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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고향-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하다 삼봉정도전1부♣

파라클레토스 2011. 3. 23. 00:46

 

♣학자의 고향-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하다 삼봉정도전1부 

 

 

 

조선 건국의 주역인가? 실패한 개혁가인가?

삼봉 정도전(三峰鄭道傳)

 

 

1392년 새나라 조선이 개국됐다. 도전의 오랜 여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서울의 도시계획을 세우고

 

각종 법과 제도를 정비해 나아갔다

 

정도전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를 원했다

임금보다는 어진 재상들이 이끌어가는 나라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를 왜면하고 혁명을 선택했던 삼봉 정도전

그는 누구였을까?

 

영남과 중부지방을 가르는 백두대간 소백산 구간

소백산 죽령길은 99구비, 그 만큼 높고 험했다

 

예로부터 죽령은 추풍령 새재(鳥嶺)와 더불어서 영남의 3대 관문이었다

 

죽령 아래 영남의 첫고을 영주,영주는 선비문화의 전통과 수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이다

 

부석사(浮石寺)-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 창건

국보 18호, 배흘림 기둥의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浮石寺)가 이 곳에 있으며

 

소수서원(紹修書院)-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사적 제55호)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역시 선비의 고장 영주의 자랑이다 

 

문향 가득한 영주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영주시 구성공원 옆에 자리잡은 고택..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

지난 2008년 복원된 옛 집, 이 집은 삼판서고택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격인 동루가 높은 축대 위에 앉아있다

 

정면 여섯칸, 측명 일곱칸의 이 고택은 안채, 문간채,대청마루 등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자형 구조와 팔각지붕을 가진 삼판서고택은 전형적인 사대부가옥 형태이다

대들보와 서까래들이 단아한 가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이 삼판서고택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정병철(봉화정씨20대 후손)-고려 말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정도전 아버지)라는 분이 사시던 집입니다

그 사위 평양 황씨 황유정 이런 분이 공조판서를 지내며 살았었고

황유정의 외손자 김담이라는 분이 이조판서를 지냈기 때문에

삼판서고택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서깊은 이 집이 주목을 받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1342년 이 방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형부상서 정운경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영주의 한 고가에서 태어난 삼봉 정도전,

 

그가 격동의 역사를 이끌 인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삼봉정도전, 그는 혁명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선 500년 내내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실록은 한결같이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은 도량이 좁고 시기하며 겁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해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 일기에도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진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역적으로 체포되자 허균이 정도전을 좋아했다며

같은 역적 무리로 취급하고 있다.

 

반면 상반되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이색은 제자인 정도전을 군자라 칭하며 그를 존경한다고 했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 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이색

 

삼봉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줄 안다-정몽주

정몽주는 정도전을  일러 사람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했다

 

개국 초기에 시행된 큰 정책은 다 선생(삼봉)이 찬정한 것으로써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엿으니 선생(삼봉)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신숙주

 

세종대의 명신 신숙주는 정도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와 비교할

인물이 없다고 했다 

 

이렇듯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왜 이렇게 정도전은 전혀 상반된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야 했을까?

특히 정도전에 대한 조선왕조의 부정적인 평가는 수 백년간 이어졌다

 

평택에 위치한 삼봉기념관, 이곳에는 정도전에 대한 가혹한 평가를 말해주는

유물이 한 점 전한다

 

복훈교지-정도전을 복권한다는 왕의 교지,

그런데 이것은 1865년(고종2)에 내린 것이다

죽은지 450년 후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태어난 시기는 고려말, 무신정권 이후 귀족 세력은 부패하고 원의 간섭과

명의 압력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였다

또한 홍건적의 난, 왜구침입으로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혼란의 시대,

십대 중반의 정도전은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상경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 시기 정도전은 일생 일대의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던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권근, 윤소정 등

당대 신진지식인들을 만난다 

이는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친구 사이였기에 가능했다

정도전은 이색에게 성리학에 대한 기본 개념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14살 이상의 이색을 만난 것은 정도전은 행운이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이색은 13살 때 과거에 합격한 인재였다

특히 원나라의 유학, 신 학문인 성리학을 고려로 들여온 인물이었다

 

공자와 맹자 이후 다양한 학술의 유학을 송나라 주자가 집대성한 것이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단순한 도덕사상을 넘어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주목한

