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고향 -은둔에서 찾은 희망,고산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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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 9일 청나라는 10만대군을 앞세워 조선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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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력을 앞세운 청군은 10일만에 수도까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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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윤선도(孤山尹善道)-(1587~1671)
조선의 선비들은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한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 윤선도도 그 중 한명이었다
향리 자제와 가졸 수백명을 이끌고 배 편으로 광화도까지 간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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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조선은 힘없이 무너졌다
초라한 행색으로 오랑케라 부르던 청의 태조에게 무릎을 꿇고 만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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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공적비까지 세워 군신간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자 했다
치욕적인 소식을 들은 고산은 절망했다
그리고 현실을 개탄해 평생 초야에 묻혀 살것을 결심한다
제주도를 향하던 고산은 풍랑을 만나 완도 보길도에 내린다
한폭의 산수화를 펼처놓은 듯 한 수려한 경치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고산에게 보길도는 최고의 은둔지였다
또한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낙원있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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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최남단 해남에서 뱃길로 한시간 거리에 보길도가 있다
고산은 보길도를 신선이 사는 곳이라 불렀다
이곳의 자연에 매료되어 세상을 버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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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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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5임금을 섬겼다
당시는 왕권약화로 인한 붕당이 정치를 주도하던 시기였다
조선시대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던 정쟁
인조반정 이후 득세한 서인의 모함과 견제로 인해 남인이었던 고산은
모진 풍랑의 세월을 격어야했다. 세상에 곧은 마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외로운 은둔생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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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보길도의 부용동 고산은 이곳에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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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정자를 세웠다
깨끗하고 연못 가운데 세워진 세연정,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정원으로 뽑힐 정도로
자연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아름다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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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을 사이에 두고 인공연못인 세연지가 조성돼 있다
고산이 이곳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염두한 것은 자연훼손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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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하고 즐겼던 고산 , 그는 주변의 바위 하나 하나에도 이름을 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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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에는 과학적인 원리도 숨어있다 일명 굴뚝다리라 불리는 판석보는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역할을 한다
이는 인공연못의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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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 구석 자신이 혼이 담겨있는 세연정에서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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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4계의 아름다움을 각각 10수씩 읊은 어부사시사는
모두 40수로 이루어진 장문의 시조다
속계를 벗어난 어부의 생활을 한글로 아름답게 묘사한 시
겨울노래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메어라 배 메어라
머흔 구름 원망마라 세상을 가려준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파도소리 싫어마라
세상의 시끄런 소리 막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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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현 교수-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실과 자연이라 하는 곳에 가지고 오는 갈등을 가지고 어부사시사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멀수록 좋다고 했지만 인간세계에서 떠날 수 없었던 고산으로서는 그러한 면들을
작품속에서 조금씩 녹여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어부사시사 같은 작품은 예전부터 있었던 전통적인 단가와도 다르고
또 장가와도 다른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했다는데 작품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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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순리에 따라 펼치는 4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어부사시사
윤선도의 5대손인 윤희가 지은 보길도지에 따르면
고산은 세연정에서 매일 연회를 열어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게 했다 합니다
그에게 음악은 시와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이를 통해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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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년 후인 2010년 10월 <어부사시사>는 국악 칸타타로 새롭게 조명됐다
황병기 미술감독- 국립국악관현악단
논어를 보면 공자가 음악을 예찬한 유명한 문구가 나오는데
흥어시-인간은 시에서 감흥을 받고
입어예-예를 알고 실천 함으로써 선다(인격을 갖춘다)
성어악-사람은 음악에서 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음악을 높이 평가했거든요. 그것이 인류적?인 음악관이에요
그것이 조선조의 선비들 한테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선도 선생이
풍류를 실천하신 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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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심성수양을 완성하고자 했던 고산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예악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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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금(孤山遺琴)
