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고인을 못 뵈어도 예던 길 앞에 있네/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
-이황 ‘도산십이곡’ 중 제9곡
도산서원
퇴계 이황(1501~1570)은 50세에 관직을 물리고 고향 도산으로 돌아왔다. 간간이 나라의 부름을 끝까지 물리칠 수 없어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7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에 머물며 학문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 기실 퇴계는 33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선 이후 마음은 줄곧 계산(溪山)을 향해 있었다. 46세 때는 고향 시냇가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향리의 이름이자 자신의 호인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바꾸며 퇴거(退居)의 뜻을 다지기도 했다. 그리고 귀거래 후 20년 동안 퇴계는 가장 행복했다.
이렇듯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눈길 닿는 것마다 운치를 즐기다가 문득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이황 ‘도산기’에서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스스로의 학문도 완성해 나간다. 이 기간 제자이기도 한 고봉 기대승과 8년에 걸쳐 벌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논쟁은 조선 성리학을 완성하며 우리 정신사의 절정을 이룬다. 퇴계는 26세 연하의 제자와 논쟁을 하면서도 진지함과 예를 잃지 않았고, 끝내는 그의 의견을 수용해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는 진정한 대가의 면모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소요와 교유를 통해 무려 2000수가 넘는 시를 남기기도 한다.
퇴계 예던길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 동북쪽 수십 리 되는 곳에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 중간에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집이 있다. 새벽에 그 집에서 출발해 산에 오르면 한낮이 되기 전에 산허리에 다다를 수 있다. 이리 보면 이 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다른 지방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집 산인 셈이다.
-이황 ‘주세붕의 청량산에 관한 글에 부쳐’에서
퇴계 예던길(녀던길, 가던 길)은 퇴계가 만년에 사색을 하며 즐겨 거닐던 옛 오솔길이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곳곳에 퇴계의 시심을 담고 있다. 백운동에서 시작한 그의 시심은 미천장담, 경암, 한속담, 석간대, 관란헌을 거쳐 청량산 밑자락에까지 이른다.
한참 동안 기억하여 보네 어릴 때 여기서 낚시하던 일을/삼십 년 긴 세월 동안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내 돌아와 보니 알아볼 수 있네 옛 시내와 산의 모습을/시내와 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리라 나의 늙은 얼굴을 알아보지는 -이황 ‘미천장담’
후인이 ‘퇴계가 가던 길’을 따라가는 길은 도산면 원촌리 단천교에서 시작하여 전망대를 거쳐 가송리의 농암종택과 고산정에서 마무리된다. 농암종택은 퇴계의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다. 농암은 연산군 및 중종 때 형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은퇴 후에는 고향에 내려와 농부를 자임하고 일개 서생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해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천상 시인으로, 종택이 있는 분강의 강가에서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노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를 즐겼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청량산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갈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이현보 ‘효빈가’
1542년 가을, 농암 늙은이 비로소 인끈을 벗고 국문을 나와 한강 기슭에서 친구들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배를 탔다. 술에 취해 배 안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문득 도연명의 ‘배는 표표히 바람에 나부끼고’의 구절을 읊조리자니, 돌아가는 흥겨움이 더욱 깊어져 스스로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에 노래를 지으니, 이 노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은 까닭으로 ‘효빈가’라 했다.
-이현보 ‘귀전록(歸田錄)’에서
분강에는 농암이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차라리 ‘귀머거리바위(聾巖)’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는 바위와 더불어 ‘점석’이라는 자리바위가 강 가운데 있었고, 이들 바위에서는 농암 특유의 강호풍류가 펼쳐졌다.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이 연출된 이 모임에는 퇴계를 비롯하여 모재 김안국, 회재 이언적, 신재 주세붕, 송강 조사수, 어은 임내신, 금계 황준량 등 많은 인물들이 회동하였다. 그야말로 ‘강호지락(江湖之樂)’의 낭만적이면서도 탈속적인 한국적 풍류가 펼쳐졌던 것이다.
농암종택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여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는 분강 한가운데 드리워 있고, 강물은 여기에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그 아래는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목금(木禁, 나뭇가지로 엮어 임시로 만든 조그만 뗏목)에 올려 띄우니 경호(퇴계의 자)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중거(금계의 자)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모두 부러워했다.
-이현보 ‘취시가(醉時歌)’에서
고산정(孤山亭)은 퇴계가 아끼던 제자 금난수가 지은 정자로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껏 남아있다. 고산정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은 홀로 외로워 홀로 즐겁다. 어떤가. 비록 속진에 전 몸이라 할지라도 옛사람의 정신이 소슬한 길을 따르며 마음은 새로워진다. 그 길에서는 학문도 시심도 삶과 다르지 않다. 퇴계도 ‘도(道)란 가까이 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한다. 어찌 일상생활 밖에 다른 도가 별도로 있겠느냐’ 했다. 고인이 예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예고 어쩌겠는가.
글·사진ㅣ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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