신학문이었다 

 

이익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이색은 원나라에 가장 높은 수준의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게 됐던 것이죠,

따라서 이색이 돌아왔을 때 이색이 원에서 배운 성리학이 그 당시 고려의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이색에서 그걸 배우고자

했고, 실제로 이색은 그 당시 10 후반 20대 초반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침으로써 고려이후 조선이 성리학 국가로 탄생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였던 이색과 정도전은 성리학의 해석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 차이가 나중에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정도전과 이색은 성리학에 내포된 사회변혁, 즉 개혁에 대한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익주교수- 이색과 정도전은 모두 성리학자로서 현실에 문제가 있고 이것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색은 문제가 사람에게 있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이색이 제안하는 개혁안이라 하는 것은 도덕성의 회복이라 하는데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제도와 체제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도전은 새로운 법을 만들어 이 법을 통해서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죠.  

 

 

이색의 성리학에 열광할 무렵 정도전은 필생의 친구이자 라이벌,

포은 정몽주를 만난다.

정도전보다 다섯살 연상인 정몽주는 이미 과거에 3번 연속 합격해

그 명성이 높은 때였다

 

선생은 더불어 이야기 하시기를 평생의 친구처럼 하시고 드디어 가르침을 주시어

날라다 듣지 못한 바를 들었다-삼봉집 中 정몽주와의 만남 

 

정도전은 정몽주의 만남을 감격적으로 기록하고 있디

정몽주가 자신을 평생의 친구처럼 대해 주었으며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정몽주에 대한 평가도 높았다. 여러사람의 의견을 명확하게 분석하여 설명하는데

털끝만큼의 그릇됨도 없었다며 정몽주의 학식을 높이 평가했다

 

여러 생도들이 각각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분석하여 설명하되 털끝만큼 차이가 나지 않았다

                                             -삼봉집 中 정몽주에 대한 생각 

 

정몽주 역시 후배 정도전을 각별하게 대했다

특히 정도전이 아버지 상을 당해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정몽주는 그에게 맹자를 보냈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장, 또는 반장씩 넘기며 정독했다

이후 맹자는 정도전 개혁사상에  근간이 되었다.

 

박현모교수(한국학 중앙연구원)

정도전이 맹자 책을 보면서 느꼈을 감동이라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귀족사회에서 백성은 하늘이 위정자에게 맡긴 그런 존재들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이고 근본이 뒤집힌다는 것이니까요.

요즘 쉽게 말하면 백성을 우습게 알다가는 큰코 다친다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정도전의 혁명사상은 맹자로부터 왔고 또 본인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혁명의

정당화를 하는 이론적 무기도 맹자로부터 받았던 하나의 큰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363년 22살의 나리로 과거에 합격, 정도전은 벼슬길에 나섰다

첫 벼슬은 충주사로 법제업무를 담당하던 정8품의 말단직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뜻 밖에 암초를 만났다.

연이은 부모의 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북한산(삼각산) 백운대(白雲臺),인수봉(仁壽峰),만경대(萬景臺)를 일컬어

삼봉(三峰)이라 한다

 

부모의 상을 치른 후 정도전은 삼각산으로 들어가 공부에 열중했다.

 

삼봉이라는 그의 호, 학문이 삼각산 세봉우리처럼 우뚝하라는 뜻에서

문후들이 지어준 것을 전한다 

 

이듬해인 1370년 정도전은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 박사로 다시 복직하게 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 무렵 고려는 흔들리고 있었다

노국공주 죽음 이후 상실감에 젖어있던 공민왕 역시 최만생 등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의 죽음은 정도전의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도전은 공민왕의 배원친명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당시 대륙은 원명교체기, 원나라는 쇠약해져가고 명나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려 권신들은 여전히 친명정책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륙의 새로운 강자, 명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여겼다.

정도전 등은 권신들의 친원청책을 반대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힘은 없었다.

 

다음해 원나라 사신이왔다.

친원파 집권세력들은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했다

정도전은 당시 실력자 경국흥의 집으로 찾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원나라 사신의 목들 베든지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오로리라, 그렇지 않으면 원나라 사신을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겠다 -삼봉집 中에서

 

 

젊은 정도전의 결기는 굳었으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정도전에게 유배형이 내려졌다. 유배지는 머나 먼 남쪽 나주였다. 

