전날 저녁부터 다음알 아침까지
과거시험장
식사 제공
겨울 같은 때는 추워서
세종-식사뿐 아니라 술도 권함
시험장에 입장하기 전
수협관(搜挾官)-응시자들의 옷과 소지품 검사
6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함
응시자들
6자,180cm 거리를 두고 앉혀
옆사람 곁눈질하지 못하게 함
용변보는 일
감독관에게 알리고
여러사람들이 같이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함
응시자격
신분적 제한 없슴
평민이상이면 누구나 응시
천민들은 과거 못 봄
평민들도 경제적 여건으로 응시가 어렵고 합격이 어려움
문과-양반
과거응시 제한
경국대전 명시
탐관오리 자손, 서얼의 자손
행실이 나쁜 여인 이나 재혼녀의 자손
과거시험 과목
문과 -행정관료인 문신
무과-무신
잡과-통역관이나 의관
문과-유교경전, 시나 문장 등 문예
무과-활쏘기 창던지기 무예시험, 병서
잡과-해당 전공 과목
역과-외국어, 의관- 동의보감 같은 것 등
기출문제집이나 참고서가 있었나?
기출문제나 유교경전 요약한 '초집'
몰래 가지고 들어가 컨닝하다 적발되기도 함
과거시험 임금이 출제했나?
시험보는 날 새벽에 관리들이 모여 상의해서 출제
대과
전시
대책=책문 시험문제는 임금이 내기도 함
대책-논술시험
시험 문제에서 다뤄서는 안되는 것
국왕이나 국가를 비난하는 것
전기-명나라, 후기-청나라의 외교관계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는 문제는 출제하지 못하게 함
나왔던 문제를 다시 내는 것은 가능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수능
과거시험
낙방생들이 다시 응시하는 경우
문과중 대과급제는 매우 어려움
소과에 합격한 후 대과에 급제한 시기 10년
3년마다 삼수하면 10년
급제하는데 30~40년이 걸리는 것도 있음
평생 백수생활하다 늙어 죽는 선비들이 휠씬 많음
장원급제 기록
최연소 장원급제자-17살
최연장 장원급제자- 56세
문과 급제자 76세
문과 대과 장원급제
늙어서 관직생활 할 수 있을까 논란
임금님이 보시고 강건하니까 관직에 나가도록 함
노비출신도 합격자가 있었다?
반서평- 노비출신인데 문과 합격
반서평은 노비가 아니라 서얼
천얼출신
천민, 서얼 출신이라 잘못된 해석
천한 서얼이다
노비는 성이 따로 없었다
될쇠 등
반기문 총장 조상
과거시험 제도적인 문제를 살펴보면서
오늘날과 비교해서 교훈 삼을 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을 것
과거시험으로부터 오늘날 시험제도
어떻게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
다음 시간에
허균이 서얼 친구인 이재영에게 보낸 편지
대구 카톨릭대 임유경 교수
옛 편지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소통과 나눔을 알아보는 시간
재주가 뛰어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때문에 궁핍한 친구를 보면서
늘 마음이 아프던 허균이 고을원님이 되었다고 같이 살자고 부르는 초정장
나는 큰 고을 원님이 되었다오
마침 그대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 모시고 이리로 오시요
내가 봉급에 반을 내어 생활비를 대주리니
이제 결코 굶주리는 일은 없을 것이요
그대와 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이 같고
그대 재주는 나보다 열배는 넘을 것이요
그럼에도 나보더도 더 심하게 세상에 버림받고 있으니
이것이 언제나 기막혀 하는 바라오
내 비록 운수기박하나 이천석짜리 벼슬을 몇 번하여
마치 달팽이 침바르듯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대는 사방으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 애쓰고 다니니
이는 모두 우리들 책임이요
밥상을 대할때마다 땀이 나고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으니
빨리 오시게
이런 일로 내가 비방을 받는다 해도 난 개의치 않을 것이요
이재영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
처마 밑에 빗물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친구 두 세명과 모여 있다가
이런 자리에 자네가 빠지면 안된다 하여
빨리 오라고 종놈을 보내 채근하는 편지도 남아있다
허균
1608년 마흔살에 공주목사가 됨
이재영, 심우영 윤계영 서얼친구를 불러다 도와주었다
공주감영에는 삼영이 있다
이재영(李再榮)
1553(명종 8)∼1623(인조 1)
이조판서 이 선(選)의 서자
임진왜란 군공으로 허통되어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도 관직을 주지 않고 승문원의 한이학관(漢吏學官)이란 명예직으로 삼았는데
그런 예에 따라 그도 한이학관이 되었다
고양군수를 역임하고 1621년(광해군 13) 원접사 이이첨(李爾瞻)의 제술관이 되었다.
