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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2부♣

파라클레토스 2011. 3. 23. 00:46

운명의 그날밤

 

한 무리의 괴한들이 한양의 거리를 달려가고 있었다 

 

1398년 8월26일

칼을 뽑아 든 괴한들의 우두머리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인물은 정도전

 

그 밤 정도전은 남은의 첩집에서 측근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끝이났다

 

정도전은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혁명의 주역이자 조선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정도전

 

정도전 그는 왜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을까

 

 

고려 500년 역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무신정권과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는 그 명운을 다해가고 있었다

 

그무렵 한 젊은관료가 등장했다

삼봉정도전 

 

그는 젊은 동료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기득권층들은 그를 그냥두지 않았다

원나라 대신 명나라와 손을 잡을 것을 주장한 그에게 돌아온것은

유배형이었다

30대초반 정도전은 날개가 꺾였다

 

먼 남쪽 나주로의 유배, 유배지에서의 정도전 그는 외로웠고 쓸쓸했다

그 때 그의 눈에 고려백성들이 들어왔다

순박하지만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의 삶과 피폐해진 민생

그것은 고려의 현실이자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가졌으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정치낭인9년 째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렸다

 

 

함경도 함주까지 찾아가서 만난 인물  동북면 도지부사 이성계였다

두 잠룡의 만남 그것은 새로운 역사를 예고하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경기도 평택시 은산리 정도전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정도전 사당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정두순(정도전19대후손)-정도전이 시해 당시에  정도전의 큰 아들은 

이성계가 데리고 가서 화를 면했는데, 정도전의 손자가  그 당시 은둔한 자리가

이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정도전의 사당도 짓게 되고 우리가 여기서 살게 된 계기가

된 거라 생각합니다.

 

 

 

삼봉기념관

이런 인연으로 평택시 은산리는 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은 정도전의 후손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정도전 사당 앞에 마련된 삼봉기념관, 이곳에는 정도전의 유품과 저술 등 친필병풍 등

그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 되어있다.

특히 이곳의 장판각에는 특별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 보관중인 삼봉집 목판은 모두258판.

여기에 정도전의 사상과 철학이 모두 담겨있다.

삼봉기념관 뒤편에 마련된 정도전 사당인 문헌사

 

 

 

 

 

 

유종공종

사당으로 들어서면 현판이 눈낄을 끈다.

유종공증, 유학에 관한 학문적 지식이 으뜸이요.

조선 개국 창업과 한양 건설의 공로 또한 음뜸이라는 뜻이다.

이 글은 태조 이성계가 직접 하사한 것이다.

사당 안에는 정도전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헌공은 나중에 정도전이 받은 시호였다

 

 

 

 

 

1392년, 500여년 역사를 이어 갈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했다.

그 첫 임금은 태조 이성계, 그러나 이 역사적이 조선개국은

그때로부터 9년전 먼 함경도 땅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정치낭인 정도전이 천리밖 함주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둘의 만남에는 정몽주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몽주는 이미 이성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엇다

정몽주는 1364년 삼선 삼계의 종사관으로 참견해 이성계와 만난적이 있었으며

1380년, 이성게가 운구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있을 때 조정 군수로 참전한 바 있었다.

바로 이 정몽주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만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

이성계의 군사들을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이성계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런 군사라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가?

이성계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이런 군사라면 능히 왜구를 무찌를 수 있다는 뜻으로 슬쩍 예봉을 피해갔다.

그러나 정도전의 발언은 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시 한수를 남기고 돌아왔다

아득한 세월에 한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세상이란 잠깐 사이 묵은 자취인 것을

 

함경도 변방에서 서로의 뜻을 확인 한 정도전과 이성계,

훗날 뵐 수 있기를 고대했던 정도전의 바람은 몇 년 후에 이루어졌다

 

 

 

 

1398년 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감행했다.

우왕과 최영 등 친원파들의 강요에 의한 요동정벌 대시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린 것이다

 

 

 

한영우교수(이화여자대학교)- 위화도 회군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인데,

그 사건을 기획한 것은 사실 정도전이라고 봅니다.

