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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고향 소신에살다-방촌황희1부♣

파라클레토스 2011. 3. 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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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 고향♣

♣소신에살다-방촌황희1부 -♣

 

찬란한 역사는 옛것이 됐다

 

1392년 고려는 멸망했다

 

두문동-황해도 개풍군의 골짜기

충절을 지키고자 72명의 충신들은 산속골짜기 두문동을 찾았다

고려에 의리를 다 하려던 사람들, 그곳엔 방촌 황희도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은 황희를 설득했다.

20대 황희는 이제 막 벼슬 길에 오르던 차,

황희는 선택해야 했다

 

두문동을 휩쓴 불길, 화마는 고려의 충신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황희는 그곳에 없었다

 

황희는 멸망해 가는 옛 나라 대신 새로운 나라를 택했다

미래를 향한 황희의 선택 그것은 조선이었다

 

임진강-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겨울강이 녹아 봄의 강이 흐른다

지난 계절의 노고를 생명력으로 보상받을 시간

봄바람에 날개를 얹고 철새도 텃새도 잠시쉰다

 

반구정(伴鷗亭)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갈매기가 반려해 주는 곳 반구정

그 풍경속에 황희가 있었다

 

방촌(厖村)황희(黃喜)(1363~1452)

지금으로 부터 648년 전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의 명 재상이 된 사람

그의 인생은 지금의 인식처럼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파주는 그의 유배지였다

 

황희정승, 방촌황희보다 훨씬 친근하다

그만큼 황희의 후대에 조선의 학자라기 보다 인자하고 너그러운 인물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드러나 알려지지 않는 면모가 많다

 

김낙효(문학박사)-

우리가 황희정승이라고 하면 '허허정승' 이라고도 알려져 있듯이

상당히 다른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씨 좋은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와 같이 강직함, 자기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소신, 다른 사람하고 타협하지 않는 그런것이

결국  황희가 귀양을 가고 유배를 가게되는  것이 됩니다

 

황희가 정치계에 입문한 것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학록이 되면서부터 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 태종에 맞지않는 말로 파면을 반복하다

이조전랑을 거처 갑자기 경기감사, 도평의사 등을 맡게 된다

 

황희의 졸기에 보면 그를 믿고, 천거한 이가 있엇다

 

태종이 말하길, "그대(박석명)와 같은 사람을 추천해야만 그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자 박석명이 황희를 추천하여 황희는 갑자기 도평의사 경력과

병조의랑으로 천직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강문식(학예연구사)서울대학교 규장각

태종은 '박석명의 추천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고

그 당시 황희는 하급관리였는데,

차례의 아주 빠른 승진을 거처 지신사(知申事)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지신사를 맡았을 때, 맡은 이후에도 황희선생이 지신사로써 역할을,

업무수행을 잘 했기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태종으로부터 인정받아서

신임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신사(知申事)-조선전기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던 정3품 벼슬,도승지,비서실장

 

1410년 민무구, 민무질 형제사사

황희가 태종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사건도 있었다.

민씨형제의 처단이다. 민무구, 민무질은 왕권을 위협하는 외척이었다

 

태종의 처남들을 몰아내는데 비서실장격인 황희가 처리를 맡았고

민씨 형제들은 옥사했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신뢰는 대단했다.

태종은 황희를 곁에두고 늘 그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다

 

박현모연구실장(한국학중앙연구원)-

'태종이 단 하루만 보지못해도 답답해 하셨다' 고 되어있어요

그만큼 비서실장으로서 귀와 마음을 확 사로 잡은 거지요

 

내가 황희에 대해서는 다른사람의자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친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것처럼했다 -조선왕조실록 中 

 

황희에 대한 태종의 마음은 그만큼 각별했다

태종은 황희에 대해서 마치 자식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친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심정이 태종의 마음이었다

 

양녕대군의 세자폐위를 반대했던 황희

그러나 그는 태종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양녕대군의 폐위론이 팽팽하던 당시, 황희가 양녕대군을 두둔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죽여서라도, 세자를 다시 세우려했다