거문고에 고산유금이라 이름 부치고 직접 연주했던 고산
오래 돼 연주가 불가능 했던 고산유금을 최근 국립국악원이 복원했다
거문고에 운율을 고르면서 고산은 난세를 만나 어지러웠던 자신의 마음까지 조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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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연구원-국립국악원
고산 선생님께서 문학가로 알려져 계시지만 음악쪽으로도 많은 유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회명정책이란 책에 금에 관한 도설(圖說)이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악서나 악보에서 제작에 관한 기록이 드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악기인 금의 제작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음악에 관한, 악기에 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을 보여주신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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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했던 고산은 철저하게 자연에 은둔하고자 했다
산 중턱에 지어진 동천석실 또한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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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 아슬한 절벽위에 세운 한칸짜리 정자
동천은 신선들이 머문다는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비롯됐다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고산은 서책을 읽으며 사색과 명상을 즐겼다
구름위에 사는 신선과도 같았던 생활
고산 스스로도 동천석실에서 보이는 풍경을 부용동 제1의 절승이라 칭했을 정도다
산 아래 실림집과 마주보고 있는 동천석실
고산은 용?두 즉 도르래를 달아 산 밑에서 부터 필요한 것들을 조달했다
인력에 수고를 줄이기 위한 고산의 지혜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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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도 능했던 고산은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살림집인 낙서재를 마련했다
세연정의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않을 만큼 단촐하기 까지한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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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낙저제 뒤 커다란 바위를 소은병이라 불렀다
이는 주자가 기거했던 무이산 봉우리 대은병의 이름을 차용한 것
바위를 좋아한 고산은 바위에 올라 주자를 비롯한 옛 선각자의 삶과 사상을 생가했을 것이다
유학을 학문과 문학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거기에만 억매이지 않았던 도산
호기심이 많은 학자였기에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시도들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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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버렸지만 멈출 수 없었던 도산의 도전 ,그 흔적을 찾아 진도로 찾았다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으로 민초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졌다
민생해결을 위해 고산은 농토간척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간척사업, 막대한 사재를 털어
진도군 임해면에 60만 ㎡ 축구장 크기의 300배에 달하는 간척지를 개척했다
윤선도가 개간하려 만든 자리이며 길이는 30M정도 된다
간척지는 신동마을부터 연동마을 앞까지 평야가 간척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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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간 간척사업 1호로 간주되는 고산의 간척지
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조성된 땅은 마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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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사적비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는 부족한 농토를 만들어 주민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었던
고산의 은덕을 기리는 사당과 비석이 남아있다
나라의 힘이 미처 닿지 못한 외딴 섬마을 사람들에게 고산의 새로운 시도는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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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년이 지난 지금도 굴포리 남선리 백동리 신동리 4개의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1월15일에 동제를 지낸다
비록 자연에 은둔하는 정치인이었지만 고산은 백성들을 위한 민본정신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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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아서 (寄大兒書)
이는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 글을 모아놓은 책 기대아서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고산은 후손들에게 인생의 덕목을 벼슬에 두지않고
수신(修身), 근행(勤行),적선(積善)에 둘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인자한 행실과 근검절약을 제 1의 덕목으로 가르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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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고산은 명주옷을 입은 아들을 보고 크게 나무란다
모름지기 의복이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라며 일관하고
모든 것에서 소박한 것을 가까이 하고 사치스러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산이 후세에게 가르처 주고 싶었던 것은 성리학적 명분보다는
실천적인 민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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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綠雨堂)-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서 자동차로 5분거리에 위치한 연동마을
그곳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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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 공이 터를 정하면서 지은 해남윤씨 녹우당
해남 윤씨 집안은 예로부터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3번이나 미곡을 내어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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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고즈늑한 사랑채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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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내려준 집의 일부를 옮겨 온 사랑채, 녹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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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명예교수(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윤선도는 봉림대군의 사부였지 않습니까
효종이 스승에 대한 은혜를 베풀고자 해서 돌아가시기 1년전에 고산윤선도로 말하면
72세때 일입니다
서울에다가 집을 짖도록 해 주었다. 멀리 해남까지 가지말고 가까이 모시고 싶어서...
