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고향♣
♣설득과 통합의 리더 - 서애류성룡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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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13일
200년 역사의 조선은 최대위기에 처했다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8만 대군을 동원,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 7년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조선백성들은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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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불탔고 선조는 임진강건너 북쪽으로 몽진했다
조선 최대의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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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체절명한 위기에서 온몸 던져 조선을 구한 인물이 있었다
서애 류성룡 그는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어떻게 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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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屛山書院)-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사적 제260호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서애 류성룡을 모신 서원안의 사당
해마다 연초가 되면 길일을 잡아 유림들이 모여 그에게 제례를 올린다
이는 세배와 같다
서애 류성룡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제례
후학과 후손들의 마음과 정성이 향불로 피어오른다
한 인물에 업적과 정신에 바치는 이들의 몸짓은 정중하기 이를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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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1542~1607.음5.13)
영의정 문춘공 서애류성룡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관료, 그리고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특히 임진왜란 극복과정에서 관료이자 외교가,그리고 국사전략가로써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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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조선수군은 전란극복의 선봉장이었다
그리고 또 한 인물 류성룡
그는 어떤 리더십과 정책으로 나라와 백성을 지켜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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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당(晩翠堂)[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207,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
1542년 경북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류성룡이 태어난 의성의 사촌마을, 이 마을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서애 류성룡,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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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어머니는 안동김씨, 이곳 만취당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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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모친이었던 만취당 김사원이 건립한 건물
만취당 현판 글씨는 명필로 유명한 한석봉의 작품
이집은 류성룡이 태어난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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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외가에서 태어난 류성룡은 본가에 있는 안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낙동강, 그 유장한 물길이 휘감고 지나가는 안동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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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류성룡이 자라고 또 말년을 보낸 곳이다
물길이 휘돌아 나간다고 하여 '하회(河回)'라 이름 붙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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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
지난 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은
풍상류씨가 600여년간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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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아니라 하회별신굿 탈놀이, 하회선유줄불놀이 등 우리의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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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忠孝堂)
지금도 150여 가구가 살고있는 하회마을
마을 한 가운데는 류성룡의 종택 충효당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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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은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가 내당을 짖기 시작해서 증손자 류이하가
외당을 완성해서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류성룡은 늘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으뜸 덕목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이를 받들어 집 이름을 충효당으로 한것이다
그렇게 이어 온 명가의 전통이 40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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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가르침은 후손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후손들은 자주 충효당에 모여 선조가 남긴 깊은 뜻을 되새기고 있다
아로 새길 가르침이 있고, 본받을 선조가 있다는 것은 후손들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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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후원 만지송이라는 노송아래 그를 모신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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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서애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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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김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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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이 되던 해 류성룡은 한 스승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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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1501~1570)
도산에 은거하고 있던 62살의 퇴계였다
당시 퇴계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 저술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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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퇴계문하에서 수 많은 문인들이 학문을 닦고 있었다
명실상부 영남학파의 중심이 된 도산이었었다
하회마을과 가까운 곳에 퇴계가 있다는 것은 류성룡에게 행운이었다
류성룡은 퇴계에게서 근사록(近思錄)을 전수받았다
근사록은 송나라 유학자인 석채?가 성리학의 기본만을 뽑아 엮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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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숱한 관직을 두루 거친 퇴계는 류성룡에게
더 없이 좋은 스승이었다
퇴계역시 41년 연하의 약관 류성룡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다
퇴계는 류성룡에게 하늘이 낸 인물이니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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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역시 출사에 뜻을 두었다
