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론자 "전북 성장동력 견인" vs 반대론자 "황당무계 방안"
KTX가 300㎞/h를 낼 수 있는 역간 최소거리는 57.1㎞라는 것이 철도업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이보다 1/4~1/8 정도 최소거리인 지점에 새 역을 신설한다면 과연 타당할까. 현재 KTX 호남선 전북 익산역과 정읍역 간의 거리는 42.1㎞다. KTX가 제 속도를 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거리다. 여기에 한술 더떠 일각에서 익산역에서 정읍쪽으로 7.4㎞나 13.8㎞ 지점에 '전주완주 혁신도시 고속철도역'(가칭·전북혁신역) 신설을 추진하고 나서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한창이다.
최근에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쟁점화는 물론 지역이 두 쪽으로 갈리는 등 내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 KTX가 정차하는 익산시는 'KTX역이 시내버스 정류장이냐'며 신역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에 김제와 완주지역은 '전북의 성장동력을 견인할 SOC'가 될 것이라며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중간에 낀 전북도는 난감해 하면서도 KTX 혁신도시역 신설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론과 오피니언 리더, 전문가 입장 또한 엇갈리고 있다. 이처럼 지자체, 정치권, 주민, 전문가 등 각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차가 크기 때문에 쉽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김제·완주 정치권 강력 요구, 타당성조사 용역비 예산반영
한동안 잠잠하던 전북 혁신역 신설 논란이 재연되는 것은 올해 정부 예산에 KTX '전북 혁신역' 신설에 관한 타당성 조사 용역비 1억원이 포함되면서다. 전북 혁신도시와 인접한 전주·완주·김제 지역에서는 8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김제 '순동 사거리'나 '부용역' 인근에 새로운 정차역을 신설해야 한다고 새역사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내놓고 있다. 해당 용역비를 국토교통부에 신청한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완주·진안·무주·장수)은 새 역이 만들어져야 전북지역 성장동력이 될 혁신도시와 새만금권 활성화, 농생명벨트 조성, 금융도시 육성 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KTX역 신설은 국회의원 출마 당시 그의 공약이다.
KTX 혁신역 신설 위치로는 김제시 부용역과 순동사거리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애초 혁신도시 내부도 역 위치로 거론됐으나 역사신축과 30㎞노선 신설에 총 1조6000억원이 든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멀어졌다. 부용역과 순동사거리는 전주, 김제, 익산, 완주, 군산, 부안 등 6개 시·군 접경지에 있다는 점과 새만금 SOC와의 종합적 시너지 효과 발생 등이 장점으로 거론된다. 특히 혁신도시에서 직선거리를 내면 10㎞도 안 된다는 게 KTX 혁신역 신설 찬성론자들의 설명이다.
익산시 "KTX역이 버스정류장이냐" 반발
하지만 호남선과 전라·장항선의 분기점으로 호남권 거점역사가 위치한 익산시는 '국가적으로도 실익이 없는 황당무계한 안'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현재의 익산역을 이용하더라도 전주·김제·완주 등에서 30분이면 KTX 이용이 가능하고 익산역 인근의 도로와 주차장을 확충해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여주면 된다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익산시는 특히 현재 거론되고 있는 신설 역 후보지가 현 익산역에서 13.8㎞ 떨어진 곳으로 승용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어 '거점형으로 운행하는 KTX를 버스 정차역 수준으로 격하하는 꼴'이라고 비난했다.
익산시는 KTX혁신도시역이 신설될 경우 고속철도의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혁신도시역이 신설될 경우 익산역과 14㎞ 거리에 위치하게 돼 최소 안전제동 거리인 40㎞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또 국토교통부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2000억원이 넘는 사업비로 인해 신설 불가 입장을 밝힌바 있다는 것이 익산시의 설명이다.
이해관계 따라 입장 제각각···지방정치권 정치 쟁점화
거주하는 지역과 이권에 따라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다. 익산 애향운동본부와 바르게살기운동과 개인택시조합, 상가협의회 등 시민사회 단체들은 "당장 혁신역 신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익산에는 현재 100여 개에 달하는 항의성 현수막 까지 걸린 상태다.