그럼 왜 위화도 회군을 했느냐 표면적을 보면 그 때 전쟁하기가 계절적으로

불편했습니다. 중국을 기억하면 국제관계가 나빠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소위 4대 불가론을 대는데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고 그때 최영장군과 이성계장군

사이에 역학관계가 작용했습니다. 돌아오면서 바로 최영장군을 제거하는데

이렇게 되고보니 가장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군벌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고려조정은 우왕과 권신들을 중심을 한 보수파와 정도전, 이성계 등

위화도 회군파를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정치장이 되었다

정도전은 개혁파 이성계 세력에 중심에 섰다.

토지개혁을 개혁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도전이 맨 먼저 추진했던 개혁정책은 전제개혁운동, 즉 토지개혁이었다.

삼봉집에는 당시 토지상황에 대한 정도전의 기록이 나온다.

세력가들이 무제한 토지를 점령하여 이미 경작하는 토지에 지주가 7~8명이

있는 곳도 잇을 정도로 토지제도의 폐해는 극심했다

 

그 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게 되면서느 세력가들이 서로 토지를 집병하였으므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는 그 주인이 더러는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훤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시전을 혁파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삼봉집 中 

 

 

 

 

개혁파를 옛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불타는 토지대장을 보며 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민심은 달랐다

 

태조실록은 온 나라가 기뻐하였으며 백성들의 마음이 태조에게 더욱 쏠렸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전광석화처럼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가던 정도전,

이제 그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면 누구든지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겸병을 막고 백성의 생업을 후하게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큭 기뻐하고 민심이 더욱 따르게 되었다-태조실록 中

 

평생의 친구 정몽주와의 관계에 금이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출발은 같았으나 갈수록 둘의 간격은 벌어지고 있었다

정도전은 스승이었던 이색의 탄핵도 주저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끌어들여 개혁파를 제거하려던 이색이었다.

전제개혁과 군사체계정비 그리고 반대파 숙청까지 정도전은 개혁을 위한 

모든 악역을 떠 맡고 있었다. 

 

그런 정도전에게 보수파들은 최후의 일격을 가해왔다

이색과 이연보 등의 탄핵을 주장했던 정도전은 반대파의 역공을 받아 봉화 그리고 다시

나주로 유배되었다.

1391년혁명 1년전이었다

그러나 이번 유배는 유배가 아니었다.

정몽주는 측근 김진양을 시켜 정도전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김진양은 정도전이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참수하여 죄를 얻게 했으니

유배지에서 바로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이런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정몽주 일파의 공격은 지요했다.

정도전의 못숨이 달려있다.

 

 

 

 

 

 

 

 

 

개혁파 입장에서는 또 다른 악재가 터졌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해 크게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

개혁파 최고실권자가 문하시중 이성계의 부상을 정몽주 등 반대학파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정도전과 개혁파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때 위기를 정면돌파한 인물이 등장했다.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출중했던 당시 25살의 이방원.

 

그는 이성계의 동태를 살피러 온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해 

순식간에 국면을 전환시켜버린다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고려왕조도 끝이났다.

더 이상 목숨바처 고려를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정도전은 죽음 직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1392년 7월, 마침내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이 개국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성공이었다 

 

한영우석좌교수- 정도전은 나중에 조선왕조를 세우고 나서 취중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와 이성계와의 관계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장량과 관계와 비슷하다.

그 얘기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주역이 아니고 실제로는 장량이다.

장량의 두뇌와 책략으로 한나라를 세웠습니다.

유방은 말하자면 장량이 업고 온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비유한다는 것은 조선왕조를 세운 주역은 실질적으로 자신,

정도전이다. 자신이 이성계를 업고서 새 왕조를 건설했다는 거죠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새왕조 개창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의욕에 넘첬다 

 

정도전은 새나라 조선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오랜 여망이 마침내 실현되는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이 어떤 나라이길 바랐을까?

삼봉집에 기록된 조선경국전에 보면 새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원대한 꿈을

확인할 수 있다.

왕조 최초의 헌법으로 일컬어지는 조선경국전, 먼저 정보위, 국호, 세계교서를

서론을 한다음 치전, 부전,예전, 정전,헌전,공전 등 육전으로 나누어 저술했다

 

정도전은 특히 왕권보다는 신권을 강조했다.