1564년 22살의 나이에 소과에 급제 생원,진사가 됐다
다음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24살에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그는 무수한 관직을 거치며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 류성룡의 벼슬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정진영(안동대학교교수)-
"서애의 벼슬살이가 순탄했다고 하는것은 첫째, 류성룡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역량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을 시대에 맞게 발휘할 수 있었고,
또 선조라는 임금을 통해서 역량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외부적인 요인으로써는 당시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받는
퇴계 이황의 제자라는 사실도 서애의 순탄한 벼슬길의 큰 요인이었다고
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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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안동과 서울을 자주 오갔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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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생정(鳳笙亭)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470-2]
문경 마송면에 봉생정, 류성룡은 물가 경치좋은 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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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서울을 오갈때 그는 이곳에 들러 주변경치를 즐기며 휴식을 취했다
대나무 숲에서 날아온 봉황이 앉았던 곳이라는 봉생정
영강과 조령천 물줄기가 합처지는 곳으로 그 풍광은 지금도 여전하다
정자기둥과 처마선 안으로 들어오는 풍광은 그대로 한푹의 산수화가 된다
이곳에 앉아 류성룡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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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대(水落臺)[경북 예천군 감천면 포2리]
류성룡이 다리쉼을 하던 곳이 또 있다
그가 신발을 벗고 행장을 풀어놓고 쉬었다는 곳 예천의 수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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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때는 25명의 학자들이 모여 선유계?라는 계를만들고 학문을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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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대
이를 기념해서 1915년 6가문 후손들이 이 수락대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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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선생장구지소(西崖先生杖銶之所)
후학들은 바위에 글귀를 새겨 류성룡을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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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깨끗한 물줄기, 류성룡 역시 이를 예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 물방울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이
맑은 날에 눈이 흩날리는 것 같다 - 영가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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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길에 류성룡 늘 순탄한 것만 아니었다
1591년 이른바 건저(建儲)문제로 북인인 이산해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대립이 있을 때 마다 상대를 설득하고, 타협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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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서애류성룡위대한만남)저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을 건저(建儲)라고 합니다.
정실왕비에서 출생한 세자가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하면 세자책봉이 문제가 됩니다
그때 류성룡은 중립을 지키고 어느 쪽 편도 들이 않았습니다
이유는 원자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후궁에서 태어난 아들 중
누구를 세자로 세워야 할지는 왕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많은 왕자들 중 세자로서 적합하다는 판단은 신하들은 잘 모릅니다
(신하는)왕자들을 교육은 시켜 보았지만, 양육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은 왕(선조)에게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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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기 조선은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조전랑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로 다투던 조정대신들은
급기야 동인, 서인으로 나뉘고 말았다
정치적 판단과 시국을 바라보는 차이로 인해, 동인과 서인은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인은 주로 퇴계이황과 남명조식의 그룹들로 이루어졌고
서인은 율곡이이등의 기호학파로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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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동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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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의 상황도 심상치 않았다
특히 일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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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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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신사의 보고는 달랐다
서인측에서는 전란을 예고했고, 동인측에서는 전란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보고했다
1591년 2월 통신사의 보고가 실록에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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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외군의 침입이 있을거라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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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사 김성일은 전쟁을 일으킬 만한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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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눈은 쥐와 같아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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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같은 동인인 김성일을 만났다
류성룡은 황윤길의 말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약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려는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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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김성일은 전란발생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라가 혼란에 빠질까 봐 그랬다고 그랬다
김성일의 개인적인 견해는 차차하고라도 조선통신사가 받아온 서계?에는
일본의 침략의도가 분명하게 적혀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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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고민이 깊어져 갔다
이미 병조판서를 거처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류성룡이었다
일본의 의도와 일본인들의 발언을 볼 때, 전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전란에 대비해 나갔다
조정의 반대를 무릎쓰고 일본이 침공 할 조짐이 있다는 것을 명나라에 통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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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류성룡은 조선의 방어체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제승방략 대신 진관법을 주장했다
