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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 - 위키백과

파라클레토스 2009. 5. 17. 02:02

미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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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
원주민의 땅
식민지 시대 (1493-1776)
신생 국가 (1776 - 1789)
성장과 갈등 (1800-1861)
내전의 시기 (1851-1865)
신 산업혁명 (1866-1900)
제 1차 세계 대전 (1900-1920)
세계 경제 대공황(1920-1939)
제 2차 세계 대전 (1939-1945)
냉전과 흑인 해방 운동 (1945-1964)
격동의 시대 (1964-1980)
현대 (1980-현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시작되는 에스파냐 사람의 식민 지배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1607년에 시작되는 영국인의 입식자(入植者)가 차츰 세력범위를 넓혀 영국1733년까지 13개의 식민지를 대서양 연안에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도 식민의 동기가 북쪽과 남쪽에서는 크게 달랐다. 유럽의 7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긴 영국이 식민지의 통제를 강화하자 13개 식민지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결속, 궐기하고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수립한 것이 국가로서 미국의 시초였다. 미국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어서 1787년에 미합중국 헌법이 발포되고, 1789년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지도 아래 연방국가가 발족하였다. 미국은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여, 1848년에는 31개의 주로 거의 현재의 규모로까지 발전하였다.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서쪽으로의 발전은 이른바 프론티어 운동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발전한 신세계의 내부에서는 식민지 건설 당시부터 싹터온 남북의 대립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미국의 남부와 북부는 식민지 초기 시대부터 종교경제 체제를 달리하고 있었는데, 그후 이 차이는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노예제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진 미국1861년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게 된다. 남북 간의 내전은 1865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것은 북부의 생산력, 특히 공업력이 남부의 농업에 대하여 거둔 승리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중엽까지로 끝나고, 남북 전쟁 후는 국내 자원의 개발과 교통기관의 발달에 힘입어 미국의 산업자본주의는 약진을 이룩하였으며, 급속히 독점화의 경향을 보였다. 산업이 발달한 결과 각지에 공업도시가 발달하였으며, 현저한 빈부(貧富)의 차, 슬럼가(街)나 범죄의 발생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노동운동이 거세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멕시코 전쟁으로 얻었던 땅을 뺏길 위험에 처하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승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세계 제1의 부(富)를 갖게 된 미국은 전쟁 후에도 번영을 유지하였으나, 공업의 번영에 비하여 농촌은 불황으로 허덕였으며, 유럽 여러 나라의 전후(戰後) 불황과 더불어 1928년에는 대공황(大恐慌)이 엄습하였다. 1932년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18821945)는 경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고금을 대량 사용하는 뉴딜 정책을 채택하여 불황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정책을 통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은 크게 확대되고, 미국의 자본주의는 차츰 변질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역시 전승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참전국 중에서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며,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전쟁 후에는 피폐한 여러 나라의 부흥과 후진국 원조 등에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1] 이후 소련과의 냉전 체제에서 급부상한 미국자본주의 진영을 이끈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대패를 기록한 뒤, 1990년대~2000년대에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과 전쟁을 하였다. 2001년에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세계 무역 센터테러를 당했다. 2008년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목차

[숨기기]

[편집] 원주민의 땅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493년 이전)입니다.
아메리카 토착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재 미국이 있는 대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메리카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로 삼기 전 오랜 기간 동안 원주민(Native American)의 땅이었던 곳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갈래여서 아직까지도 정확한 이동 경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베링 육교(Bering Land Bridge)를 건너온 몽고계 종족들로 15,000년 전 빙하기에 수위가 낮아져 다리처럼 연결되었던 베링 육교를 건너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북아메리카 전역에 퍼져 살게 되었다는 설과 역시 몽고계 종족이 태평양을 항해했다는 설, 그리고 남태평양의 아시아계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설 등이 있다, 바이킹족들도 기원전 1000년경에 건너가 포도를 재배한 흔적이 있으나, 그것은 전설로만 남아있다.

[편집] 식민지 시대 (1493-1776)

15세기 이후 에스파냐의 해외 식민지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493-1776)입니다.