왕과 대소신료들이 주장하는 가운데, 황희가 동의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강문식 학예연구사(서울대학교규장각)

왕위계승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에, 특히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중요한 왕위 계승 원칙은

장자, 그리고 적자로 이어지는 것이었거든요

바로 적자이면서 장자인 분이 양녕대군이었고,

당시 정황을 봤을 때는 양녕대군이 더이상 버티기가 명확했거든요

자기 야망을 위해서 그랬더라고 보면,거기에 찬성을 했겠죠

그게 아니라 유배를 무릎쓰고라도 반대했다는 것은

원칙을 지키려는 소신이 더 강했다라고 볼수 있죠

 

이 일로 황희는 귀양길에 오른다

태종의 뜻이 얼마나 분명했는지는 누구보다 황희가 더 잘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처럼 돌보는 태종에게 반대표를 던진 황희

태종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유배지는 다시 한번 바뀐다

파주는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상소가 빛발첬다

태종은 신료들의 의견에 따라 황희를 이배시킨다

 

광한루(廣寒樓)  전라북도 남원시

아직 겨울에 끝자락 그러나 봄기운이 물과 땅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애향의도시 남원 그곳의 명소를 찾았다

사시사철 그곳의 풍경과 애닯은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

광한루다

황희의 두번째 유배지는 남원이었고, 여기 광한루였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한 광한루

이곳에 황희가 있었다

 

그러나 광한루는 황희보다 춘향이다

그녀에 대한 노래 또한 우리 귀에 익숙하다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이리 오너라 업고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사랑이야

이이이이  내사랑이로다. 아매도 내사랑아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떼뜨리고, 강릉 백청을 따르르르 부어,

씰랑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웁벅 떠 반간 진수로 먹으랴느냐~~

 

노상준소장(남원학연구소)

1419년 남원으로 유배를 오셨는데

선조이신 황감평이란 분이 쓰시던, 요천강변의 '일재'라는 서재가 있던 터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황희가 남원에 머무른 시간은 4년, 그동안 그는 철저히 은둔했다

책을 읽고 생각하며, 다만 몸가짐을 조심할 뿐이었다

유배지에서의 형벌을 황희는 묵묵히 감당했다

 

강문식 학예연구사-

유배지의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았다 라는

그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동갑의 친구가 방문해도 일절 만나주지 않는다

 

강문식 학예연구사-

태종에게 자기가 다른 위로가 있어서 반대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반대한 것이고,

태종이나 국가에 대한 자신의 충정은 변함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다른 마음이 없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차원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이 듭니다

 

황희가 세운 광한루는 후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황희가 세울 당시 이곳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

 

광한루는 25년 뒤 세종16년(1434) 정인지에 의해 부처진 이름이다

 

그 후 남원부사를 담임했던 장이국?이 오작교를 지었고

전라관찰사였던 정철이 호수를 만들었다

정철은 이곳에 3개의 섬을 만들고, 대나무를 심고, 연꽃도 피게 만들었다

 

오늘날 공원을 대표하는 루원 광한루

여러사람의 공이 보태졌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기도 했던 광한루는

인조 철종 고종시대를 거치며, 지금이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그 오랜시간을 거치며 잃어버리지 않은 글귀

황희의 아들 황수신의 것이다

황수신은 그의 아버지처럼 영의정을 역임했다

 

수신은 자신을 가르친 황희에 대해서, 자랑스러운 글귀로 기록을 남겼다

 

내 아버지의 이름은 황희요, 명재상이셨다- 황수신<광한루기>

 

그리고 남원에 대한 연고에 대한 글귀도 있다

 

황희는 아들을 엄격히 가르첬다

하루는 셋째아들 수신이 술에 취해 귀가를 했다

그런 아들에게 절을 올리는 황희

놀란 아들이 연유를 묻자, 황희는 아비의 말을 듣지않는 아들은 손님이므로

마땅히 절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김낙효문학박사-

아들이 깜짝 놀랐겠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셋째가 바른 길을 가서, 부자 영의정의 영광을 갖게 되죠

우리가 그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뭐냐면

많이 알려진 거와 같이,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세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녀교육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소신, 엄격함 이런것을..