 

정도전의 유배지였던 전남 나주시, 나주읍성의 동쪽문인 동점문(東漸門),

이곳에도 정도전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배중인 정도전이 이곳에서 올라쓴 시가 현판에 새겨져있다  

 

나라 떠난 몸 붙어사는 것 같아,

누에 오르니 별안간 졸음이 달아나네

           -나주동루에 제하다 중 

 

정도전의 유배생활은 혹독했다.

남의 집에 세들어 살던 정도전은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띠집을 지었다.

두칸짜리 띠집, 정도전은 이 집을 초사라 이름붙엿다.

지금의 초막은 당시의 것을 복원해  둔 것이다. 유배지는 쓸쓸했다 

 

큰 산과 우거진 숲이 많고

바다와 가까운데

사람이 사는 동네는 거의 없다 -삼봉집 中에서

 

유배 직전 정도전은 성균사에 예문광교등 종4품 벼슬아치였다.

고관대작에 속하는 대부의 반열이었다

고관대작에서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정도전,

참담했던 당시의 심경을 읊은 시가 남아있다

 

동정에서 올리다

 

정월이라 설도 이미 지나가고

입춘도 다가오건만

주위는 아직도 위세를 부려

으스스 살갗에 스며드누나

이역에 묶여있던 오랜 나그네

떨어진 옷에 헌옷이 뭉쳤네...

 

정병옥(정도전 20대 후손)-

비참하죠, 젊은 34세에 혼자 여기서 사는게 말할 여지가 없죠

 

아내가 보내온 편지는 그의 아픔을 더 했다.

아내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호소해 왔다.

온가족의 기대를 안고 벼슬길에 올랐다가 귀향으로 가문이 망하게 된 것이

현인군자의 현실이냐고 힐난했다.

 

젊은 날에 가난을 견뎌내여 드디어 벼슬길에 나서 온가족과 가문이

기대에 넘첬는데 먼 남쪽으로 귀양을 가 가문은 망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으니 이것이 현인 군자의 진실입니까 -삼봉집 中 서간문 

 

때로 정도전은 술로 답답한 심사를 풀었다

 

가을장마

 

슬프다 나의 도는 왜 이리 적막한고,

술에 아니 빠지고 무엇하리오? 

 

 

마을에 살다

 

글 보다가 흩어진 책 그대로 두고

술 있으니 스스로 잔 기울이네

 

 

 

먼 유배지에서 정도전, 그런 정도전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다.

그것은 백성들의 삶이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정권, 그 아래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그런 백성들이 정도전의 눈에 들어왔다.

고려의 현실이자 벼슬아치엿던 자신의 현실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했다

 

박현모교수-

자기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았던 백성의 위치 이런 부분들을 아마

실감나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균관을 중심으로 모였든

또는 이색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런  엘리트들과의 교류가 다분히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상황이었는데, 본인이 완전히 죄인으로서 나주까지 가고 거기에서

자기를 대하는 백성들의 소박한 모습들이죠.

죄인이든 누구든간에 기본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일상적인 생활을 보여준 것이죠 

 

이 무렵 정도전은 벼슬아치들의 위선을 통령히 비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늙은 농부는 정도전에게 유배 이유를 물었다

아첨과 아불 벼슬 한자리 하다가 죄를  얻었습니까?

정도전은 아니라고 했다

 

농부가 다시물었다

자기 몸만 돌보고 처자만 보호다가 죄를  얻었습니까?

정도전은 또 아니라고 했다

 

농부가 다시 물었다

자만심으로 거들먹거리다가 적군을 만나 도망치는 바람에 죄를 얻었습니까?

농부에 답한다는 이 글은 당대 벼슬아치들의 비리와 위선을 통렬히

조소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박현모 교수-밭가는 농부의 얘기 속에서 깨달은 것이

나라는,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 농부가 하는 얘기가 '나는 대대로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데 

내가 걷은 수확으로 일부를 나라에 내고 나머지를 가족을 봉양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고 자녀를 키우는  그 행복 그것을 위해 산다'

하고 하는 걸 보면서

'나라가 평범한 농부들의, 보통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라의 자격이없다' 라고 하는 근본이 정치의 목표에 대한 반성

이게 이제 그가 유배지에서 깨달았던 가장 큰계기였고

바로 그러한 것이 가장 어려운 밑바닥을 친 인생속에서 다시 치고 올라 올 수 있는

정도전으로 하여금 생각의 깊이를 크게 갖게 했던 그런 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도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다

사람들은 선하게 살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도대체 하늘은 왜 선이 네게 시련을 주고 악이 내게 부귀를 주느냐고

정의라는 것이 잇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 놓았다.