개척자들이 처음 발을 딛은 곳들은 매사추세츠 주버지니아 주 등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당시 아메리카 땅에는 영국 식민지와 네덜란드 식민지가 있었고, 동부 캐나다에는 프랑스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당시 미국으로 건너왔던 사람들은, 주로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 가난한 영국인, 사업가, 면죄를 제의받은 범죄자 등이었다. 네덜란드 식민지인들은 초기에 "뉴암스테르담"을 세워 정착했다가 1664년 영국인에게 땅을 빼앗겼다. 영국인들은 뉴암스테르담을 접수한 후 도시 이름을 뉴욕으로 개칭했다. 영국 식민지인들은 본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명령에 따랐으나, 후에는 세금 문제 등으로 인해 본국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편집] 신생 국가 (1776 - 1789)

미국 독립전쟁 중 델라웨어를 건너는 조지 워싱턴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 독립입니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미국 독립(American Revolution)은 18세기 중엽에 13개 식민지가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수립한 것을 말한다. 흔히 미국 혁명이라고도 한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 13개 식민지는 영국 제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을 벌였다. 미국 독립선언1776년 발표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확고히 한 것은 1781년이었다.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끝난 1763년, 대영 제국은 무려 1억 3000만 파운드의 빛을 지고 있었는데, 한 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로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액을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한 것이 미국 독립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대영 제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이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1774년 1차 대륙회의, 1775년 2차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1775년 보스턴 차 사건이후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미국 내의 왕당파가 인구의 30%에 이르렀음에도 독립파들은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80%가 넘는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대영 제국은 일부 해안 지역만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을 수립하였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내 13개 영국 식민지 대표들이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해 7월 2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탈퇴할 것을 결의, 7월 3일 신문에 발표, 7월 4일 대륙회의에서 승인, 7월 8일 독립기념관의 발코니에서 승인 내용을 공식 선언하였다. 또한 선언서의 공식 제목은 '아메리카 합중국 13개 주의 만장일치 선언'(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워싱턴을 총 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은 독립 전쟁 초기에 영국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후 에스파냐네덜란드 공화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후 워싱턴의 지구전 전략과 프랑스 왕국 해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세는 독립군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미국의 대륙군1776년 트렌턴 전투1777년 사라토가 전투, 그리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영 제국의 군대에 승리하였다.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9월 3일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미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편집] 성장과 갈등

미국 각주의 편입 연도, 서부 확장을 보여준다.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800-1861)입니다.

1783년, 독립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스페인령의 플로리다 반도 일대를 제외한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상업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방과 뉴올리언스을 구입하였다. 이것은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불리며 이 매입으로 인해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증가하였고 미국은 점점 하나의 국가로서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물론 이는 미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계산과 영토를 넓히려는 미국의 욕심에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13주로 시작했던 미국은 여러 정책들과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팽창해 나간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는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라고 불린다. 당시 백인들은 담배 농사에 필요한 새로운 농토를 찾아서 서부로 이동했는데, 이러한 백인들의 서부 이동은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여 인디언들과 미국 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호 구역 강제 수용(1830년), 세 차례에 걸친 인디언 학살(약 300만 명 학살, 어린이와 여성 포함), 인디언들의 식량 동물들소 학살 등 인디언 말살 정책을 통하여 그들의 토지를 강탈하였다. 물론 인디언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의 화력을 이기지는 못했으며 인디언들의 참정권을 인정한 1930년대까지 차별 받으면서 살았다.

미국은 영토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자연히 북부와 남부의 주산업은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북부는 산업, 공업, 어업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해 나갔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는 농업,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발전해 나갔다. 이에 따라,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농업을 뒷받침해줄 노예제를 원했으며, 북부인들은 인간 평등이라는 원칙 하에 노예제 폐지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에는 남북 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편집] 남북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전쟁입니다.

