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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파라클레토스 2009. 5. 25. 16:32

 

1946. 8. 6(음력) 출생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

1959. 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

1960. ‘우리 대통령 이승만’ 작문에 항의 백지동맹 주도

1963. 김해 진영중학교 졸업

1966.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53회)

1968. 3. 8. 육군 입대

1971. 육군 상병 만기제대 (을지부대) 권양숙 여사와 결혼

1975. 3.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 재직

1978. 5. 5. 변호사 개업 (現 법무법인 부산)

1981. 1. 22 부산일보 생활법률상담 연재 (1981. 1. 22. ~ 1982. 6. 15)

(미 문화원 방화사건 변론 후 법률상담 연재 중지)

1982. 6. 15. 미 문화원 사건 첫 공판

1984.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1985.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 2. 10.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가담 후 연행 (총 798명 연행)

1987. 2. 12. 4차례 구속신청 진상 조사

                - 노무현 변호사 4차례 연속 구속영장신청에 대한 대한변협과 부산변협 진상 조사

1987. 2. 13.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관련 구속자 인권유린 관련 조사

1987. 9. 대우조선 분규 관련 구속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

1988. 4. 28. 제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부산동구) 당선

1988. 6. 15. 변호사 업무 정지 해제

1988. 6. 부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결성 참여

1988. 12. 31. 5공 청문회 (전두환 증인에 대한 청문회 - 명패사건)

1990. 3. 3. 3당야합 규탄 및 민주당 창당 지지대회

1991. 9. 16. 신민, 민주 야권통합 (통합협상 대표)

1991. 9. 17. 통합민주당 대변인

1992. 3. 24. 제14대 총선 (민주당, 부산동구) 낙선

1992. 11.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물결유세단 단장

1993. 3. 11. 민주당 전당대회 (최연소 최고위원 당선)

1994. 10. <여보 나 좀 도와줘> 출판

1995. 2. 선거 조직관리 S/W ‘리더메이커’ 개발

1995. 2. 24. 민주당 임시전당대회 (민주당 부총재 선출)

1995. 5. 9.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 출마 선언

1995. 5. 12.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선출 (부산시당 전당대회)

1995. 6. 27. 부산시장 선거 낙선

1996. 1. 19. 종로 출마 관련 기자간담회

1996. 4. 11. 제15대 총선 출마 (민주당, 서울종로) 낙선

1996. 11. 10. 국민통합추진회의 창립대회

1997. 3. 7. 하로동선 음식점 개업

1997. 9. 3. S/W ‘우리들3.0’ 개발

1997. 9. 25.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 수필집 공저

1997. 11. 13.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기자회견 (부총재)

1997. 11. 26. 제15대 대선 수도권 특별유세단 (파랑새유세단) 단장

1998. 7. 21.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서울종로) 당선

1999. 2. 9. 제16대 총선 부산, 경남지역 출마 기자회견

2000. 1. 25. 새천년민주당 지도위원

2000. 4. 13. 제16대 총선 (부산 북구 강서 을) 낙선

2000. 5. 24. 대선출마 공식선언 기자간담회

2000. 6.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 창립총회

2000. 8. 7.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

2001. 7. 20. ‘자치경영연구원’ 부산본부 설립

2001. 12. 10.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및 후원회 / 대선출마 공식선언

2002. 1. 17. 노무현과 네티즌의 만남

2002. 3. 9. ~ 2002. 4. 27. 민주당 국민경선 / 대통령 후보 선출

2002. 10. 20. 개혁국민정당 발기인 대회

2002. 11. 3. 서울 국참 발대식 / 후보단일화 방침 발표

2002. 11. 25. 후보단일화 확정

2002. 12. 19. 제16대 대통령 당선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태몽)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어머니 말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5학년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때에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작문에 대해 ‘백지동맹’을 주도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6학년 때 ‘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였다.

합격하고 나서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결국 울산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또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 시절 원주의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에 고향 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 결혼을 했다.

“남들이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도 있습니다.

몇 길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속의 세계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이는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게 되었다.

“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반 학생들과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 두었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호사 ‘노변’입니다.”

 

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렸고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행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우조선의 이석규 씨가 파업중 거리시위를 나왔다

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일이 발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측의 편에서 상담을 해주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구석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의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에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야시절)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님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다가 운동가가 된 셈입니다.”

1988년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의 허삼수씨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정개하였는데,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 정주영, 장세동 씨 등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었다.

이는 노무현을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는 기반이 되었으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회의원 출마) “재야 몫으로 처음에 남구를 제의 받았는데,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했다.