엄격하게 자녀를 교육했구나 이런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큰 아들이 출세해 세집을 짖자,

황희는 집들이를 하는 잔치에 와서, 성을 내고 돌아가 버린다

거처가 호화로우니 뇌물이 오가지 않겠냐는 따끔한 충고였다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이런 황희의 강직한 인품을 기리는 서원이 광한리에서 20km쯤 달려 대강면에 있다

 

풍계서원(楓溪書院)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137

단풍과 시내의 풍경을 닮고 싶은 풍계서원이다

정조12년(1788)에 지어진 풍계서원은 강당과 사당 내삼문 등으로 이루어진 소박한곳

 

창덕사(彰德祠)

한켠에 창덕사가 마련돼 있고, 내부엔 황희와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황희를 기리는 서원은 전국각지에 세워져 있다

그중 남원의 서원은 그의 선친들이 자리했던 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찬공(황희의 조부)묘소

햇살이 포근해 지기 시작한 봄의 초입, 바람도 잠잠해진 오후무렵

황희의 후손이 선조의 묘소를 찾았다

황희의 조부, 참찬공이 모셔져 있는 묘소다

남원에 살던 선조들은 황희가 태어나기 전 이곳을 떠났고,

황희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황의담(장수황씨 호안공파17대손)-

(황희의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참찬공)의 묏자릴 알아보기 위해

전라도 일대의 풍수지리 전문가를 찾아다니다가 나옹선사를 만나게 됩니다

나옹선사가 정해 준 묏자리가 바로 이자리입니다

이 묏자리를 알려주고 나서

황희의 아버지께서 말씀드리길, 할아버지를 여기에 모시고 이곳(남원)을 떠나야

큰 인물을 낳을 거라고 했어요

 

지금은 반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고향을 떠난 뒤 한동안 후손들은 남원을 찾지 못한 듯하다

이 비석은 후에 황희가 세워드린 것이다

청년 황희가 남원을 찾았을 때 조부의 묘를 정돈해 드렸다

 

황의담(장수황씨 호안공파17대손)-

이 비는 방촌선생께서 직접세운 비입니다

과거에 합격되고 나서 성묘를 와 보니까 묘비가 없어서 비를 세워 놓고 가셨어요

그 후에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부러진 비를 땅에 묻어 둔 것을

종친회 후손드이 놋쇠로 비를 이어서 다시 입석해 놓은거에요 

 

남원과의 인연이 깊은 황희

남원 그다음에 행보는 어디로, 어떻게 이어졌을까?

 

남원에 4년을  보낸 후 세종의 뜻에 의해 한양으로 돌아온다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황희지만,

세종은 황희를 기꺼이 불러들였다

 

세종(1397~1450)

 

다시한번 조선의 새 역사를 쓰려는 세종에게 황희는 필요한 인제였다

때는 세종4년,

조정의 반대에 거셌지만 국정의 안정을 위한 세종의 선택이었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오해도 풀린지 오래였다

 

세종강문식 학예연구사-

태종자신도 황희가 개인적인 욕심때문에 양녕대군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이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희의 능력이라든가 이런걸 인정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아들 세종이 국정을 스스로 운영해 나갈 때,

세종을 보좌할 수 있는 믿을만한 신하가 필요하다라고 생각을 했고,

바로 그런점에서 황희를 재기용을 했다 라고 볼수가 있는 것이죠

 

태종(1367~1422) 당시 상왕

세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

상왕태종은 세종에게 황희의 일을 이야기 했다며

오늘에야 경을 만났다고 반가움을 드러낸다

 

원칙과 소신에 따라 태종을 반대했지만,

그것이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태종은 알고 있었다

 

황희의 치세는 세종을 보필하며 꽃을 피운다

황희는 세종 앞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펼처나아간다

 

황희가 5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한 일은 조정의 구조조정

 

 

재상반열에 고위직관리가 많아 국록을 축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국초기에 반해 재상과 공신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있음을 황희는 지적했다

