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925 - 975)
고려 제4대 황제. 자는 일화이며 이름은 소이다.
태조의 셋째 아들로 모후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이다.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왕자 시절 정종과 더불어 황실의 핵심인물이었고,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후 정종의 견제를 받아 파락호처럼 행세하며 일신을 보존했으며, 보위에 오른 뒤에도 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몸을 낮춰 관망의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전야와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7년간 그는 정관정요를 숙독하며 정치적 안목을 키웠고, 화엄종과 법상종을 융합하는 '성상융회' 사상을 받아들여 민심 안정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토대구축이 끝나자 그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개혁의 핵심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이었다.
후주 출신의 쌍기를 등용하여 호족세력의 경제력과 무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노비안검법을 마련했고, 조정내의 훈구세력에 맞설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는 호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광종은 대대적인 피의 숙청으로 화답했다.
왕권강화와 더불어 광종의 또다른 관심사는 고려의 대외 위상을 높히는 문제였다.
그는 '광덕(光德)'과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했으며, 개경을 황도로 칭하면서 고려가 중국의 주변국이 아닌 황제가 거하는 중심국임을 대내외에 알렸다.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시책을 펴기도 했고, 고려의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과정에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해 내국 관료의 원망을 들었으며, 역모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대목왕후 황보씨
광종의 황후. 태조의 셋째딸이며 어머니는 신정왕태후 황보씨이다.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겸비해 광종의 사랑을 받았다.
남편 광종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그녀 또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훗날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려 했을 때 황주 호족 세력의 입장에 서서 심하게 반발해 사이가 멀어진다.
소생으로는 경종, 효화태자,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문덕왕후가 있다.
혜종(912 - 945)
광종의 이복 형으로 고려 제2대 황제다.
자는 승건. 이름은 무(武). 고려 태조 왕건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이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태조가 죽자 보위에 올랐으나 강력한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그의 두 후견인인 왕규와 박술희가 서로 반목하는 탓에 힘을 잃은 혜종은 왕요(정종)일파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지만 결국 왕요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정종(923 - 949)
광종의 동복 형으로 고려 제3대 황제다.
자는 천의, 이름은 요(堯). 강인하고 고집스런 성품이면서 권력욕이 대단했다.
숙부 왕식렴과 아우 광종의 도움으로 왕규, 박술희 등 정적을 제거하고, 혜종을 시해한 끝에 정권을 잡았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서경천도를 천명했다. 고구려 고토 회복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즉위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개경의 민심이 등을 돌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는 늘 불안해 했고 친아우인 광종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복 형인 혜종을 살해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병상에 눕게 되는데, 자신의 후견인 왕식렴이 죽자 그도 두 달 후에 광종에게 보위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문공왕후 박씨
정종의 제1황후. 아버지는 삼중대광 박영규이다.
문성왕후 박씨
정종의 제2황후. 삼중대광 박영규의 딸이다.
문공왕후와는 자매간이다. 정종과의 사이에 왕자 경춘원군과 성명 미상의 공주 1명을 두었다.
청주남원부인 김씨
정종의 제3비. 원보 김긍률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주원부인과 자매간이다.
의화왕후 임씨
혜종의 황후. 진주 임씨로 대광 희의 딸이다. 10세의 혜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태자비가 되었고, 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흥화군과 경화궁부인, 정헌공주를 두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
혜종의 제2비.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청주원부인 김씨
혜종의 제3비. 청주사람으로 원보 김긍률의 딸이며 정종의 제3비 청주남원부인과 자매간이다
장화왕후 오씨
태조의 제 2 황후. 나주 사람으로 다련군의 딸이다.
출신이 미천하여 여러 가지 고통과 설움을 겪었으나 결국 자신의 뜻대로 태자 무를 보위에 올려놓아 왕실을 휘어잡는 억척스런 여인이다.
그러나 태조 사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소생들에의해 자신의 아들 혜종이 살해당하는 비통한 순간을 목도하게 되고, 그후 궁을 떠나 한많은 생을 마친다.
신명순성왕태후 劉(유)씨( ? - 951년 이전 사망)
광종의 어머니이자 태조의 제3비.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태조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소생을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태조 사후의 정치적 격변기에서 장화왕후 오씨와 혜종에 맞서 결국 자신의 아들 정종을 옥좌에 오르게 한다.
문원대왕 정
광종의 친 아우. 이복남매인 문혜왕후 유씨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천추전군과 아지군이며, 딸은 경종의 두 번째 비가 된 헌의왕후 유씨이다.
낙랑공주 (930년경 출생 추정)
광종의 누이. 왕건의 맏딸이다. 고려가 신라와 합병하자 경순왕과 정략 결혼한다. 일명 신랑궁부인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라 불렸다.
경종 (955 - 981)
광종의 장남으로 고려 제5대 황제. 유
부왕인 광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된 호족세력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왕과의 관계마저 원활하지 못하여 불안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성색에 몰두하였으며, 위기를 좋아하여 종교가 쇠잔하였다.