마침 사람들이 피하던 지역이라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여소야대를 뒤엎고 지역분열을 조장하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노무현은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일관되게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년 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키게 되었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활약한다.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대의를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이후 낙선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국회의원 출발) “ 90년 3당 합당때 여당에 따라갔다면 국회의원이야 세 번, 네 번 하고, 장관도 일찍 하고 도지사 시장도 한번 지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잘못된 정치 풍토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저의 큰 자부심이고 행복입니다.”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도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92년 12월의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서는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최고위원 출마) “낙선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당원들이 나를 민주당의 가장 젊은 최고위원으로 뽑아준 것은 나의 낙선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보다 큰 시야에서 정치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1993년에 노무현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고집해 명칭 속에 들어간 ‘실무’라는 단어가 뜻하듯이 이 연구소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정치인의 계보 사무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풀뿌리민주주의의 기본을 세우고 지방화시대의 개발전략을 연구하는 명실항부한 연구소로 활동했다.

이 연구소는 오늘날 지방시대의 주역이 된 인재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대통령 선거 공약이 되었던 지방화시대의 발전전략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조직적으로 지방의원과 시민운동을 묶어보려는 노력으로 만든 것이고, 시민사회연구소로 개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민사회, 시민운동이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노무현은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제1회 지방동시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패배,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당시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도 우위를 보였고, 조순 서울시장후보가 부시장으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지만, 이를 단념하고 다시 부산에 도전했던 것.

선거초반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김대중 총재의 사실상 정계복귀와 지역등권론 등의 역풍으로 최종적으로는 낙선하고 말았다.

(부산시장 출마) “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민주당 깃발을 들고 도전했습니다. 부산시민들이 민주당을 탈당하면 뽑아 주겠다고 권유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일입니다. 정치인의 원칙과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5년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고 나서도 노무현은 민주당을 지켰다.

 이후 96년 1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 김원기) 활동을 하다가 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통추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11월에 ‘정권교체’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대선 기간동안 시청률 1위의 TV찬조연설을 하여 국민의 정부 탄생에 기여를 했다.

(통추)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은 우리들의 무한한 꿈이었다”

98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갈등의 현장에 적극 나서서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활동은 98년 8월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의 건, 99년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 중재의 건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자동차) “농성과 갈등이 장기화되어 그것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 이상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인기를 의식한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었고, 일부에서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중재에 실패할 경우 제가 뒤집어 써야할책임과 비난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갈등의 현장이 바로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생각을 바꿔놓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중재에 성공했고 분규는 끝났습니다.”

 

99년 초 다시 지역갈등을 악용한 집회가 이어지자 노무현은 다시 종로 지역구를 포기, 부산행의 결단을 내렸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많은 지지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여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정했다.

노사모의 자발적인 태동은 국민참여를 통한 정치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게 했다.

(부산 출마) “저는 결단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렸습니다만, 정치1번지 종로를 놔두고 사지 부산으로 갔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설 자리에 서야 합니다.”

 

2000년 8월에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노무현은 경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의 수평적 토론문화 확산, 다면평가등 인사평가 시스템 등을 만드는데 주력해 공직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으로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운 문화) “제가 결정하거나 우리 해양수산부 직원들이 결정하거나 그 결과는 비슷한 것입니다.

채택할 수 있는 시스템은 비슷합니다.

그 시스템을 채택하는 과정을 그분들이 토론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스스로 결정한 그 시스템을 그대로, 약속대로 했습니다.

제 불편은 제가 받은 쪽지를 소화할 수 없었다는 불편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 프로세스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 분들이 인사에 대해서 결과적으로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을 수용해 주었습니다.

 

노무현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후보수락연설)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노무현의 선거운동 방식은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 가신, 계보, 측근 없는 정치를 펼쳐 온 노무현은 국민이 후원금을 내고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

인 참여에 의해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카드결제, 휴대폰모금, 희망티켓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진행된 모금 행사는 기존의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뛰어 넘었으며, 미디어선거,인터넷선거, 정책선거의 원칙과 결합돼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선거유세)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하루 아침에 일류로 바꾸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정치혁명이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이 정치혁명을 성공시키겠다. 우리 정치를 왜곡시켜온 분열의 지역주의를 청산하고, 제왕적 권위주의를 몰아내겠으며,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부를 만들 것이다.

국민이 주인되는 국민참여의 정치, 모든 지역과 계층이 화합하는 국민통합의 정치,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신뢰의 정치, 깨끗하고 돈 안드는

투명한 정치를 실천하겠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선거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결국 노무현은 48.9%의 지지를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낸 국민의 승리이며 쾌거이다.

