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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佛甲寺-부처佛 10간의 처음 甲>

파라클레토스 2009. 5. 13. 14:12

한국 불교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후 평양(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열반종(涅槃宗)·삼론종(三論宗)·천태종(天台宗)·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혜자(惠慈)·운총(雲聰)·혜편법사(惠便法師)·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도림(道琳)·덕창(德昌)·혜량(惠亮)·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한산불사(漢山佛寺)·경복사(景福寺)·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계율종·성실종(成實宗)의 세 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도림(道琳)·혜미(惠彌)·도흔(道欣)·담혜(曇慧)·도령(道寧)·상휘(常輝)·의각(義覺)·방제(放濟)·다상(多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 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 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망덕사(望德寺)·법주사(法住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월정사(月精寺)·부석사(浮石寺)·불국사(佛國寺)·장안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보현사(普賢寺)·범어사(梵魚寺)·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종·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의 13층탑, 화엄사 쌍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 석탑 및 6각다보탑, 화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불교전래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 6월 어느 날. 신하로부터 진나라의 부견 황제가 보낸 사신과 승려 일행이 궁궐에 당도했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은 소수림왕은 친히 궁궐에 있는 성문이라는 곳까지 나가 그들을 맞았다. 왕실 밖에까지 마중 나온 왕을 본 일행은 감격했고, 이 가운데 승려 순도가 앞으로 나서 “진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고구려에 불법을 전해드리기 위해 찾아온 승려 순도입니다. 진나라 황제께서 불상과 경문을 전해드리라 하여 가져왔습니다.”라며 예를 갖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때가 서기 372년.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온 날이다. 이어 2년이 지난 374년에는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아도를 보내왔고, 소수림왕은 이때부터 사찰을 세우기 위한 대대적인 불사를 진행했다. 왕으로부터 “겸손한 마음으로 예를 갖춰 불상을 대할 것”을 하명 받은 신하들은 “대왕마마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불사이니 한 치의 잘 못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며 사찰 건립 불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독려했고, 드디어 이듬해 2월 불사가 마무리되었다.  

 

375년 2월 마침내 고구려 최초, 아니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이 세워진 것이다.

바로 이 사찰이 한국불교에서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이 거주하며 대중에게 법을 설하기 시작한 최초의 절 초문사(肖門寺)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사찰 이불란사(伊弗蘭寺)가 동시에 건립됐다.  

 

 

소수림왕은 사찰이 건립되자 진나라에서 온 순도를 초문사에 머물게 하고, 전진에서 온 아도를 이불란사에 거주케 하여 사찰을 여법하게 운영할 것을 당부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대목을 ‘(소수림왕 5년)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지어 순도가 있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문사는 일부에서 성문사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후기의 고승 각훈이 삼국시대부터 당시까지의 고승들의 전기를 정리하여 편찬한 불교 관련 인물역사서인 『해동고승전』에서는 ‘순도가 처음 고구려에 왔을 때 소수림왕이 성문이라고 하는 문에서 순도 스님 일행을 맞이했고, 그래서 그 성문을 헐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기 때문에 성문사(省門寺)로 불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와 이불란사 세워진 지역은 어디일까. 

 

 

소수림왕이 왕위에 오른 시기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다.

때문에 당시 고구려와 진나라가 상호 서로의 남과 북이 되는 국경지역의 평화유지에 공감대를 형성, 불교 교역을 통해 우의를 다졌던 상황을 고려할 때 고구려가 진나라의 호의를 받아들여 처음 지은 사찰은 도읍인 국내성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고구려 도읍이었던 국내성은 현재의 중국 길림성 집안이다.

이 곳에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 2개가 동시에 세워졌던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이 지역에서 옛 고구려 사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집안 역 앞에 민주유적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이것이 고구려의 절터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천도할 것을 고려해 사찰 두 곳을 모두 지금의 평양에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근거 자료가 없는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고구려에서 초문사와 이불란사 이후 건립된 사찰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2년(393)조에 나타난다. 여기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새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세운 9개의 절은 왕실이나 귀족들만을 위한 절이 아니라 일반 백성을 위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나타난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이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찰들이 각기 소유한 사지에 따르면 『전등사본말사지』에 근거해 강화 전등사가 381년 아도 화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전등사본말사지』 이외의 문헌에서 창건 연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라 385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영광 불갑사가 문헌에 나타난 현존 최고(最古)의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