임금이 그릇되면 신하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옳다고 하나 그른 것이 있으니,

신하가 그 그른것을 말해 그 옳은 것이 이루어지게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니 옳은 것이 있으니,

신하가 옳은 것을 말해 그른것을 바꾸도록 한다 -삼봉집 中

 

왕권과 신권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핵심대목이었다

 

박현모교수-고려말에 우왕, 창왕,공민왕 그런 시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선 정치적으로 너무 왕권이 취약해도 안됩니다.

취약하면 안정성이 깨지니까 동시에 특정인들에게 공신들에게 권력이 위임됨으로서

정치가 좌지우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래에 있는 언관이든 재상으든 간에 

계속해서  직언을 할 수 있는 그런 공론이 제체와 동시에 위에 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임을 해서 그 사람이 헌신적으로 자기의 소신을 다해서 일하도록 

하는 것이죠 

 

정도전의 또 하나의 핵심사상이 있었다.

약한 존재라 해서 백성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없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해서 얕은 꾀로 속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민심을 얻으면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군주를

버린다고 했다.

 

하민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 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조선경국전 中

 

 

 백성의 존재를 강조하는 정도전의 민본사상이었다.

그의 민본사상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영우 석좌교수-민본사상이라는 것은 뿌리를 찾으면 맹자한테서 시작이 됩니다

맹자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정부가 그 다음이라고 이야기 하고 백성이 가장

존귀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맹자의 민본사상을 새로운 국가의 경영철학으로

제도화 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을 제도화 시키고 실천화 한사람이 정도전입니다

그래서 민본정치 사상을 가다듬어 이것을 통치철학으로 완전히 틀을 세워놨습니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조선왕조의 기본정책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의미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입관(入官)편에 보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을 뿐이다.

옛날ㅇ는 인재를 등용하는 이가 인재 양성을 평소부터 해 오고,

인재선택을 매우 정밀하게 하였다.

그래서 입관하는 길을 좁고 재임하는 기간이 길었다 -조선경국전 中 

 

교육에 관한 구성도 나온다. 특히 정도전은 향교와 향학을 설치해서

교육의 기회를 서민들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공경,대부의 자제 및 백성 가운데서 

준수한 자를 가르치고, 부학 교수를 두어 동유를 가르치며,

또 이 제도를 확대하여 주, 부, 군, 현에도 모두 향학, 향교를 설치하고 교수와 

생도를 두었다 -조선경국정 中 

 

위정자는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특벽하게 경계해야 한다고도 했다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탐욕 때문에 흔적을 망치게 되는 것이고,

사람이 속임수를 쓰게 되면, 간사한 일 때문에 화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무릇 위정자는 이러한 일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조선경국전 中 

 

정도전은 새나라 조선에 대한 구상을 조선경국전에 모두 담았다.

태조 이성계도 이 책을 매우 흡족해 했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바치자 태조는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말과 비단 등을 하사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담긴 정신은 오늘날 의 헌법정신과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다.

 

판삼사사 정도전이<조선경국전>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와 무늬있는 비단과 명주, 백은을 내려주었다 -태조실록  中

 

엄지봉교수(서강대학교 법학과)-조선 경국전에 정도전이 담은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더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 즉 왕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을 더 위에 놓고 백성을 위하는 그런

통치를 해야한다는 민본사상이 조선경국전에 줄곧 깔려 있습니다.

이 민본사상이 우리 헌법에서도 하나의 민주주의 사상이라는 우리 헌법의

기본사상 기본원리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국초기 조선이 기틀을 잡아나갔던 정도전에게 또 하나의 과업이 주어졌다

조선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삼았다.

정도전은 새 도읍의 도시계획에 착수했다.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4대문과 거리를 조성했다

 

 

 

 

한양의 동쪽 관문인 동대문, 동대문의 정식명칭은 흥인지문,

흥인지문의 인은 유교의 으뜸 덕목이었다.