(당선소감)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신 민주당 당원 동지 여러분,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거듭거듭 감사드린다.

저의 당선을 위해 뛰어주시지 않은 분들이나, 저를 반대한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으로,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노무현 2003

2. 25 제 16대 대통령 취임식 3. 07 참여정부 국정토론회 3. 09 전국 지검 평검사와의 대화 3. 21 이라크전 관련 정치지도자 초청 간담회 3. 31 참여정부 인사시스템 개혁 로드맵 발표 4. 18 청남대 국민반환 행사 4. 28 이라크 파병장병 신고식 및 격려식 6. 02 참여정부 출범 100일 기자회견 6. 24 산학협력 및 청년실업 해소현장 방문 및 간담회 6. 30 참여정부 경제 비전에 관한 국제회의 기조연설 7. 03 신행정수도 관련 국정과제회의 8. 25 공직자와의 온라인 대화 9. 03 서민주거안정 관련 현장 방문 9. 20 태풍피해지역 현장시찰 12.17 동북아 물류중심 항만 배후단지 투자유치 설명회 12.24 서민생활 현장방문

 

노무현 2004

1. 13 국가균형발전 3대 특별법 서명식 1. 20 근로자 현장방문 및 오찬 1. 29 지방의회 균형발전시대 선포식 2. 10 노사정위원회 본회의 2. 23 농업.농촌 종합대책 보고대회 2. 27 참여정부 경제사회비전 국제세미나 기조연설 및 토론 3. 05 혁신.성공 재래시장 방문 3.12~5.14 탄핵 기간 5. 15 업무복귀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5. 21 중소기업 대표와의 간담회 5. 25 대기업 대표와의 간담회 5. 31 노사대표 간담회 6. 18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전략 보고회 9. 14 신행정수도위원회 임명장 수여식 10.19 매입 임대주택 입주현장 방문 10.28 국가균형발전 추진을 위한 시·도지사 간담회 11.03 외국인 투자기업 CEO 만찬 12.14 균형인사 실천 보고회 12.20 2004 정부업무 평가 보고회

 

노무현 2005

1.27 제주 세계평화의섬 지정 서명식 2.02 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촉장 수여식 2.25 취임 2주년 국회 본회의 대통령 국정연설 3.09 투명사회협약 체결식 3.24 국회.여야정당 지도부 초청 만찬 3.28 2005 유엔 아.태 환경과 개발 장관회의 개회식 4.06 국가고용지원서비스 혁신 보고회 4.27 한일수교 문서공개 대책 민관공동위원회 오찬 4.30 국가재원배분회의 5.21 농산촌관광마을 체험 5.24 정부혁신세계포럼 개회식 5.31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 임명장 수여식 10.13 농촌사랑 도·농상생 한마당 11.01 중소기업정책 혁신성과 보고회 11.03 방과후 학교 현장방문 12.2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식 12.29 사회복지 현장방문 및 간담회

 

노무현 2006

1.2 폭설피해 복구현장 방문

1.12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 개청 기념행사

2.9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간담회

2.12 북악산 개방 시범답사

2.22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 임명장 수여식

3.23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3.30 인천공항 자유무역지역 개장 행사

4.3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4.25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담화

5.4 방과후 학교 확산을 위한 교육감·교육장과의 대화

5.25 결혼이민자 가정 방문

7.13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 위원회 위원 임명장 수여식

7.19 수해 및 응급복구 현장 방문

8.11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지원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식

8.24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

8.30 비전 2030 보고회의

9.20 사회서비스분야 좋은 일자리 창출 추진보고회

9.29 경복궁 신무문·집옥재 개방행사

10.17 혁신도시건설실행전략 보고회

10.27 2006 지방행정 혁신토론회

11.2 외국인 투자유치 보고회

11.29 균형발전 정책점검 및 누리사업 성과보고회

 

노무현 2007

1.3 2007년 경제점검회의 1.9 개헌 관련 특별담화 2.7 2단계 균형발전정책 대국민보고회 2.22 사회서비스 일자리창출 보고회 3.15 중소기업 현장 방문 4.3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한국경제’ 워크샵 4.5 제62회 식목일 행사 및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 행사 4.6 EBS 영어방송 교육채널 개국 행사 및 특강 4.12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한국경제’ 2차 워크샵 4.27 한우농가 방문 및 간담회 5.23 제주 감귤농가 현장방문 및 간담회 6.2 참여정부 평가포럼 6월 월례 강연회 6.15 FTA 국내대책위원 위촉장 수여 및 환담 6.21 농업인 단체장 및 농민 CEO 간담회 6.27 재래시장 정책 성과 보고회 7.13 한·EU FTA 추진현황 및 대응방안 보고 7.20 행정중심복합도시 기공식 7.25 2단계 균형발전 선포식 9.5 남북정상회담 자문위원단 간담회 9.19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성과보고회 9.20 혁신도시 기공식 10.2 남북정상회담 대국민메시지 발표 10.4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10.24 태안관광레저형 기업도시 기공식 11.9 월성 원자력 환경관리센터 착공식 12.11 태안 유류 오염 사고 현장 방문