효종이 그 다음 해에 승하하셨거든요
그것을 인천으로 해서 집을 해체해서 배에 싣고 해남 무성포로 들어왔다고 기록이 나와요
그래서 연동에다 그것을 재구성해서 만든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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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은둔하겠다는 고산의 결심에 따라 해남으로 옮겨진 이후
녹우당은 윤씨가의 고택을 일겉는 공식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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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綠雨堂)
덕음산에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녹색의 비가 내리는 것 같다 해서
이름 부처진 녹우당
지금의 현판은 실학자로 알려진 성호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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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른쪽에는 운업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운업(芸業)-꽃성할 운과 씩씩할 업, 공부하는 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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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의무라고 여겼던 고산
그런 이런 정신은 어린시절부터 비롯됐다
나이 여덟에 고산은 작은아버지 윤유기(尹悠期)의 양자로 입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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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공부를 했던 고산은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고
20세에 승고시에 일등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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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광해군8년) 성균관 유생이던 고산은 상소문 한장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는다
병진년에 쓴 상소문 병진소는
광해군을 왕위에 올린 일등공신 예조판서 이이첨의 불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격렬한 어조로 써 내려갔기 때문에 대신들은 물론 이이첨마저도 두려워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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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명예교수(전남대 국어국문과)
그렇게 직언을 할 수가 없어요. 직언이란 것은 바른대로 그대로 말하는 거에요
보통 선비들은 감히 말도 못하는 이런 일들을 전부 기록했거든요
이이첨무리는 고산이 어진사람을 모함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그를 귀양길에 오르게 했다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한 직언, 이 일을 시작으로 고산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이 시작된다
정치적 좌절과 반대로 고산의 유배생활은 그를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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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유배지 함경도 경원
경원은 드라마 세종대왕을 보면 4군6진중 6진에 속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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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회요(遣懷謠)-
1618(광해군10) 윤선도가 함경도 경원에서 귀양살이하며 쓴 5수의 연시조
그곳에서 고산은 그이 시조작품의 효시인 견회요(遣懷謠)를 썼다
자신의 비극적인 현실을 달래기 위해 쓴 견회요는 모두 5수
작품에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불의와 강직함,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심등
고산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베여있다
1.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로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생각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2. 나의 일이 잘못된 것인 줄 나라고 모르겠는가? 이 마음 어리석은 것도 모두가 임(임금)을 위한
탓이로구나. 아무개가 아무리 헐뜯더라도 임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3. 경원성 진호루 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냇물아! 무엇하러 밤낮으로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가?
임 향한 내 뜻을 따라 그칠 줄을 모르는가?
4. 산은 끝없이 길게길게 이어져 있고, 물은 멀리 굽이굽이 이어져 있구나.
부모님 그리운 뜻은 많기도 많다. 어디서 처량한 외기러기는 울어울어 나의 마음을 구슬프게 하는가?
5.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았지마는, 임금 향한 뜻은 하늘이 만드셨으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이 불효인가 하노라.
박준규 명예교수-
윤선도의 시조 작품의 효시, 견회요 내용이 자기는 옳바르게 살라했는데
이 꼴이 돼있다 그런 내용이고, 부모를 그리워 하는 것, 그런 노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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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은 영모첩(永募帖)에도 잘 나타나있다
총4권으로 이루어진 영모첩에는 고산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아버지 윤유기와
주고받은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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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올린 상소로 함께 파직당한 아버지 윤유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의 한
고산은 3년간 상복을 입고 멀리서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했다
정치적 시련과 함께 찾아 온 인간적인 아픔이 고산의 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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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의 6배 생활은 인조반정(1623.광해군15.인조1)으로 끝이났다.
