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ㆍ축출 자본주의
ㆍ사스키아 사센 지음·박슬라 옮김
ㆍ글항아리 | 332쪽 | 1만8000원
2010년 재정 파탄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서 처음으로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는 2012년과 2015년에 각각 2, 3차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6년째 긴축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2013년부터 경제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낮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금융계와 주류 언론은 ‘회복세’를 이야기하기 위해 고통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을 통계에서, 사회에서, 삶에서 소거했다.
■경제성장 위해 쫓겨난 삶들
이러한 소거, 내쫓김, 추방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저소득 노동자와 실업자는 복지정책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국가들은 영토를 매각해야 한다. 내전으로 살 곳을 잃은 난민들은 목숨을 건 채 국경을 넘고,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자연 파괴로 터전에서 내쫓기고 있다.
최근 번역·출간된 <축출 자본주의>는 최근 20년 동안 자본주의가 스스로 증식해 나가며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는 과정을 ‘축출’이라는 관점으로 본다. 저자인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자본주의에 의해 평범한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내쫓기지만 동시에 거시경제는 성장하는 것이 ‘축출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얘기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를 묘사해왔던 ‘신자본주의’ ‘자본주의 2.0’ ‘21세기 자본주의’라는 단어들이 현대 세계경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기엔 평면적인 분류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또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를 설명할 때 많이 쓰이는 ‘빈곤’과 ‘정의’라는 어휘는 “무기력한 용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로 인한 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면화되고, 지역·문화·체제를 초월해 21세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새로운 논리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분석할 입체적 도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것이 바로 ‘축출’이라는 개념이라고 밝힌다.
축출이 현대 자본주의의 공고한 체제로 자리 잡게 된 경제적 뿌리는 깊다. 강대국들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로 대표되는 국제 규제기관을 통한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1980년대 시작해 1990년대 들어 확대했다. 이를 빌미로 채권국들은 남반구 국가들로부터 채무상환이라는 형태로 수십억달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쌓인 가난한 나라의 빚은 강대국이 후진국의 정권을 길들이고 체제를 재조정하는 수단으로 다시 한번 기능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국제통화기금의 외채 관리 정책은 대부분 해당 국가 내의 실업률과 빈곤율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약탈적 관계를 이어간 것이 2000년대 초반에 시작돼 2007년 정점에 달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이 모기지로 빚을 진 개인과 가정의 손실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 더욱 악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상당 지역, 아시아의 일부 지역이 강대국 경제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정부와 기업이 해외 토지를 사들이면서 세계 곳곳에선 영토가 더 이상 국가가 기능하는 공간이 아닌, 단순히 자원을 착취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아울러 저자는 축출의 최종 메커니즘을 ‘수감’이라고 봤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의 미묘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선 수감 인구의 급격한 증가 현상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감옥 수감 인구는 600% 증가해 230만명을 기록했다. 가석방이나 보호관찰을 포함하면 700만명을 넘고, 과거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까지 아우르면 6500만명이다. 이는 미국인 4명 중 1명인 셈이다. 그는 ‘범죄’라는 표면적 연결고리 뒤엔 범죄를 규정하고 구금을 확산하는 체제의 재편이 존재했다고 밝힌다. 이를 통해 합법적으로 죄수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교도소공사에 따르면 모든 수형자는 육체노동에 의무적으로 종사하도록 돼있다. 민영 교도소 사업 또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지나치게 엄격한 양형기준, 가혹한 판결, 사법제도의 악용은 현대판 노동의 노예화로 귀결된다.
■‘번영’의 현대적 의미 재규정해야
저자는 이러한 축출의 악순환을 중지할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하진 않는다. 오늘날 축출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효과적 행동이란 것도 사실상 없다. 저자는 오늘날 핍박받는 대다수가 변두리로 추방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지배자에게 맞서 봉기를 일으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특히 축출 자본주의의 ‘탄압자’는 개별의 인간뿐 아니라 네트워크, 기계 등이 결합된 복잡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축출당한 사람들이 맞설 뚜렷한 구심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경제, 중산층, 국가 등 우리가 사회를 분석하는 기본적인 범주가 수십년 전에 비해 모호해진 만큼 이를 대체할 새로운 분석 범주를 발견해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밝힌다. 각각의 전문분야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에 이들을 횡단하는 분석 도구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퇴출되고 있는 공간과 축출되고 있는 순간을 폭로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얘기한다.
사센은 새로운 개념 아래서 ‘동력’이 모일 수 있다고 봤다. 이를 위해선 축출의 시스템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와 함께 개념에 대한 재부호화(recode)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현대사회에서 ‘번영’의 의미를 재규정해 금융자본 중심의 성장 논리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심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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