남북 전쟁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1861년 4월, 남부동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남군이 패했다. 미국 산업 발전의 토대를 다졌던 것은 미국의 분열로 말미암은 남북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공업 국가를 지향하던 북부의 자본주의 세력이 농업 국가를 지향하던 남부 지주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남북 전쟁 이후 미국 산업은 공업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만약 이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하였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북아메리카의 중견국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전쟁은 그 당시까지도 뿌리 깊었던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1900-1920)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00-1920)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 간의 전쟁에 참여하면 국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먼로 독트린 이래 고립정책을 고수하던 미국은, 미국 선박들이 독일U보트에 의해 계속 파괴되자 이에 분개하기 시작한다. 또한, 치머만 전보에 의해 멕시코 전쟁으로 얻었던 땅을 뺏길 위험에 처하자, 그동안 평화를 주장하며 전쟁 참가를 꺼려왔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4월 6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선전 포고를 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다.

[편집] 세계 경제 대공황(1920-1939)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20-1939)입니다.
대공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전쟁 물자를 팔아 수익을 올렸던 미국 공장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수요가 사라지자 부도를 내며 문을 닫았고, 이에 따라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실업자들은 수익이 없었기 때문에 물품을 살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다른 공장들도 문을 닫기에 이른다. 또한, 연방준비은행이 통화량을 늘렸기 때문에 1921년 6월 317억 달러였던 통화량1929년 6월에는 457억 달러가 되어 44%나 늘어났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돈이 넘쳐나자 돈 벌기가 쉬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수익을 노리고 주식에 투자했다. 뉴욕의 큰 은행들이 산하 모든 브로커 기관들에게 ‘24시간 이내 지불조항’을 적용하여 융자해준 모든 대출을 24시간 내에 전부 거둬들이라고 지시하자, 주식 브로커나 주식을 산 모든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금액에 관계없이 소유한 주식을 몽땅 급히 팔아야 했고, 그 결과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일어난 악명 높은 1929년대공황(The Great Crash 1929)이며, 그 여파로 전 세계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공황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거래 은행으로 달려가, 있는 대로 돈을 찾아 증권 회사에 대출금을 갚으려 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39-1945)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떠맡았던 독일나치즘을 기반으로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휘하에서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에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미 내부적으로 경제 대공황이라는 문제점을 떠안고 있던 미국인들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은 그 복수로 연합국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크게 부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럽 각국에서 돈과 장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호기를 잘 이용한 덕분이다.

[편집] 냉전과 흑인 해방 운동 (1945-1964)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45-1964)입니다.

냉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의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이나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으로, 일반적인 전쟁인 실제 무력의 사용(이를 열전이라 한다)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영국,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사이의 불안정한 전시동맹관계가 해체되었고, 이에 양측은 서로의 세력이 극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전략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특히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 동유럽에 막대한 금액의 지원금을 원조하였고, 미국상 ·하양원합동회의에서 미국공산세력을 저지하는 데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성명하기도 했다. 그 후 미국,영국소련은 세계 각지에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였고, 한국독일이 분단에 이르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1960년대마틴 루터 킹공민권 운동을 이끈 시대이기도 하며, 백인흑인의 사회적 인종 차별을 법으로 규정한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 폐지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편집] 격동의 시대 (1964-1980)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64-1980)입니다.

이 시기는 변화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이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대이다. 냉전1960년대1970년대를 통해 계속되었고, 미국은 이 와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대패를 기록한다. 미국 내부에서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 정책을 통해 '가난과 인종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필요한 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해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미국은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국민들의 의식이 크게 성장하였으며, 공민권을 위한 투쟁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존슨 대통령에 이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 중 사임하게 되며, 1970년대 초반에는 우주 정거장이 건설되기도 한다.

[편집] 현대 (1980-현재)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의 역사 (1980 - 현재)입니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자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강대국임을 내세워 세계 평화를 책임지겠다고 표방하고, 이에 거슬리는 여러 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경제적, 정치적 정책을 통해 성장을 거듭한 시대이다. 이라크대량살상무기등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일으켰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많은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이유인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이라크 전쟁은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2]2001년 9월 11일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세계 무역 센터테러 당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탈리반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라크를 공격하고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라크 전쟁프랑스, 독일 등 많은 국가가 반대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강행하였다.

2008년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었고,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흑인 출신 대통령이다.

[편집] 주석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미국
  2.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미국의 정보조작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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