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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고 낙랑군-낙랑국

파라클레토스 2009. 5. 25. 21:53

 [요령 낙랑군ㆍ한반도 낙랑국 병립]  설

이 견해는 지금의 중국 요령성(=랴오닝) 일대에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고,

한반도에는 따로 낙랑국이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이때의 낙랑국이 바로 최리의 낙랑국으로, 이 나라의 성격은 낙랑군과는 달리

재래의 토착적인 채가 농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낙랑군이 두어졌다는 패수 부근이 한반도의

대동강이 아니라 중국 요령 지방에 있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기왕에는 학계 일각에서 일부 중국 측 고문헌을 통하여 패수의 위치를 난하, 혹은 대릉하 지역으로

보며 논의를 진전시켰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에 있다가 후대에 대륙으로 이치(移置)된 이름뿐

낙랑ㆍ대방의 위치를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고 착각한 결과이다.

또 이제까지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유적ㆍ유물들은 이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 위 견해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최근 평양 지역에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다소(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란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평양 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여 인구조사를 행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낙랑군을 한반도 밖에서 찾는 논의는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낙랑군ㆍ낙랑국 병립] 설

 

이 견해는 한반도에 낙랑군과 낙랑국이 함께 존재했다 주장으로, 현재 학계의 대세를 이루는

의견이기도 하다.

이 견해는 낙랑군이 한반도 안에 위치했다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진다.

전한 말기에 낙랑군은 총 25개현이 있었는데, 전한 중앙정부로부터 거리도 멀고, 또 낙랑군이

관리하는 현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낙랑군 태수가 관할하는 25개 현 가운데 동쪽의 7개 현은 동부도위가 다스리고,

남쪽의 7개 현은 남부도위가 다스리는 체제가 된다.

(전한 말기에 낙랑군의 수령인 낙랑태수가 직접 다스리는 현은 11개였음)

 

 

 

---낙랑국 18개현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면서 변화한다.

광무제가 A.D. 30년에 전국의 도위를 폐지하고 낙랑군에 두어진 동부도위 역시 없어지고

7개 현의 토착 우두머리를 모두 현후(縣候)에 임명하여 후국(侯國- 일종의 작은 속국)으로 삼는다.


중요한 점은 이후부터 낙랑군 동쪽의 7개 현은 후한 정부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하는 7개의 작은 나라들이 되었고, 이 작은 나라들의 임금은 중국인이 아닌 토착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최리가 다스린 나라는 바로 이 7개 나라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낙랑이란 이름은 옛 고조선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그에 따라 최리와 지배층은 비록 자신의 나라가 작고 후한의 간섭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나라가 고조선의 중심 지역인 낙랑의 문화적ㆍ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들 나라의 원래 이름(아마도 ‘부조국’) 외에

 낙랑국이라는 이름도 별명처럼 사용했다고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한반도 서북부에 한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이 존재했고,

그 동쪽 언저리에 옹기종기 늘어선 소국들 중에 낙랑국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라가 존재한 셈이 된다.

 

[한반도 낙랑군→낙랑국 교체]설

 

 

이 견해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낙랑 지방’에 세운 군(郡),

즉 낙랑군이 있었는데, 토착 세력에 의해 낙랑 지역에 있었던 군이 없어지고, 낙랑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낙랑국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재 드라마 배경 역시 이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이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급박한 정국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전한이 왕망에게 멸망되고, 왕망이 세운 신(新)이 다시금 후한의 광무제에게 멸망하는

혼란기였고, 낙랑군 역시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러던 중 A.D. 25년에 토착세력인 왕조가 낙랑군태수 유헌을 죽이고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다. 당시 후한 중앙정부는 지방의 사정을 세세하게 전해들을 수 없으리만큼 혼란기였기에,

왕조가 실제로 군사를 일으킨 시기는 이보다 빠를 수 있다.

여하튼 왕조의 거병으로 이후 낙랑지역에서 중국세력은 퇴출된다.

 

 

 최리의 낙랑국은 이때에 ‘낙랑지역에 고조선을 부흥시킨 나라’였다.

 따라서 한반도 서북부에 존재했던 낙랑군이 토착세력,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선 유민의

 항쟁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 낙랑국이 세워진 셈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A.D. 37년에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켰으나,

A.D. 44년에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다시 낙랑지역에 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즉 낙랑군을 다시 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라 사료를 해석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후한 초엽 고조선 유민의 항쟁으로 탄생한 낙랑국은 얼마 후 남하하는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러나 7년 뒤,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지역에

다시 군을 설치하려고 군사를 보냈고, 고구려군은 패배하여 기존의

낙랑군이 부활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