제승방략은 유사시 각 지역의 군사들이 모여 서울에서 장수가 내려오면
적을막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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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설득과통합의리더유성룡)저자-
(제승방략체제)장점은 전 군사력을 모아서 한번에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패전했을 경우에는 더 이상 군사력을 보충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진관체제는 단번에 적을 섬멸 할 수는 없지만
단번에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아군이 쉽게 붕괴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군사체제입니다
그러나 진관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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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류성룡이 준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인재등용이었다
류성룡은 뛰어난 장수들을 천거했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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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1545~1598)
다행히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읍군수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단번에 6품계나 승진하여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
이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파격적인 승진인사였다
여기에는 류성룡과 이순신의 오랜 인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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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집터-서울특별시 중구
류성룡과 이순신의 인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순신은 1545년 남산 기슭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13살에 서울에 올라온 류성룡은 가까운 묵?정동에 살고 있었다
류한성(류성룡15대후손) -
류성룡은 의성에서 태어났지만 하회마을 에서 성장하다가
13세에 입안공(류성룡부친)이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인현동)으로 이사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충무공 이순신이 살고 있어서 교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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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인품과 성장배경을 잘 알고 있어서, 확신을 가지고 조정에 천거를 해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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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순신 바로 위에 형 요신과 류성룡은 친구였다
이 때문에 어린시절 이순신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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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전란이후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에 보면, 류성룡은 이순신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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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지 10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았다가 비로소 정읍현감이 되었다
-징비록 중
조정에서 이순신을 천거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지 10년이 됐지만
승진되지 않았다고 개탄하고 있다
유성룡은 전란도중 역적으로 몰린 이순신이 죽음 직전에 처하자,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이순신이 무근지뢰? 등으로 한산도에서 잡혀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류성룡은 사직소를 내며 저항했다
자신이 천거한 인물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류성룡이었다
이러한 류성룡의 노력 덕분으로 이순신은 목숨을 건저 전란을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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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放略)
오랜 인연으로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류성룡
국방과 이순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된다
1592년 3월 전란이 일어나기 한달 전, 류성룡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저술하여 이순신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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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아 본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육전, 해전, 화공법등 다양하고도 신묘한 전술이라고 이순신은 평가했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전술이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
문관인 류성룡이 어떻게 이런 전략서를 썼을까?
이덕일- 조선이란 나라는 문관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무장위에 항상 도체찰사(총사령관)는 문관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고위급 문관들은 병법을 공부합니다
문관들이 (병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병서를 보는 정도의 사변적인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실제 전투나 전장에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는데
류성룡은 실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론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능한 병법을 쓸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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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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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 단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전쟁이 터지자 류성룡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 선조는 몽진을 단행했다
선조는 유성룡을 유도대장에 임명, 서울을 사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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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1556~1618)
이에 이항복은 백성을 위무하고 외교전략을 위해서는 류성룡과 함께 가야한다고 주장,
함께 임진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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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다다른 선조는 류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류성룡은 그날로 영의정을 사직했다
전란속에서도 조선조정은 파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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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피난은 계속됐다, 개성을 거처 평양까지 어어졌다
유성룡은 도체찰사직에서 파직 된 몸으로 선조를 호종?했다
아무런 벼슬없이 왕을 모신 것이다
그는 비록 면직됐지만 어가를 모심에 감히 뒤처짐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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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부대 북상이 계속되자,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자 류성룡이 강하게 반대했다
아직도 조선팔도가 완전히 점령된것도 아니며, 호남지방에는 여전히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며, 류성룡은 극구 반대했다
류성룡의 결사적인 만류로 선조의 몽진은 의주에서 그첬다
만약 선조가 압록강을 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류성룡은 끝까지 선조를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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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교수(안동대학교)-
당시에 선조도 요동으로 피난하고픈 마음이 컷을 것입니다
그때 류성룡이'전하께서 만약에 중국땅에 한 발자국이랃 들여놓게 되면
이 조선은 더 이상 전하의 땅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민가에 전해지면 민심을 걷잡울 수 없다' 이런 논리로