과거시험 때마다 남의 글을 대신 지어 주었으며, 그래서 급제한 사람이 5~6명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
특히 이이첨의 여러 아들을 부정하게 합격시킨 것은 그의 소행이었다 하여 인조반정 후 국문(鞫問)을 받다가 매맞아 죽었다.
신분이 천해 자기는 급제하지 못하니까 반항이었다고 할까
허균
홍길동전 등에서 서얼제도 비판
천민과 여성들의 삶에대한 개선책에 대해 고민함
허균은 왜 사회적 약자를 옹호했을까?
송곡 이달 선생에게 시를 배움
이달선생을 보며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판하게 되었을 것
석굴암이 만들어진 8세기, 동서양의 종교 성상 비교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누비면서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사의 다양한 주제를 비교하는
마주보는 역사 이야기
김성한 선생
국립나주박물관 개원 1주년 기념
영상으로 되살린 문화유산 14.11.22~15. 01.18
석굴암 본존불을 영상제작해서
옆에서 볼 수 있는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다 함
석굴암 본존불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꽃피움
중국 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해 예술로 표현
석굴암 본존불 석가여래 얼굴
부처의 모습이라기 보다 신라인의 모습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서산마애불-두툼한 입술의 후덕한 미소를 띄고 있는 호남인의 모습을 띠고 있는 같은 맥락
석굴암
8세기 후반 경덕왕~혜공왕
김대성
신라가 통일을 이룬지 100년 후
본존불이 신라인의 모습
석가모니의 실제모습은?
실제 석가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활동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조각으로 형성화 하는 풍속은 전혀 존재하지 않음
석가모니가 용모가 아름답다 이런 표현은 나오지만
그것으로 얼굴 모습을 짐작할 수는 없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원정을 통해 그리스문화를 전파한 것이 계기
그리스 여러신들이 조각으로 표현되어
그것에 자극을 받아
부처의 모습도 신의 모습으로 불상을 만들어 조각하기 시작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이 간다라미술의 중심지
8세기 모습의 석가상을 볼 수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과 상당한 차이
석굴암 근엄한 모습은 볼 수 없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 많다
머리카락-웨이브가 들어가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많다
인도사람이기 보다는 그리스 로마 조각의 모습
쿠샨왕국-그리스와 로마문명을 선진문화로 받아들임
서아시아-이슬람
유럽-기독교
이슬람교 창시자는 무하마드
이슬람교에서는 일체 성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신이 아니다 단지 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사도일뿐이다
자신을 신격화하지 못하게 코란에 명문
결국은 아라베스크 무늬가 발달
생물적인 무늬를 넣지 않고 기하학적인 무늬로 발전시킴
유럽의 기독교
8세기 유럽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동-비잔틴제국
서-서로마제국은 멸망해서 프랑크왕국이 들어섬
비잔틴-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음
우상숭배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
일체성상을 금지한다는 성상파괴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짐
몇 세기동안 유지
비잔틴의 기독교-오늘날 동방정교회
십자가에 예수의 형제가 잘 없다
단순히 십자가만 있다
프랑크왕국은 게르만 민족이 세운 나라
문화적으론 미개한 민족
미개한 민족에게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뭔가 설명할 수있는 수단이 필요함
예수나 하나님의 상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절대로 조각으로 표현하지는 않음
기독교-그리스 로마시대 다신교를
전부 이교도의 풍속이라 생각해서 죄악시함
조각 자체를 나쁜 것으로 봄
그림으로 그리는 것
성화, 그림으로 그림
이야기가 필요함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책이 성행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함
대표적인 것으로
성모마리아가 예수 잉태 소식을 전해 듣는 수태고지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성화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절정을 이룸
예수상, 성모마리아상
르네상스- '재생'이란 뜻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문화를 재생한다는 뜻
그때 당시 조각도 재생하게 됨
이때 비로소 예수상, 성모마리아상을 만듦
단순히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조
피에타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모습을 애처로운 모습으로 안고 있는 모습
경주박물관
피에타 모습의 토우
8세기 무렵 종교성상
영웅은 고향에서 배척당한다
석굴암 본존불, 간다라미술의 뿌리는 그리스 로마에서 온 것임
8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조각이 천대받는 시기
신라의 본존불 신라인의 형상을 닮고 있다
자기 풍토애와 자신들의 생각을 닮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역사 ◈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관총 발굴 시작, 우리 손으로 94년만에… 6월까지 발굴현장 공개 (0) | 2015.03.05 |
---|---|
타박타박 역사기행 2014/12/14 (0) | 2014.12.16 |
타박타박 역사기행 (0) | 2014.12.16 |
장도영과 5.16 다큐 (0) | 2014.11.13 |
[스크랩] 평양과 금강산 모습 (0) | 201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