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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고향 -퇴계, 청량에 길을 묻다♣ 2011.01.02

파라클레토스 2011. 3. 21. 04:27

 

♣학자의 고향 -퇴계, 청량에 길을 묻다♣

 

조선 중기 4임금을 모시며 79번 벼슬을 사양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이황

퇴계는 벼슬대신 청량산을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가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청량산

벼슬 대신 퇴계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퇴계는 청량산에서 무엇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청량산 맑은 물줄기와 기암절벽 그 조화로 그 이름을 얻었다

당당한 기품과 푸르름까지 청량산은 조선선비의 풍모를 그대로 닮아있다

태백산을 기점으로 백두개간에서 뻣어나온 낙동정맥이 내달리는 곳

청량산은 경북 봉화와 안동에 걸처 있는산이다

 

 

 

 

 

퇴계선생시비 

 

 

 

 

 

 

청량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그리움을 읊은 퇴계의 시

금견유산여독서(今見遊山如讀書) 퇴계는 산을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이황 60여개의 벼슬을 제수받으며

중종부터 인종 명종 선조까지 4임금을 섬겼던 퇴계

79차례 벼슬을 사양하면서 끝내 학문의 길을 걷고자 했던 퇴계는

어린시절 청량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청량산 입구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

 

 

만만찬은 기품을 간직한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앉은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라 알려진 퇴계태실

이 집이 바로 퇴계이황이 태어난 곳이다

 

 

 

 

 

 

내당의 마당 한가운데 높다란 건물이 눈길을 끈다

 

 

현판 퇴계선생 태실

 

바로 이 방이 퇴계가 태어난 곳이다 부친 휘 식(埴)

1501년 조선중기 퇴계는 진성이씨집안 7남매 막래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 자라야 했다

 

 

퇴계 조부 (이계양李繼陽)가 지은  이 집은 'ㅁ'자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퇴계가 태어난 방은 집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홀어머니의 가르침은 엄했다

과부의 자식이라 비난 받지 않으려면 남보다 백 배 더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첬다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堣) 아래서 공부하던 퇴계는 사촌들과 함께

청량산에 보내졌다

 

걸어서 한나절 거리의 청량산

 

 

청량산에는 퇴계가 글 공부를 했던 장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청량산 중턱의 청량정사- 조선 1832년(순조 32년)에 창건

 

퇴계의 후학들이 그가 공부한 장소에 세운 건물 수 많은 학자들의

공부와 수양의 장소가 되었다

퇴계는 청량정사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청량정사 바로 옆 언덕

퇴계시절 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고목이 한그루 서있다

공부에 지친 퇴계는 나무아래서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을 것이다

 

 

 

퇴계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청량산, 청량산은 학문의 산이었다

 

  

 

풍혈대  신라말 최치원이 공부하고 수도하던 곳 

 

풍혈대 위쪽에 김생굴- 봉화 출신 신라명필 김생이 글씨 공부하던 곳

김생은 이곳에서 10년 공부한 뒤  명필이 될 수 있었다

 

 

청량산은 공부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청량산은 고승과 대학자들이 찾아들어 공부와 수양을 하는 학문의 산이었다 

 

오랜 인연을 맺은 퇴계와 청량산

퇴계에게 청량산은 산 이상의 의미였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퇴계는 "청량산을 가리켜서 오가산(吾家山)이다

우리 집안의 산이다" 라고 하면서 항상 청량산을 가까이 하고 청량산에서

뭔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유람생활을 하던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리던 그런 산이었습니다.

 

말년에 호를 청량산 주인이다 라고 한것 역시

청량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줬다 할 수 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생원,진사 소과에 급제했던 퇴계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주위의 권유로 대과에 응시 34세 나이로 벼슬길에 나섰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돌봐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벼슬길에 나선던 퇴계는 홍문관,승문원,경연, 춘추관,호조참판 등

모두 60여개 관직을 엮임했다

 

 

 

 

 

퇴계가 모신 임금은 중종,인종,명종,선조 4임금

그들은 퇴계를 언제나 중임하려 했다 

그때마다 퇴계는 벼슬을 사임을 거듭했다

79차례나 벼슬을 사양한 것으로 전해진다

 

 

 

 

辭職疏(사직소)

퇴계는 왜 이토록 벼슬을 사양했을까?