헌숙왕후 김씨
경종의 제1황후.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딸. 경종의 입장에서 보면 고종 사촌이 되는 여인이다.
헌의왕후 유씨
경종의 제2황후. 종실인 문원대왕 정의 딸. 이 여인 역시 사촌 관계이다.
문덕왕후 유씨
광종의 딸로 성종의 제1황후. 할머니 성을 따라 유씨라 칭하였다.
처음 태조의 손자이며 사촌간인 흥덕원군 규에게 출가하였다가 사후에 다시 성종에게 재가하였다.
신정왕태후 황보씨 (? - 983)
태조의 제4비. 제공의 딸이다.
태조 즉위 후 두 번째로 왕비가 되어 대종 욱과 광종비 대목왕후를 낳았다. 외손은 경종이며, 친손은 성종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성종을 키웠다.
대종 욱(? - 969)
태조의 일곱째 아들. 어머니는 신정왕태후 황보씨이다. 이복누이인 선의태후 유씨와 결혼하여 성종과 경종비인 헌애왕태후(일명 천추태후)와 헌정왕후(현종의 어머니)를 두었다.
선의왕후 유씨(생몰년 미상)
대종 욱의 부인. 태조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둘째딸이다. 자녀의 성장을 돌보지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죽었다.
성종(960 - 997)
대종 욱의 둘째 아들로 고려 제 6대황제다. 치
헌애왕후(964 - 1029)
대종 욱의 딸. 경종의 제3황후. 훗날 자신의 소생인 목종이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권욕이 강했던 그녀는 섭정을 한다.
일명 천추태후라 불리우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는 여인.
헌정왕후 황보씨(? - 992)
대종 욱의 딸. 경종의 4황후. 훗날 경종이 죽은 다음에 친정에서 머물다 안종 욱과 간통하여 임신, 현종을 낳았다.
효은태자
태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개국 일등공신 유금필의 딸 동양원부인이다.
성품이 사나워 군소들과 사귀어 몰래 다른 생각을 품으므로 광종이 죽음을 내렸다.
소광주원부인
태조의 제16비. 대광 왕규의 딸이며 광주원군의 어머니이다.
즉위 전
왕식렴 (? - 949)
태조 왕건의 종제다. 왕건이 즉위한 후 황폐한 평양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대도호부로 삼았을 때, 그 책임자로 선정되어 서경세력의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정종과 손을 잡고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가 박술희를 제거하고 왕규와 그 무리 300여 명을 제거하여 정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최지몽 (907 - 987)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특히 천문과 복서에 정통하였다. 항상 왕건을 쫓아 종군하여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태조의 측근 참모로서 총애를 받았다. 혜종 즉위후 정종의 편에 서서 정종의 즉위를 도왔으나, 광종대에 귀법사에 행차한 광종을 호종하면서 취중에 무례한 행동을 하여 11년 동안 외길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박수경 ( ? ~ 964 )
대광 박지윤의 아들. 태조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왕건 사후 왕식렴과 손을 잡고 정종 즉위에 큰 공을 세우고 대광에 올랐다. 그러나 광종대에 아들 승위, 승경, 승례 등이 참소로 옥에 갇히자 화병으로 죽었다.
박수문 (생몰년 미상)
대광 박지윤의 아들. 박수경의 형. 왕건의 유지를 받든 삼재신의 한 명이었다. 아우 박수경과 함께 정종을 도와 대광이 되었고, 서경왕성 및 철옹, 박릉, 삼척, 통덕 등에 성을 쌓았다.
왕규 ( ? - 945 )
광주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학식을 겸비한 문장가였다. 염상·박수문과 함께 왕건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세 재신 중의 한 사람으로 왕건이 죽자 그 유명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혜종이 즉위한 뒤 왕실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정치권력을 장악해 혜종의 또다른 측근인 박술희와도 대립했다. 그의 전횡은 다른 호족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경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왕요 일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처형된다.
박술희 ( ? - 945 )
혜성군 출신의 무장. 태조를 섬겨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대광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태조가 임종할 때 군국의 일과 태자를 새 왕으로 옹립, 보좌할 것을 유언받고 이어 훈요십조를 전수 받았다. 그러나 왕규와 대립하여 혜종을 보위하라는 왕건의 유조를 지키지 못했다. 왕식렴의 반란군이 궁을 쳐들어 왔을 때 괴력을 발휘하며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생포돼 갑곳으로 귀양을 가다 살해되었다.
김긍률(생몰년 미상)
청주 출신의 호족. 혜종비 청주원부인과 정종비 청주남원부인의 아버지이다. 혜종과 정종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시세가 정종과 서경세력의 편으로 기울자 그 쪽에 가담하였다. 훗날 광종에게 숙청된다.