 

 

남대문은 숭례문, 인의예지신의 예에서 따왔다

 

 

보신각을 믿을 신자 역시 유교 덕목이었다

 

정도전은 새 도읍지 한양에 유교의 이상을 담았다.

백성이 근본이 되는 유교이상국가, 이것이 정도전의 꿈이었다

 

 

새 궁궐의 이름 경복궁과 모든 전각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다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라는 근정전,

 

 

임금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침전 강령전

 

 

 

이처럼 모든 전각의 이름도 뜻을 담았다 

 

태조 이성계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을 조선의 기틀을 다져나갔던 정도전,

그에게 또 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요동정벌이었다.

원나라가 물라가고 명나라가 서던 시기, 당시 요동은 주인없는 땅이었다.

무력으로 요동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은 정도전, 고구려 이후700년 만의

기회라고 여겼다.

이처럼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가던 정도전 앞에 강력한 정적이 있었다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었다.

두사람은 사사건간 충돌했다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주장했다. 사병을 자기 세력으로 삼고 있었던 이방원으로서는

결코 용남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여 그 힘으로 요동정벌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도전의 사병혁파운동을 자신으 집권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정도전의 재상중심체제는 고려말의 상황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고려말에 공민왕, 우왕, 창왕, 등을 보면서 왕권이 취약해서도 안되고

또 특정 권신들에게 있다고 본 ?정치를 좌지우지해서도 안되겠다고 본 것이다

 

한용우석좌교수-이방원 입장에서는 신권중심이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방원은 자신이 굉장히 영리하고 왕권을 강화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신권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권중심을 그냥 두어서는 왕이

굉장히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정치생명에도 불리하다고 보는 거죠

 

갈등의 기폭제는 또 있었다

세자 책봉문제였다

이방원은 자신이나 자신의 형이 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실제로는 후처 강씨의 아들 방석이 세자가 되었고

정도전은 자신의 측근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앉혔다.

둘의 갈등은 첨예화 될 수 밖에 엇었다

그 갈등은 봉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398년 8월, 이방원은 요동벙벌을 위한 진법 훈련에 불참한 죄로 태형 50대의

상징적인 벌을 받았다.

왕자이자 개국공신인 이방원의 치욕이었다.

이 무렵 이방원은 이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의 나라보다는 재상의 나라를 원하는 정도전,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까지

쥐고 있는 정도전, 이방원으로서는 정도전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당시 이방원은 사병혁파정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에 무기를 감춰두고 있었다.

이방원을 철저하게 제압하지 못한 점, 사병혁파를 철저하게 끝내지 못한 점,

정도전의 결정적인 회착이었다.

 

정도전과 이방원 둘의 갈등은 비극으로 끝이났다

운명의 그날 밤, 지금의 한국일보사 근처 남은의 첩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1398년 8월 26일 밤,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안산군수 이숙번과 이방원의 

사병들이 이들을 공격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피습, 정도전은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평택 삼봉기념관 인근에 정도전 묘, 정도전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이 묘소는 후손들이 만든 가묘이다.정도전은 역적을 몰려 죽었지만

다행이 멸문지화는 피할 수 있었다.

큰 아들 진이 살아남아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다

 

 철저한 개혁과 민본사상으로 혁명의 주역이었던 정도전,

고려 하늘을 버릭 백성을 선택해 조선을 세우고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이방원과의 정치투쟁에서 비극적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던진 화두는 왕의 나라보다는 재상의 나라,

그리하여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였다

 

 

그의 민본사상과 재상중심사상은 조선 500년 역사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설계하고 디자인한 서울, 정도전의 민크림 위에서 서울은 600년 이상

우리의 수도로 지금도 아름답게 견재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기록 조선은 철저학 정도전을 외면했다

그에게 간신의 오명이 씌워지기도 했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고 권력투쟁의 승자 이방원은 왕이되었다

조선은 비롯 그를 복권시키고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가 복권되는 데는 무려 460여년이 필요했다

 

 

철저한 민본사상을 개혁을 주창했던 정도전, 비극적인 최후와 이후의 평가로

정도전은 오랫동안 역사의 변두리에서 서 있었다

삼봉정도전, 그는 비운의 혁명가 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