여기에는 독특한 퇴계의 출사관이 있다 

 

퇴계는 관직생활,즉 출사하는 것보다

선비는 자신의 학문을 위한 수양을 기본으로 한 다음

출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출사가 우선어었던 것은 아니죠

항상 관직을 사양하고 자신을 바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의 길을 걷고 싶었다

 

퇴계의 고향은 예안면(禮安面) 온계리(溫溪理)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이다

 

퇴계의 고향에 최근 새롭게 복원된 건물이 있다

퇴계의 네째형인 온계 이해(李瀣)의 고택이 그 곳

 

형 온계는 퇴계와 벼슬길을 나섰던 인물

을사사화 이후 갑산으로 유배를 가던 온계는 양주의 한 민가에서 숨을 거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퇴계는 더 은둔생활을 갈망했던 것이다

 

높은 관직보다는 학문과 은둔에 뜻을 두었던 퇴계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0년대 후손 하정공이 새로 지은 것이다

사랑채와 살림집 5칸 정자등 사대부가 규모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지금도 고택에는 퇴계정신을 지키며 살고있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조상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가 나눠주는 것은 퇴계의 가르침을 적은 글귀  

 

후손은 조상에 대해서 언제나 조심스럽다

 

늘 학문과 수양에 힘썼던 대학자 퇴계

그러나 그의 개인사는 불후했다

27세에 두 아들을 낳은 허씨부인과 사별했다

30나이에 맞은 두번째 부인 권씨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였다

 

권씨부인은 붉은천으로 두루마기를 기워 퇴계를 난처하게 하거나

 

함부로 제사상의 음식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퇴계의 대응은 남다른 것이었다

 

왜 제사상에 손을 댔냐고 물어보시니까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시니 직접 깎아서 드시라고

드리면서 앞으로 제사상엔 손대지 마시고 먹고싶으면 말씀하세요...

이렇게 권씨부인을 타이르셨다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벼슬을 버리고 도산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번의 사직서를 연거푸 올린 다음이었다

어릴적 부터 몸이 약했던 퇴계

몸의 병때문에 관직을 수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이루고 싶은 여망이 따로 있었다

 

퇴계는 집을 나섰다 지팡이 하나에 의존한 단촐한 걸음이었다

 

그는 곧장 청량산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 변을 따라가는 길

새벽에 출발하면  아침나절에 닿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였다

 

 

녀던길(예던 길)-당시 퇴계가 걸어갔던 길 지금은 길 일부가 복원 돼 있다 

 

  

쌍봉 윷판대

넓직한 바위에 윷판처럼 윷을 놓듯이 구멍이 뚫려져 있다

 

 

 

 

윷판대는 그의 후손 이육사가 

그의 대표집 광야를 구상한 것을 알려져 있다

 

시인 육사는 저 낙동강과 들판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조국의 운명을 노래했던 것이다

 

도산에서 20여리 청량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전망대 옆에는 퇴계의 시비들이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彌川長潭(미천장담)

 

長憶童恃釣此間(장억동시조차간) 한참 동안 기억하여 보네

                             어릴 때에 여기서 낚시하던 일을

卅年風月負塵寰(삽년풍월부진환) 삼십년 긴 세월 동안에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我來識得溪山面(아래식득계산면) 내 돌아와 보니 알아볼 수 있네

                            옛 시내와 산의 모습을

未必溪山識老顔(미필계산식노안) 시내와 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리라

                             나의 늙은 얼굴을 알아보지는 

 

 

청량산으로 가던 퇴계 역시 이곳에서 축억에 잠겼다

그리고 시 미천장담을 남겼다

 

한참동안 기억하네

어릴적 여기서 낚시 하던일

 

30년 긴세월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돌아와 보니  여전하네

옛시내와 옛산

 

저 강과 산은 나의 늙은 모습

알아보지 못하리

 

 

학소대

퇴계는 평생을 공부하는 자로 살고자 했다

그에게 공부는 인간에 심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세상에 나가는 출사대신 공부와 수양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것이 선비된 자의 진정한 길이라 여겼고 또 실천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움인가를 늘 고민했다

 

 

경암

 

그에게 공부는 인간의 심성과 본성을 찾는 것이었다

인간의 심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색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다울 수가 있는가를 늘 고민했다

 

  

  