박영규(생몰년 미상)
견훤의 사위이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자 아내와 비밀리 상의한 뒤 고려에 사자를 보내어 귀부의 뜻을 전했다. 그는 세 딸을 왕건과 정종에게 각각 시집보냈는데, 왕건의 부인 동산원부인과 정종비 문공왕후
문성왕후들이다. 그러나 그는 정종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했고, 고향 승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친다.
국대부인 (생몰년 미상)
견훤의 딸. 장군 박영규의 부인이다.
염상 (생몰년 미상)
무장. 고려의 개국 2등 공신. 공신집단의 대표격으로 왕규, 박수문과 함께 왕건의 유지를 받든 삼 재신중 일인이다. 박술희와 함께 최후를 맞는다.
최언위(868 - 944)
최치원·최승우와 더불어 삼최라 불리웠던 문사. 광윤, 행귀, 광원, 행종, 등의 아들을 두었다.
--즉위후--
쌍기(생몰년 미상)
본래 후주인으로 후주에서 벼슬하여 산둥반도 등주에 있는 무승군의 절도순관, 장사랑, 대리평사를 지냈다. 광종 7년에 후주의 봉책사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는데, 병이 낫자 광종이 보고 그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로부터 신하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원보한림학사에 임명하였다. 그는 후주에서 쌓은 경륜으로 광종의 개혁작업을 도왔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이 그의 건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러 차례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서필(901-965)
이천 출신의 문신. 광종이 쌍기 등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자 이를 서슴없이 비판한 기개 있는 선비였다. 인품이 높고 강직해 훈구세력은 물론, 광종도 그를 아껴 중용했다. 벼슬이 내의령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서희와 손자 눌이 모두 재상을 지냈다.
왕융(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학자. 광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12회에 걸쳐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광종 6년에 후주 세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상의 관직을 가지고 고려 사절로 후주에 다녀왔다. 쌍기와 함께 광종의 측근으로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손소(생몰년 미상)
광종대의 문신. 신라 6두품 출신으로 광종 원년에 대상의 고위 관계를 가지고 외국 사신의 접대를 관장하는 예빈성과 문한기구인 원봉성의 장으로서 지제조를 겸했다.
서희(942 - 998)
서필의 아들로 광종 11년 18세의 나이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 내의시랑 등을 거쳐, 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활약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다.
신강(생몰년 미상)
후백제 견훤의 신하로 있다가 태조에게 항복하여 왔다. 광종 즉위년에 원윤으로 왕명을 받아 원보, 식회와 함께 주현의 세공 액수를 정하였다.
최광윤(생몰년 미상)
최언위의 아들이다. 빈공진사로 진(晉)나라에 유학가던 도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관직을 받았다. 이 무렵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을 알고 이를 고려에 보고하여 정종이 30만 명의 대군으로 광군(光軍)을 창설, 서경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최행귀(생몰년 미상)
최언위의 아들이다. 광종초에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맡았으나 훗날 광종의 개혁에 반대하다 처형당함.
최승로(927 - 989)
고려 초기의 문신. 신라 6두품 은함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문명을 인정받아 문장과 학문계통의 관직생활을 했으며 이와 동시에 당대 제일의 지식인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종대에는 학사직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쌍기의 등장 이후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냈다.
김악(생몰년 미상)
신라, 후백제, 고려에서 각각 벼슬을 한 육두품 출신의 문신. 태조의 유조를 기초하였으며, 얼마 뒤 상정전에서 국상이 발표되자 유조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광종대에 한림학사로서 수병부령을 겸하였다.
김정언(생몰년 미상)
고려 전기의 문신, 학자. 광종대에 재상을 지냈다. 한림학사, 사단금어대를 지냈으며, 왕의 중요한 글을 거의 전담하였다.
최섬(생몰년 미상)
광종이 관리선발을 위하여 후주인 쌍기를 등용하여 처음 과거를 실시할 때 갑과에 급제하였다.
탄문(900 - 975)
광주 출신의 고승. 자는 대오. 성은 고씨. 계행이 매우 높아 태조가 별화상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법력을 빌려 광종을 낳아 이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혜종과 정종이 지극히 공경하여 예로써 받들었으며, 처음으로 국사, 왕사의 2사제도가 실시되자 혜거를 국사로, 그를 왕사로 삼아 귀법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974년에는 국사가 되어 가야산으로 옮겨갈 때 왕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하였으며, 어의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다음해 3월 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균여(923 - 973)
고려의 고승. 성은 변씨이다. 화엄교리의 거장이었을 뿐 아니라 신이한 자취를 남긴 고승이었다. 광종에 의해 창건된 귀법사의 주지로서 향화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폈다.
혜거( ? - 974)
고려 전기의 고승. 성은 박씨. 초명은 지회. 그의 도가 높아왕이 여러 번 청하여 법문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정종 2년에 왕사가 되었고, 광종조에 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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