의로운 자는 곤궁하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 것은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정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철학이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에는 또하나의 잠룡이 있었다.

왜구들이 침탈이 달했던 고려를 구한 인물,

나중에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였다.

그는 황산대첩 등 왜구와의 연이은 승전으로

갸냘픈 고려를 홀로 떠밭치고 있었다.

 

나주에서 3년여 마침내 그의 유배가 풀렸다.

그러나 당장 복권, 복직되지는 않았다.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 시기 정도전은 한양과 특별하 인연을 맺는다.

역대 조선임금들이 신주를 모신 종묘 앞,

 

종묘공원 한켠에 정도전의 시비가 서있다.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해서 1994년 세운 정도전 시비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

한양은 땅이 기름지고 풍요로우며 안팍의 산하는 천하의 요새라고 했다

 

개성 출입이 금지된 정도전, 당시 남경이었던 한양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대신 그는 삼각산을 거처로 정했다.

정도전은 삼각산 민테 삼봉재를 짖고 강론을 시작했다

해배 직후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한 정도전은 선택한 것은 공부와 강론이었다.

정도전이 강론을 시작하자 많은 학자들이 그를 찾았다. 

 

그러나 이마저 순탄하지 않았다.

땅 주인이 집을   허무는 바람에 부평을 옮겨갔다. 여기서도 세력가의 별장을 지으려

하는  바람에 김포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다.

5년 동안 세번이나 이사를 해야했다

이렇게 정도전은 정치안인으로 9년여를 보내야 했다.

 

서른 넷의 유배에서 불혹을 넘긴 나이까지 그의 날개는 묶여 있었다

이 시기 정도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영우교수(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자기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겨우 생활을 유지해 갔거든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권문세족이 쫓아내는 겁니다.

말하자면 불향한 사람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쫓겨 다니는 생활을 6년동안

하는데, 그러면서 권문세족의 횡포가 엄천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냐면 독서도 하면서 독서와 학문을

새로운 사회를 여는 하나의 정치 철학으로 가다듬기 시작하죠.

그 때 가다듬은 철학이 민본사상입니다.

 

유배와 야인생활을 거치면서 정도전의 가슴에 확고하게 들어앉은 건 바로

민본사상이었다.

백성이 근본이 되는 세상에 열망이었다.

1383년, 정치낭인인 9년째 되던 해 정도전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가 향한 곳은 함경도 함주, 바로 이성계가 있는 곳이다

 

이 무렵 정도전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시가 한수 전한다.

정도전에게 이제 고려500년은 겨우 물소리만 남긴 허망한 것이었다.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니

반 천 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물어 무삼하리오?

 

한영우교수-이성계 장군과 손잡은 이유는 이성계 장군은 두가지 장점이 있어요

하나는 당시 왜구들이 전국을 소란시키고 해서 왜구와의 전쟁이

그땐 가장 큰 사건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왜구토벌에 가장 공이 많은 사람이 이성계입니다.

그러니까 국민은 이성계 장군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 거에요.

애국적인 장군이다. 그래서 그런 점이 하나의 평가가 되었고,

 

또 하나는 이성계의 출신이 아시다시피 함흥지방 변두리에서 출세한

신흥가문이거든요.

그렇게 때문에 이성계 장군은 말하자면 개혁뿐만 아니라

왕조를 바꾸는 혁명 사업데도 뛰어 들 수 있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정도전이 이성계 장군과 손을 잡은 거죠

 

정도전은 최영장군 대신 이성계를 선택햇다

최영 장군 역시 덕망있고 존경받는 무장이었지만

혁명은 하지 못할 인물로 판단한 것이다

 

반면 이성계와는 뜻이 통하리라 믿었다.

정도전과이성계, 두 잠룡의 만남.과연 어떤 역사가 펼쳐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