고산정- 퇴계 제자 성성제가 세운 정자 

 

함양과 고찰 이것이 유교가르침의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涵養(함양)- 심성을 넓혀 학식을 닦는 일

體察(체찰)- 공부한 바를 몸소 실천하는 것

 

그 길이 비록 외롭고 멀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학자에게 학문의 근본이라 여겼다

 

 

 

정순우 교수/한국학 중앙 연구원교수

 

퇴계의 학문은 근본적으로 성인을 추구하는 성인됨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끝없는 구도의 길로 자기 일생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개인에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

욕망, 이런 것을 지워버리고 찬란한 천리,

참다운 진리의 빛을 간직하느냐에 하는 것이

퇴계의 학문의 요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대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름 높았던 퇴계,여전히 참다운 진리를 찾고자 했던

그의 발길은 마침내 청량산 청량사에 다달았다

청량사는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한때는 20여개 암자를 거느렸던 대 가람이었다

 

  

 

유리보전 -청량사의 중심전각

현판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왔던 공민왕의 친필이라 전해진다

 

 

 

청량사에서 모시고 놀던

옛일을 생각하니

 

두갈레 땋았던 머리가

이제는 백발이 되었구나

 

학동에는 몇번이나

언덕과 계곡의 변화를 보았던고

 

남기긴 시를 세번 반복하니

눈물이 가로 흐르네

 

 

청량산에서 퇴계 여전히 공부하고 사색했다

청량산은 모두12봉우리 

12봉우리 침묵에서

사람의 길과 학문의 길을 본받고자 했다

 

변치않는 바위 봉우리에서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지조 높은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

 

사철 푸른 소나무는 그대로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퇴계는 '유산여독서' 라 했다

산을 오르는 것은 자체가 심성을 닦는 일이라고 여겼다

 

심성을 닦아 자신을 비우는 것 그것을 성인의 길이라 여겼던 퇴계

그래서 그의 학문 목적은 당대 다른 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정순우교수

서양철학과 문화의 영향으로 인간 스스로가 세상으로 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담이 생기는 상황속에서

퇴계학은 그런 담을 허물고, 오늘날 현대인이 갖고있는 병증을 해소할 수 있는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철학, 경(敬)의 철학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단한 울림을 주는 그런 학문입니다

 

하늘다리-해발800미터.자란봉~선학봉 구간을 연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가장 길다는 줄다리

길이는90m 높이는100m가 넘는다

 

 

하늘다리를 건너면 청량산 정상인 장인봉(해발870)

풍기군수 시절 주세붕이 중국태산의 장악을 모방하여 부친 이름이다

장인봉에서면 산을 휘감아 나가는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있다

 

 

장인봉에 서면 산을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퇴계는 청량산 12봉우리를 육육봉이라 칭하며 아끼고 사랑했다

그 산에서 학문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학문에 대한 의미를 고민했던 것이다

 

  

 

성학십도(聖學十圖)- 선조를 위해 지은 퇴계의 제왕학

오로지 인간다움을 추구했던 퇴계 칠순의 나이에 성학십도를 지었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를 위한 제왕학이었다

퇴계의 학문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신병주교수

퇴계는 기본적으로 학문하는 선비는 자신의 수양이 중요하다

그런 수양론의 핵심 개념이 경(敬)  개념이었습니다

경은 항상 몸과 마음을 바로 닦고

경계하면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지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이런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퇴계학문의 사상적인 핵심은 경(敬)이고, 또 학문을 하고,

이론을 탐구해 나가는 궁리(窮理)를 학문의 요체로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해서 항상 경의 마음자세로

자신을 수양한 바탕 위에서 사물의 본질적인 실체,

이치들을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는 것

그것을 궁리(窮理)라고 하는데 퇴계는 궁리를 위한 학문을 아주 철저히 했기

때문에 퇴계학문에 있어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완성을 할 수 있었죠

 

  

날마다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 성인의 말씀을 익히는 것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 했던 퇴계

이 진정한 마음상태가 경(敬)이라 했다

 

평생을 공부와 수양에 힘썼던 퇴계 그래서 그의 학문의 봉우리는 높았다

그가 추구했던 경, 항상 밝고 삼가해야 하는 정신세계 역시 높았다

 

 

  

퇴계는 경의 마음을 청량산에서 본받고자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청량산에서 경사상은 더욱 완성 돼 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량산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청량산에 머물던 무렵