 

노무현저서

나는 감히 말하겠다. ‘역경 속에서 연마한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의 정치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낮은 사람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한 사람. 그가 곧 링컨이다. 그는 옭은 길을 갔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가 성공했기에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옳지 못한 길을 가야 하고, 정직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의식, 이러한 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한 차원 높은 사회발전도, 역사발전도 불가능하다. 이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자 정치를 하는 이유이다.

나는 링컨에 대해 숙제를 풀고 싶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링컨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관련 자료를 모으고, 글을 정리하기로 했다. 올해 봄을 넘기면서 초고가 완성됐다. 가을이 되자 그 글을 더 이상 묵혀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이 남북과 동서로 분열되어 쟁투가 끊이지 않는 오늘의 이 시대는 링컨이 직면했던 시대와도 유사하지 않은가. 링컨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설 수 없고, 스스로 분쟁하는 집안은 설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내가 ‘동서간의 지역통합이 없이는 개혁도, 통일도 모두 불가능하다. 통합의 문을 통과해야만 개혁도, 발전도 가능하다’고 한 주장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되길 바란다.

이 책은 나의 관점을 링컨의 삶에 투사한 것이다. 글이 비록 부족하고 이런저런 한계가 있더라도 세상에 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념한 독자는 이렇다. 정치에 대해 가볍게 논평하는 사람, 정치를 가볍게 생각하고 덤비는 사람, 정치를 대강 대강하는 사람, 개혁이 잘 안 되고 있다고 비평하는 사람, 그리고 정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정치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링컨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다. 정치에 대해 답답해하는 모든 사람에게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을 만나보라고 진심으로 권한다. 내가 그랬듯이 정치와 역사를 보는 안목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문 : 왜, 다시, 링컨과 만나야 하는가

프롤로그 :백악관으로 가는 길

청소년기의 스승들

일찍 잃은 어머니 | 아버지의 모험정신 | 새어머니의 사랑과 훈육 | 장작 패는 사람

4. 내 마음의 풍차

내 마음의 풍차 | 이놈 역적 아니야 | 노가다의 짝사랑 | 저,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 사법 고시 수험기 | 돈 잘 버는 변호사와 부림 사건 | 삶의 바로 그 현장으로 | 사람 사는 세상

젊은 날의 길 찾기

뚝심과 재담 있는 점원 | 생활고와 주의원 도전 | 정직이 곧 지혜 | 이별 뒤에 온 사랑

꿈꾸는 지방의원

기회를 잡은 초선 | 역량을 시험받다 | 변호사의 쓴맛 단맛 | 넓은 무대로 오르는 디딤돌

영광과 그늘

링컨씨, 워싱턴에 가다 | ‘뜨거운 감자’ 노예제 | 짧게 끝난 하원 생활 | ‘정직한 늙은이 에이브’ | 정계 복귀를 노리며

혹독한 담금질

긴 논쟁의 뿌리 | 국론은 찢어지고 | 어이없고 억울한 낙선 | 절반은 노예이고 절반은 자유 | 오판과 궁색한 변명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더글라스와의 대논쟁 | 정의가 힘의 근원 | 역사의 대세와 대통령 링컨

갈등이 전쟁으로

섬터 요새의 포연 | 링컨의 용인술 | 국민의 정부는 이긴다 | 연방군 총사령관 링컨 | 겸손한 권력, 강한 정부

탄환으로 정권을 세울 수 없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오 | 국민통합당의 출범 |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 살아 숨쉬는 정치

외교를 보는 눈

위기를 극복한 통찰력 | 갈등은 훌륭한 결정의 도구

연방통합과 노예해방

도전받는 온건론 | 벽에 부닥친 보상안 | 신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 노예해방 선언

하나된 미국으로

신뢰의 리더십과 그랜트 장군 | 재선의 그 순간에도 |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 | 관용에서 나온 국민통합 | 의무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하나된 미국으로

 

우리 정치사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남다른 색깔을 갖는다, 고졸 출신 사법고시 합격, 30대 중반을 넘어 인권 변호사에로의 변신, 5공 청문회에서의 조리있고, 당당한 질문, 부산에서의 연이은 낙선, 그러고도 당선자보다, 더 당당하게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그의 불가사의한 정치역정, 조선일보와의 전쟁, 그리고 유력한 대선후보... 그는 정말 남다른 색깔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무현이라는 인물에게 주목한 것은 이런 색깔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주는 남다fms 무게 때문이다.