40명이 안돼던 수가 그사이 7여명에 이르러 폐단이 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황희는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태조초기의구조에 따라 중앙부처의 몸집을 줄여  재정을 아끼는 동시에

행정능률을 높이고자 했다

황희의 주장으로 40%가 넘는 30명의 관료들이 구조조정된다

 

당연히 황희를 반대하는 무리들의 주장이 높았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의견을 존중해 책사로써의 역할을 맡겼다

중대사의  결정에는 황희의 발언이 주요하게 반영됐다

 

박현모연구실장-

조정에서는 세종이 경은 일을 결단하는데서 아주 뛰어나다

결단력있는 재상이었고, 국가에 있어서는 아주 결단하고 단호한

의지와 추진력을 가졌던 그런 지도자였던 것 같아요

 

황희의 결단력은 전쟁에도 발휘됐다

여진족이 평안도를 습격해 조선병사가 전사하고,

민간인이 사로 잡히는  변란이 일어났다

 

이때 신료들의 의견은 참고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심지어 후하게 대접하달라는 중론이 일었다

이에 황희는 거세게 반대한다

모역을 당했는데도 잠자코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파저강토벌(1433)

황희는 전쟁을 원했고 세종은 이번에도 황희의 뜻을 따랐다

 

황희는 병사의 배치와 작전지휘에도 깊숙히 개입했다

 

박현모연구실장-

다들 현상유지 중심인데,

희가 보기에 국방에 관한 부분은, 현상유지, 좋은게 좋은게 아니고

중요한 국가가 결정해야 하는것, 이런 상황에서는 한번 결정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하는 것이죠

세종이 황희는 결단력에 있어서는 뛰어나다 그런부분이죠.

큰나라의 그림전체를 보고, 긴 안목에서 어떤 문제를 결정해 주는

그런 정승의 역할, 재상의 역할이

로 파저강 토벌에서 발휘했던 황희의 리더십인거 같아요

 

황희의 강단에 의정부 관료들은 고개를 들고 바로 처다보지도 못했다

 

북방 6진을 개척했던 천하의 김종서도 어려워 했다

어느날 김종서가 술에취해 공회에 참석했다

그 모습을 본 황희는 김종서를 앞에두고 다른 하급관원에게 일러

김종서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고처주라 이른다

 

김종서는 이 일을 두고

전장에서도 낯 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 땀이 등을 적셨디

라고 말했다

 

세종은 늘 그런 황희를 늘 곁에 두고자 했다

심지어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출사의 명령을 내렸다

이미 황희는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기복의 명을 받고

3년상을 치르지 못한 바 있었다

황희는 무사태평한 시기에 왜 전례를 무너뜨리시느냐 이뢰었지만 거절당한다

세종은 그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놓고

하염없이 황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희는 부친과 모친의 3년상을 왕명으로 인해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강문식학예연구사-

유교에서는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원칙이죠

3년상을 치르게 해달라고 했는데도, 세종대왕께서 구지 기복을 하게 하죠

그만큼 당시 국정운영에서 황희선생의 비중이 컷다라는 것이고

그 만큼 세종대왕의 황희선생에 대한 신임이 높았다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라고 할 수있겠습니다

 

세종은 황희를 파겨적으로 대우하며 아꼈다

이조판서에 이어 곧바로 우의정을 제수했고

1년도 되지않아 좌의정으로 승지시켰다

세자사까지 겸하게 하며, 이로부터 4년 뒤엔 영의정에까지 임명했다

18년간 영의정을 지냄

 

박현모연구실장-

굉장히 파격적이죠, 세종9년에 맹사성과 황희가 발탁이돼요

그때부터 이제, '세종맨'.