선조의 마음을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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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그러나 전황은 일본의 바램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육군은 모두 무너졌지만, 조선에는 수군이 있었다
류성룡이 천거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일본의 해상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것이다
특히 한산대첩으로 일본의 전략은 물거품이 됐다
일본군은 평양에 발이 묶였고, 선조는 압록강을 넘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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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92년 12월 명나라 지원군 이여송부대가 참전,
일본군의 진격의지를 꺾어버렸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수복, 일본군을 임진강 이남으로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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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이들 명나라군을 지원하는 임무 역시 류성룡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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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전서
당시 류성룡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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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하하는 조명연합군 앞에 임진강이 가로막았다
류성룡은 군사들에게 칡덩쿨을 모아 밧줄을 꼬게했다
그리고 강 양쪽에 통나무로 지지대를 세우고, 칡덩쿨 밧줄로 연결했다
그러나 밧줄이 늘어져 강물에 잠겨있자, 모두가 헛힘만 썼다고 투덜댔다
이에 류성룡은 강 양쪽에 배틀같은 구조물을 설치하고,
1000여명의 군사를 동원 밧줄을 당겨 팽팽하게 했다
그러자 부교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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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교로 대포와 물자가 무사히 도강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는 금속할자와, 한글과 거북선, 그리고 류성룡의 부교를
한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극찬했다
전란초기에도 류성룡은 임진강가에서 기질을 발휘한 적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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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파주지역문화연구소)
선조의 일행이 모두 임진강을 건너서 동파나루에 도착했는데
왜적이 쫓아올 것을 염려하여 임진강 남쪽 기슭에 있는 옛 승청건물을 불태워서
관청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되어있기 때문에, 임진강을 건널 때 왜적들이 그것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어 강을 넘을 것을 염려하여 승청 건물을 태웠다는 예견으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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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도 전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국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목숨걸고 의병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의병이 무수히 봉기한 까닭이 봉기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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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도중 선조는 한글로 된 교지를 내렸다.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누구든지 공을 세우면 천민이라도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는 류성룡이 제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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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를 잡아서 나오거나 왜가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공이 있으면 양민. 천민을 물론하고 벼슬도 줄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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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한글교지는 금방 효과를 들어냈다
이 교지로 수 많은 의병들이 봉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면천법은 천민들이 왜적의 머리 하나를 베어오면 양인으로 신분상승 시켜주고
3~4개 베어오면 천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인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이 법의 공표 후 일본군에 가담했던 많은 노비나
하층민들이 조선에 역으로 가담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의병이 활성화돼서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는 그런 상황이 전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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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나자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기근이 심해 심지어 사람고기를 먹을 정도로 참혹했다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선조실록1594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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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류성룡은 또 하나의 과감한 정책을 제안했다
압록강변의 개시, 즉 국제시장을 열자고 한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중국인과 무역을 하게 했다
당시 엄격하게 규제하던 사무역을 과감하게 허용한 것이다
내가 요동에 자문을 보내어 중강진에 시장을 열어 무역을 하도록 요청하니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에 흉년이 심한 것을 알고서,
황제에게 아뢰어 이를 허락하였다 -징비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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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질좋은 조선의 무명에 열광했다
엄청난 식량이 압록강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류성룡은 황해도 염전, 소금일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해 주자고 주장했다
국가 재정도 늘이고 백성들의 민생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이었다
당시 소금은 모두 나라에 바치는 곡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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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소금 일부를 사유재산으로 인정해 주면, 생산량이 늘어 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염분을 개인뿐만 아니라 1년안에 국고도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로 약속하여 몇석으로서 공염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자기들이 먹도록 해준다면
1년 동안에 공염은 그 수량을 능히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질 것입니다 -근폭집 中
또한 류성룡은 세금제도의 개력도 단행했다
이덕일-
류성룡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크게 도변 하나로 귀결되는데
당시의 불합리한 신분제를 완화내지는 철폐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전의 공납이 각 가호(집안)단위로 세금을 납부했다면
류성룡이 제안한 것은 가호단위가 아닌 농지소유 단위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법을 강행하려고 아니, 조정내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모든 벼슬아치, 모든 양반, 심지어 아전들까지 반대하는 것을
류성룡이 무릅쓰고 작미법을 강행을 하는데, 작미법으로 인해서
후대에는 작미법이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바로 이 작미법 때문에 떠났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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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역사상 최대위기를 맞이했던 조선
이때 류성룡이 있었다
그는 인제를 천거하고, 나라를 방어할 전략을 세웠다
전란이 발발하자 피난가는 임금을 모셨고
의병을 모으고, 민생을 안정시킬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정책은 주요했고, 조선은 7년 전쟁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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