30대 중반의 변호사가 피고인 20대 대학생의 삶에서 인권을 배우고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력, 재벌, 언론 앞에서도 늘 당당한 그의 자세, 3당 합당을 거부하고 낙선을 각오하고 지역감정을 깨트려 보겠다던 그의 도전에는 분명 삶을 관통하는 일관성과 남다른 무게가 있다.

노무현에게는 언제나 상반된 평가가 함께 따라 다닌다. 그 평가는 동전의 앞뒤를 뒤짚는 얄팍한 정도가 아니라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처럼 아득한 대척적(對蹠的) 평가이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1만 명에 가까운,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이라는 이름조차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노무현은 너무 진보적이라 위함하다고 경계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노무현도 어쩔 수 없는 보수 정치인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사람을 두고, 공존할 수 있을까? 혹시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우리 사회의 어떤 척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사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시대의 인물읽기]를 펴내면서

 

[노무현]을 펴내며 / 임형욱(시인)

 

왜 노무현인가?/천정배(국회의원)

 

일찍 잃은 어머니 | 아버지의 모험정신 | 새어머니의 사랑과 훈육 | 장작 패는 사람

인간 노무현

- 인터뷰 : 인간 노무현, 흔들리지 않는 게임의 법칙 / 유시민(시사평론가)

- 심리학자가 본 노무현 : 바보 vs 배짱 좋은 남자 / 정혜신(정신심리학자)

- 아들이 본 노무현 :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 노건호(노무현의 장남)

- 자전기록 : 내가 선택한 길을 내 뜻대로 걸었다 /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 정치비평 : 한국정치사 속의 노무현 / 손혁재(정치평론가)

- 현장비평 : 가장 상식적인 원칙주의자 / 강민석(중앙일보 기자)

- 언론비평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 인물비평 : 인간 김대중, 문익환 그리고 노무현 / 문성근(영화배우)

- 노무현 비판적 읽기 : 노무현 문제의 담은 민주노동당이다 / 이광호(진보정치 편집위원회)

 

노무현 읽기

- 만평 노무현 : 노무현 캐리커처 외 / 박재동(시사만화가), 신작만평 외 / 장봉군(시사만화가)

- 무협 노무현 : 대권무림 / 화미남자(무협작가)

- 노무현 글모음 : 과정도 하나의 작업이었다 / 고시계 외

- 노사모 :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 명계남(노사모 회장)

- 네티즌 글모음 : 옛 시인이 꿈꾸는 대통령: 친구같은 대통령 / 노마아빠 외

21세기를 시작하는 첫 번째 화두는 ‘리더십’이다. 모든 곳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뒤져봐도 ‘리더십’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몇 권씩이나 한꺼번에 올라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 다시 내가 ‘리더십’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 한 권을 더 보태려 한다.

나는 2000년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01년 3월 26일 퇴임했다. 8개월이 채 안되는 재임기간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해양수산부를 이끌었고, 해양 수산 항만의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 전국을 뛰어 다녔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어촌의 주름진 할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민원인을 만나기도 하고, 해양수산부와 관련 부처의 각급 공무원을 만나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정책결정의 한계와 어려움 때문에 고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공무원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의 장관은 어떤 조건에서 책임을 맡게 되며, 어떻게 장관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공무원의 리더십이 행정부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인간과 조직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을 하나하나 실천에 롬겼다. 이 책인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실천했던 나의 리더십과 지식경영에 대한 보고서이다.

 

리더십을 다시 생각한다

제1장 리더십의 원리 : 신뢰로 조직을 움직인다

제2장 리더십과 문제해결 : 전략적으로 정책을 판단한다

제3장 리더십과 조직관리 : 확신으로 내부 추진력을 강화한다

제4장 리더십과 인사관리 : 조직의 내부역량을 강화한다

제5장 리더십과 마케팅 : 설득과 홍보에 열성을 다한다

제6장 리더십의 목표 : ‘국민을 위해’, ‘국민과 함께’

제7장 리더십의 핵심 : 리더로서의 인식을 분명히 한다

제8장 리더십과 비전 :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를 향하여

부록 - 노무현의 리더십 분석 : 노무현 깊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