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파독 50년> 한국-독일 가교로 뿌리내린 역사
1950년대 말부터 일부 독일행..1966년 1월 128명 단체입국 1만여명 독일 취업해 한국 경제발전에 일조..현재 2천800명 독일생활
1950년대 말부터 일부 독일행…1966년 1월 128명 단체입국
1만여명 독일 취업해 한국 경제발전에 일조…현재 2천800명 독일생활
독일(통일 이전 서독, 이하 독일) 파견 간호인력 50년 역사의 출발은 1966년 1월 3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날, 한국의 간호인력 128명이 집단으로 독일 땅을 처음 밟았기 때문이다.
애초 1950년대 후반에도 한국의 간호인력은 종교기관을 통해 독일을 찾았다. 그러나 이후 독일에서 의사로 있던 이수길 씨가 한국 간호인력의 취업을 중개하고 나서면서 그런 단체 이동이 있었다.
한독 양국은 1969년 8월부터는 공적(公的)인 협정을 바탕으로 해서 집단취업을 추진한다. 하지만 1966년 1월 시작된 집단이동의 상징성이 크므로, 그것을 기점으로 역사를 따진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배경은 독일의 간호인력 태부족에 있다. 늙어가던 독일은 간병과 요양에 요구되는 간호인력이 매우 달렸다. 1960년대 독일은 간호인력 3만 명이 부족했다는 통계가 있다.
한국은 당시 외국 경험과 돈벌이를 희망하는 간호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가 맞았다. 또, 외화가 무척 필요했던 한국 정부로선 산업화 과정에 그들의 송금 외화가 종잣돈으로 역할 하고 간호인력 파독을 매개로 양국 우호 관계를 다질 수 있었던 측면이 있었다.
2008년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진화위) 보고서는 독일 정부의 정책 변경 등에 따라 파독이 중단된 1976년까지 한국 간호인력 1만1천57명이 독일로 이주한 것으로 적었다. 이 수치는 1960년부터 셈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06년 보건복지부가 파독 간호 40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1966∼1976년 1만226명이 이주한 것으로 돼 있다. 결국, 중규모 이상의 집단이동이 개시된 1966년부터 셈하면 파독 간호인력은 대체로 1만여 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1973년 당시 독일 전체 병원의 12.6%인 452곳에 한국 간호인력 6천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는 통계는 독일 내 한인 간호인력의 역할이 얼마나 두드러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을 간호인력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간호사만이 아니라 간호보조사(간호조무사) 등 다른 자격자가 마찬가지로 많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들 간호인력을 3년 고용 등 단기계약직의 '손님노동자'(가스트아르바이터)로 받아들였다.
손님노동자의 수용은 독일 정부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특정 분야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이었다. 1963년 개시된 것으로 보는 한국 광부들의 독일 파견도 그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한국 간호인력의 현지 취업과 노동은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독일인 간호인력보다 한국인 간호인력의 직업적 능력과 교육 수준이 높았다. 20∼30대의 한국인 간호인력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높은 연령대의 독일인 간호인력, 그리고 수많은 여타 외국에서 독일로 이주한 간호인력보다 현지 환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독일에선 간호 분야가 3D에 가까운 직종이었지만 한국에선 괜찮은 화이트칼라 직종으로 인식됐던 것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기본적 환경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1968년 세계보건기구 한국사무소가 주한 독일대사관 측에 과도한 인력 송출과 한국의 간호인력 부족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전달하고, 이에 독일 정부가 자국 병원협회에 한국인 간호인력 고용 자제를 요청했다는 사례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회민주당 주도의 독일 정부는 마침내 오일 쇼크가 터지자 외국인 노동자 유입 정책을 바꾼다. 특히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인에게 할당된 인기 없는 일자리마저 독일인에게 환원돼야 한다는 요구가 일면서 1970년대 중반 외국인 노동력의 유입을 불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고용 계약을 쉽게 연장할 수 있었던 한국 간호사들이 일부 강제 귀국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에 맞서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라며 저항한 파독 간호사들의 행동과 현지 여론의 호응으로 서베를린 한국인 간호사들에겐 영주권이 허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라며 독일 당국과 논쟁을 벌인 한국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독일인들은 스위스 저명작가 막스 프리슈가 독일 정부의 이주노동 대책을 비판하며 쓴 "사람들은 '노동력'을 불렀지만 오는 건 '사람'이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곡절을 겪으며 독일 사회를 파고든 간호사들은 광부들과 함께 한독관계의 가교가 됐고, 독일 한인사회에 깊게 뿌리내렸다.
1만여 간호사는 현지 잔류, 제3 외국 이주, 귀국이라는 세 갈래 선택을 했다. 독일에 남은 이들의 30% 정도, 숫자로는 600∼700명이 독일인과 결혼했다는 추정이 있지만 정확한 통계는 어디에도 없다.
재독한인간호협회는 현재 독일에 남은 한인 간호사 출신을 2천800명가량으로 추산한다. 이들 중 은퇴 연령인 65세 미만의 인력은 아직도 일부 현역으로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은퇴자로 생활하고 있다고 재독한인간호협회 측은 설명했다.
이들 간호인력의 국내 송금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일조했다. 1972년 시행된 심윤종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정기적으로 송금한다는 응답자는 57.2%였고, 월평균 송금액은 451마르크(최근 환율 시세로 환산하면 29만 원)였다. 저마다 노동 환경과 시간에 따라 임금 수준이 달랐지만 대체로 월 700∼800마르크를 받았다고 가정할 때 상당히 큰 액수였다.
진실화해위는 보고서를 통해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인력의 송금 총액을 1억7천만 달러로 계산한 바 있다. 이 금액은 파독 광부의 송금까지 합산한 것인 데다 1971∼1975년 기간에는 광부, 간호사 이외 파독 인력의 송금까지 포함한 것이다.
총수출액 대비 이들 전체 파독 인력의 송금액 비중은 1966년 1.9%, 1967년 1.8%였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은 각기 0.12%, 0.13%였다.
다만 파독 근로자들이 한국 정부에 각종 복지사업을 요구하는 도덕적 근거로 더러 활용했던 자신들의 임금을 담보로 한 독일의 대(對)한국 차관 제공설은 진실화해위의 심층 조사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광부와 간호사가 파견되기 시작한 시기보다 훨씬 앞선 1961년 12월, 차관 제공의 근거가 마련된 한독 양국의 경제·기술원조 의정서가 체결됐기 때문이다. 당시 서독의 대(對)한국 차관 규모는 1억5천만 마르크였다.
이 가운데 7천500만 마르크는 한국의 개발사업을 지원하는 독일 국영 금융기관의 대출금이었다. 나머지 7천500만 마르크는 한국이 독일 기계류를 수입할 때 독일 정부가 공급업체에 그 금액만큼의 판매대금 수령을 보증하는 일종의 신용제공이었다.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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