세종의 사람들로 중요한  의정부가 뿌려지면서 효과를 거두게 되죠

세종8년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히 무능력한 왕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고

군사에서도 '양녕이 왕이됐으면 안그럴텐데' '충녕이 왕이돼서 나라가 엉망이다'

이런 사람도 많고, 세종9년부터 황희와 맹사성이 정승으로 자리잡으면서

안정화되면서, 농사라든가, 민생부분, 과학기술부분, 외교,

이런부분에서 착착 일이 진행되고 있지요

 

세종의 태평성대가 열리고 있었다

정치가 안정되고, 민심이 왕을 따르자, 세종은 문화창달에 힘을 쏟아부었다

정치적 격변기나 혼란기였다면, 훈민정음은 창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훈민정음과 더불어 손꼽히는 세종의 업적

아악도 정비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천문,역법에도 발전이 있었다

 

천문시계인 혼천의나 해시계가 제작되었고,

세계최초의 우량계 측우기도 만들어졌다

세종을 보필한 황희의 역할이 이 태평시대에 숨어있었다

 

박현모연구실장-

세종실록에서 가장많이 하는말이 '황희말대로 하라' 인데,

그것이 바로 국왕들의 신뢰, 황희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봅니다

 

강문식학예연구사-

어떤 사안들이 논의가 될 때, 그 핵심을 정확히 파악을 하고

거기에서 해법을 찾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라고

졸기?에 나와 있거든요

관료사회의 조정자로서, 리더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세종대에, 태평성대 속에서, 황희선생이 담당했던

그런 역할이 아니었는가 볼 수 있겠습니다

 

반구정(伴鷗亭)

황희는 세종이 승하하기 1년전까지 조정을 떠나지 못했다

평생에 벼슬살이를 마치고 반구정으로  돌아왔을 때가

그의 나이 87이다

황희는 갈매기를 벗삼아 3년을 지낸다

문과에 급제한 뒤 28세에 성균관에 나아가 87까지 관직에 있었다

60여년간 조선을 돌보는데 6조판서를 모두거처

3정승을 24년간 영의정을 18년간 역임했다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원대로 비로소 쉴  수 있게된 황희

 

 

반구정에는 그에 대한 글귀들이 현액으로 남아있다

 

 

미수 허목이 지은 반구정기

재상이었던 황희정승은 이곳에 반구정에서 갈매기같이, 해오라기같이 살았다.

 

이강복(문화관광해설사)

세종 13년에(영의정에 제수되어) 영의정을 18년 하시고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신 다음, 3년동안 여기 임진강에서 갈매기 벗삼아

낚시를 하시던 곳이 반구정입니다

 

테조부터 세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시며 황희는 쉼없이 살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 마다, 황희는 한결같이 조선을 살폈다

인제가 아무리 많아도 존경은 그들 모두의 것이 되지 않는다

이름이 얼룩지지 않고, 세상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인식되지 않으려면

평새의 행보에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황희는 어떤 깨달음이 된다

 

황희선새애유적지

반구정 아래에는 황희의 유적지가 있다

 

파주는 그가 젊어서 부터 인연을 맺었던 곳

그를 기리는 노력이 곳곳에 있다

 

이곳의 풍경안에는 황희가 있다

그가 먹고 마시고 걷고 생각하고 쉬던 곳

600년전 황희의 흔적이 이곳에 고스란히 있다

 

방촌기념관

황희의 호를 따라 지은 방촌기념관에는

 

황희의 영정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희의 일대기를 볼 수있게 꾸며 놓았는데

 

세종과의 인연이 각별한 만큼 세종장헌대왕실록도 보인다 

 

황희의 서체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유물이 내려오지 않아 10점이 채 되지않는다

 

 

황두하씨가 그의선조를 찾았다

3월11일에 있을 그의 제사를 앞두고 겸사겸사 한번 더 영당에 들렀다

때때로 한번씩 들러서 문안인사를 한다

 

이제 두해가 지나면 탄신650주년

황희정승을 모시다 보면 새삼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다

 

황두하(장수황씨21대종손)

아무 욕심없이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 특히나 세종대왕을 열심히 모셔가지고

세종대왕이 그 많은업적을 남기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후손들도 오늘날의 공직자는 본받아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조선을 위해 떠났던 황희의 길

황희는 그의 소신에 따라 과거의 고려를 등지고

미래의 조선을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도 나라의 이름은 바뀌었지언정

하늘아래 같은 백성이 살고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