고산은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지만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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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년뒤 고산은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급제를 하여
고산은 또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고산은 학문적 깊이를 인정받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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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봉림대군의 또 다른 스승인 서인의 영수 우망 송시열과 대면한다
고산과 우암은 남인과 서인에 속하며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적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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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전통성과 관련해 왕실의 상복기간의 논란
1659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1년설을 주장했고 받아들여졌다
<참고>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이미 자의대비는 3년상을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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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예송논쟁은 효종의 어머니인 인선와후의 승하식에 다시 붉어졌다
이번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 돼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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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교수(목원대학교 역사학과)
1차 예송 발발이후 1년뒤에 고산 윤선도가 상소를 올립니다
여기서 윤선도의 주장이 바로 송시열과 송준길의 주장은 효종 자체를 비하시키는거다
송시열과 송준길, 양송이 역모를 꾀하는 거다 이렇게 강한 톤으로 송시열을 비판하게 된다
윤선도는 그 당시 사사(賜死)까지 논의가 되면서, 사사는 피하지만 상소로 유배를 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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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숙적이었던 고산과 우암, 그들 사이에는 재미있는 우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우암이 병에 걸려 몹시 앓았다
이때 우암은 아들에게 의학에 밝은 고산에게 가서 약을 지어오라고 했다
라이벌에게 목숨을 맡기는 상황, 아들은 펄쩍 뛰었지만, "고산은 그런사람이 아니다 "
라며 끝내 아들에게 약을 지어오라고 명한다
고산 역시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 갈 인물로 송시열만한 인물이 없다며
흔쾌히 탕제를 지어주었다
아들은 독이 든 약제가 있다고 하지만 우암은 다 까닭이 있을 것이라 하며
약제를 달여 먹었고 금새 병이 씻은 듯 낳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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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당쟁으로 얼룩진 진흙탕 정치로 인해서 고산은 평생 20년의 귀향과
19년의 귀향생활을 보내야 했다
정치적인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듯
고산은 자연에 묻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찾은 또 한곳의 자연이 있으니 수정동을 비롯한 금쇄동 일대다
고산문학의 무대가 된 금쇄동과 수정동에서 '오우가'를 포함해서
'산중신곡'19수 '속산중신곡' 2수 등 모두 26수의 시가와
'금쇄동기(金鎖洞記)'라는 한문 수필을 지었다
금쇄동기(金鎖洞記)-1640년(인조18) 54세 때 은거생활을 하던 해남군 현산면 금쇄동에서 지은 작품으로 금쇄동의 지형 산세 승경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한문 수필 <보물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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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작품세계로 택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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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신곡(山中新曲)에서도 그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외로운 은둔생활에 친구가 되어준 자연...
산중신곡 (山中新曲)-인조20년(1642)에 윤선도가 지은시조
모두18수로 되어있으며,<고산유고> 권6이 실려있다 <보물 제48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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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기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야 무엇하리
오우가(五友歌) -1642년(인조20) 금쇄동(金鎖洞)에서 고산윤선도(尹善道)지은 6수의 연시조
첫 수와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에 대한 각 1수씩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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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이 많은 자연물 가운데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벗으로 삼고자 한것은
고결하고 변하지 않는 수양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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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을 가까이 하지 않는 당시의 양반들과는 달리 의학, 천문, 지리, 음악 등을
골고루 섭렵하며 학자로서의 충실한 삶을 살았던 고산
그는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녹우당 뒷쪽에 자리잡은 고산의 사당 소박한 이곳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의 대가요 불운한 정치가였던 고산 윤선도
영조3년에 생전의 공을 인정받아 영원히 사당에 모실 수 있는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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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보길도와 같이 자신이 사랑하고 즐겨 머물던 금쇄동에 안치되었다
강직한 선비였던 고산 윤선도, 그가 맞은 정치가로서 위기는
문인으로서 기회가 되었으며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전환점이었다
눈 앞에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고산 윤선도
그가 따르고자 했던 것은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자연이었다
변심하지 않는 자연을 닮은 고산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은 4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의 문학속에 흐르고 있다
또한 그가 세우고자 했던 유토피아인 보길도 곳곳에 세워져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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