퇴계는 또 하나의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학문에 몰두하고 후학들을 양성 할 수 있는 서당을 원했던 것이다

 

도산서당-퇴계가 직접 설계한 서당(1560년)건립

그의 나이60에 도산기슭에에 서당을 열었다

작은 방 2개와 제자들의 공부 공간인 마루로 이루어진 단촐한 건물

 

서당가운데  연못을 만듦

  

 

도산서원-퇴계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서원

퇴계가 세상을 떠난 4년 후 후학들은 도산서당 옆에 도산서원을 건립했다

 

동제와 서제  기숙사와 대강당까지 갖춘 도산서원

임금은 서원의 현판을 내렸다 

 

 

명필 한석봉의 글씨

 

 

광명실(光明室) - 도산서원의 서고  

 

 임진왜란 때는 부엌마루 아래  책을 감추어 방(병?)화를 피할 수 있었다

 

퇴계학풍을 이은 도산서원 조선선비들의 학문과 정신의 고향이 되었다

 

 

도산서원 옆의 퇴계박물관

 

관직을 옮길 때 그의 유품은 겨우 책 2괴짝이었다 할 정도로 유품은 소박하다

 

 

 

늘 병약했던 퇴계, 지팡이에는 그의 손때가 묻어났다 

 

의자와 투호에도 그의 채취가 짙게 베여있다

 

퇴계는 항상 매화를 가까이 하고 사랑했다 

 

퇴계는 평생 매화를 가까이 하고 사랑했다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그가 남긴 퇴계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순우교수

퇴계학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랄까 산업사회가 갖는 어떤 여러가지 병리적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철학을 갖고 있다 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퇴계에 대한 관심을 어느 때 보다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1570년11월 퇴계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퇴계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에 멀지않은 산기슭

퇴계의 맞며느리의 산소가 있다

맞며느리는 죽어서도 존경하는 시아버지를 모시겠다고 유언 한 뒤

퇴계묘소 바로 아래 묻혔다

 

 

장례를 화려하게 치르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퇴계는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유언을 어겼다 

퇴계의 시선을 피해 묘비는 묘소 옆으로 비켜 세워 두었다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참고>숭정대부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춘추관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시 문순공 휘 황(滉)

배 정경부인 김해허씨

배 정경부인 안동권씨

비문- 묘갈명(墓碣銘)은 선생이 스스로 지었고 기대승(奇大升)이 그 뒤를 썼다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었고, 장년되어선 병이많았다

중년엔 어찌 그리 학문 좋아하다가, 늙어서는 어찌해 벼슬을 탐하였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져 가고 벼슬은 사양해도 더욱 더해졌네.

나아가는 벼슬길엔 실패가 없고, 물러나 은둔하면서 올바름이 있네

나라의 은택에 매우 부끄럽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초복(初服-벼슬하기 전에 입던 선비의 옷=벼슬을 그만 두었다는 뜻)입고

유유자적하니, 뭇 사람의 나무람도 거리낌 없다

내 마음의 그리움 저쪽에 막혀 있으나, 나의 패옥 누가 보아주랴.

내가 옛사람 생각해 보니,실로 나의 마음과 맞는구나

어찌 알랴, 내세에서 지금의 내 마음을 이해 해 주지 않을 줄,

걱정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걱정이 있다

수명에 다해 돌아가나니, 다시 무엇 구할 것인가 

 

퇴도만은이공지묘(退陶晩隱李公之墓)

도산으로 물러나 숨어 지낸 이씨남자의 무덤 

이렇게 세긴것은 역시 퇴계의 뜻이었다

 

 

살아생전 퇴계는 청량산을 사랑하고 또 그리워 했다

퇴계는 청량산에 관한 시를 50여수 이상 남겼다

 

망청량산운

 

선산을 찾아가서

은사되지 못하고는

 

맑은 산만 바라면서

띠끌자취 부끄러라

 

들으니 이 구름골에

묵밭 가는 이가 들었다니

 

부지런히 바람뜰을

쓰는이가 있으리라

 

당당하고 단아한 조선선비의 풍모를 닮은 청량산

퇴계는 청량산에게 학문과 선비의 길을 물었고

청량산은 맑은 기운으로 퇴계에게 화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퇴계학의 본향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