익산시와 김제시·완주군의 지방선거 입지자들은 정치적으로 쟁점화시킬 모양새다. 이를 두고 지역 정가는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슈를 선점하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정헌율 익산시장이 선공에 나섰다. 정 시장은 지난해 11월30일 KTX 혁신역 추진 반대기자회견을 열어 "익산역의 기능을 분산시키는 혁신역 추진은 경제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오히려 전북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회견으로 정 시장은 애향운동본부 등 지역 시민단체의 호응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정 시장이 KTX 혁신역 신설 이슈를 지방선거 이슈로 선점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익산출신 이춘석·조배숙 국회의원도 전북 혁신도시역 신설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북도의원 가운데 지방선거 입지자들도 제각기 찬반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익산시장에 도전하는 김대중 도의원과 황현 전북도의회 의장은 대체교통수단을 제시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반면 김제시장에 출마하는 강병진 도의원과 완주군수에 출마하는 박재완 도의원은 찬성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익산시의회와 김제시의회, 완주군의회 역시 마찬가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익산시의회는 혁신도시역 신설 포기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내놓았고, 김제시의회 또한 김제 부근에 KTX 역신설을 촉구하는 건의안을 채택했다. 완주군의회는 일찌감치 지난해 10월 완주혁신도시 인근 KTX 역사 이전 재촉구 건의안을 채택했다.
일각에선 KTX 혁신역사 신설 논란이 지역 SOC문제를 넘어 지역 정치인들의 이슈몰이용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지방선거가 임박할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지역분열만 조장하는 소모전에 그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전북도 난감 '유보적' 입장···"지금은 때가 아냐"
전북도는 혁신역 신설문제가 지역 간 첨예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음에 따라 적극적 입장 표명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전북도는 기본적으로 유보적이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도는 주로 역간 거리문제, 저속철 논란, 비용부담, 시기의 부적절성 등을 주된 이유로 거론하고 있다. 우선 도는 정부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정한 역간 적정 거리인 57.1㎞를 근거로 들며, 익산역과 정읍역 사이에 혁신도시역이 생기면 역간 거리가 더 좁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익산역과는 13.8㎞, 정읍역과는 28.3㎞ 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부적합다는 것이다. 또 KTX가 최고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최소 57.1㎞가 유지돼야 한다는 게 전북도의 논리다.
역사를 신축할 때 드는 비용부담도 문제다. 전북도는 혁신도시역을 신설할 경우 역사 신축에 2000억원 정도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익산 KTX역을 건설할 때 들었던 비용을 중심으로 추정한 것이다. 또 철도건설법 시행규칙 제22조(원인자의 비용부담원칙)도 전북도 입장에서는 고민거리다. 이 규정에 따라 자치단체가 철도노선에 역 신설을 추진할 경우, 사업비의 대부분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가령 혁신도시역이 김제시 부근에 세워지면 재정자립도가 약한 김제시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기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KTX 혁신도시역 신설은 도시 여건 변화를 살피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호남고속철이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논의하기엔 빠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
엇갈리는 여론과 오피니언 리더, 전문가 입장
찬성론자들은 역간 거리 문제는 '건너뛰기'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역 신설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KTX 논산훈련소역도 공주역과 20㎞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 실제 논산역은 기존 공주역과의 거리가 20.7㎞에 불과하다. 기존 오송역과 공주역과의 거리는 43.7㎞, 공주역과 익산역은 46.0㎞, 익산역과 정읍역은 42.1㎞이다. 속도 300㎞/h를 기준으로 역 간 거리가 57.1㎞ 이상이 돼야 한다는 KTX역 설치 규정에 맞지 않는 셈이다.
이들은 이런 상황에도 논산훈련소역 신설이 추진될 수 있는 이유는 공주역과 논산역 간 정차역을 조정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역 간 정차 횟수를 조정해 공주역에서 정차할 경우 논산역은 정차없이 통과하는 식이다. 정읍역과 익산역 사이에 생길 가능성이 있는 혁신도시 KTX역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하면 저속철 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실제 전라선의 남원~구례, 경남의 창원~마산~진해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차 정차해서 운행되고 있다.
역사 신설 비용에 대해서도 실제 설계를 해봐야 한다는 찬성론자의 시각이다. 이들은 기존 역을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 부용역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설계하면 되기 때문에 비용이 추정치보다 덜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견해는 다르다. 저속철 논란과 증차불가 등을 최대 단점으로 꼽고 있다. 실제 순동사거리 지역은 익산역과 13.8㎞, 정읍역과 28.3㎞에 위치한다. 부용역은 익산역과 7.4㎞, 정읍역과 34.7㎞ 떨어져있다. KTX가 300㎞/h를 낼 수 있는 역간 최소거리가 57.1㎞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짧은 거리다. "저속철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게 철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안으로 교차정차와 증차가 거론되지만, 사실상 증차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코레일 등에 따르면, KTX의 1일 왕복운행기준은 264회(주말기준)이다. 철도 전문가는 "국토교통부가 하루에 최대 투입할 수 있는 열차량과 병목구간을 고려해서 기준을 정한 것이기 때문에 변경이 불가능하다"며 "교차정차를 한다 해도 역 당 열차 정차횟수를 줄여야 하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탑승객들이 기존보다 더 불편을 느낄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 비용을 절감을 위해 기존 역사를 활용하는 방안도 부용역이 익산역으로부터 불과 7.4㎞ 떨어져 '역간 거리 부적합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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