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동영상◈/◐시사♡교양◑

♣참혹한전란,통절한 반성 징비록 -서애류성룡2부♣

파라클레토스 2011. 3. 23. 18:46

 

 

♣학자의 고향♣

♣참혹한전란,통절한 반성 징비록 -서애류성룡2부 -♣

 

 

임진왜란이 끝난지 6년 후인 1604년, 한 선비가 막 저술을 끝내고 있었다

저자는 63세 서애 류성룡이었다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그는 책의 제목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징계할 징(徵)' '삼갈비(毖)'  '기록할록(錄)

 

징비록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삼아 미래의 경계로 삼는다는 뜻의 징비록 

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전쟁을 온몸으로 극복해낸 류성룡이 남긴

통절한 반성의 기록이었다

 

서애 류성룡

그는왜 징비록을 썼을까?

또한 반성의 기록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서원 가는 길은 옛 정취가 그대로 묻어난다

낙동강변 아름다운 길 끝에 병산서원이 있다

 

존덕사(尊德祠)

병산서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존덕사

광해군때인 1613년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유림이 창건한 존덕사에는

서애 류성룡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위패(位牌)-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갖는 나무조각

                  종이로 만든 신주를 지방이라하고 나무로 만든 신주를 위패라 한다

 

 

병산서원(屛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산류씨의 풍악서당[豊岳書堂,1613년(광해군5)창건]을 

1572년(선조5)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공부하는 공간인 입교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 등 전형적인 서원형태를 갖추고 있다

1863년(철종14)에 병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특히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건축의 으뜸으로 꼽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도영교수(안동대학교건축학과)

집합건축의 속성이 굉장히 강하다는 특징을 들 수 있습니다

무슨얘긴가 하면은

병산서원에 있는 다양한 개별 건축물들이 한순간, 한시점에서 모두 계획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  강학공간을 중심으로 집합건축물이 형성되었고

그 후로 오랜 시일이 지난 다음에

 

제향공간이 들어서면서 집합건축물이 더 커지게 되었고

 

또 순차적으로 만대루와 복례문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서원건축으로서의 전체적인 형태가 잡혀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보더라도 병산서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건축의 백미 중의

하나라고 들 수 있습니다 

 

병산서원 건출물중에 특히 주목을 받는 건축물이 있다

공부하면서 쉬는 곳 역할을 했던 만대루(晩對樓)

 

이 만대루는 특별한 매력을 품고있다

낙동강과 주변 풍광이 만대루 기둥사이로 한폭의 산수화로 담긴다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 만대루의 독특한 구조

이로 인해 병산서원의 아름다움과 품격은 한층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88호]

병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변

서애 류성룡의 생애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옥연정사가 있다

 

류성룡이 10년에 걸처 지은 옥연정사는

사랑채와 문간채 안채와 별당채가 단아하게 어우러져 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온몸으로 극복해 낸 류성룡

전란이후 그는 또하나 우리 역사의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

전란에 대한 통절한 반성의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옥연정사에서 말년에 류성룡은 필생의 역작 '징비록'을 썼다 

 

숱한 저술을 남긴 류성룡 특히 그가 남긴 징비록은 커다란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징비록은 과연 어떤 책일까?

안동에 있는 한국국악진흥원을 찾았다

 

  

이곳은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자료를 확보해서 전시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학술 대회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으로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본산이다 

 

서애 류성룡의 귀중한 유물과 저서들도 모두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

서고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상자하나

상자는 국보 132호를 담고있다 

 

징비록(국보132호)

이책은 국보 제 132호 징비록으로 서애선생이 임진왜란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서

5년동안 집필하신 징비록 원본입니다

 

이 책이 바로 서애 류성룡이 말년에 저술한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낱낱히 기록한 책 

 

류성룡은 치열한 자기반성을 이 책에 담았다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또한 이 책이 후손들에게 경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지금에 와서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하여 둔다 -징비록 中-

 

근폭집(芹曝集) [류성룡종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보물 제160-3호)]

징비록에 일부인 근폭집은 국가의 군사업무와 일반 국정을 다룬 군국기무10조와

류성룡의 간단한 상소를 간추려 엮은 책이다

 

진사록(辰巳錄)(보물 제160-1호)

1592년~1593년까지 서애 류성룡이 올린 장계를 수록

 

진사록은 (1592~1593년)까지 왕에게 올린 장계를 모은 것이다  

 

군문등록(軍門騰錄) [보물 제160-5호]

1595년~1596년까지 군대의 업무에 관한 공문을 모아 만든 책

 

군문등록은 류성룡이 최고의 군사사령관인 도 체찰사로 있었을 때 쓴 글로

군사업무 전반에 관한 것이 수록돼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사건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을 증언하는 가장 믿을만한 기록이다

 

김순석원장(한국국학진흥원)-

"(류성룡은) 당시 영의정으로서 실질적인 전쟁의 총지휘관으로서 각종 보고를 받았고

대비책을 지시했던 지휘관으로서, 그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임지왜란을 연구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징비록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기록 돼 있을까?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의 다양한 활약과 면모가 그대로 담겨있다

 

특히 명나라 군을 대하는 그의 활약에서 외교전문가 류성룡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1592년 12월, 이여송부대가 참전하면서, 명나라가 본격적인 임진왜란에 개입했다 

 

지원군 자격을 참전한 명나라군, 이들은 조선과 류성룡에게 큰 짐이었다

한때 10만에 이르렀던 명나라 군, 이들의 식량을 조달하고,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는

모든 일을 류성룡이 접대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종록교수(성신여대 사학과)-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의 공헌이 절대적으로 작용해서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로 더욱 더 (명나라군대의 통제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왕이 신하들을 대하 듯 명나라의 장수 또는 관료들이 조선의 정승 이하의 관료들을

그런식으로 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명나라 군대를) 타이르기도 하고 조절을 하면서, 류성룡이 능력을 발휘해

결국은 커다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완급조절을 하면서,

명나라 군대를 접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가 있었다

오로지 조선군의 힘만으로 10배가 넘는 왜군을 격퇴시킨 임진왜란의

3대첩중에 하나다

 

행주대첩 1593년2월12일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을 싸워 크게 이긴전투

진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린다

 

류성룡은 여세를 몰아 서울을 공격, 수복하자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한강을 통해 바로 서울로 입성시키자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임진(臨津)이남 지역을 국데 지키는 한편 기회를 보아 경성의 동서를 습격하여

공취할 계획입니다. 선조26년(1593년) 2월25일-선조실록 中

 

일본군의 허를 찔러 배후를 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 지휘부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만 할 뿐, 결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참담했던 류성룡의 심경이 실록에 그대로 남았다

 

서울을 치자고 명나라 장수에게 몇번이고 간절히 요청했으나 듣지 않자,

류성룡은 더욱 마음아프고 민망하다 했다

왜 명군은 전투를 피하기만 했을까?

 

오종록교수-

"사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이제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명나라 본토가 안전해졌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명나라)장수들은 이제 더 이상 적극적으로

조선을 위해, 명나라 군대가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유독 이여송만은 더 큰 전공을 세워서 황제의 눈에 들려고 했는지,

적극적으로 일분군을 추격해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포를 사용하는 부대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의 외곽 벽제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고,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명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큰 희생을 치러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지고 난 뒤 적극적으로 전투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데,

이들이 황제에게 받아온  임무도 완수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명나라)장수들은 이제 더 이상 적극적으로 조선을 위해,

 (명나라군대가) 일본군과 전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류성룡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소외시킨 채 강화협상을 벌인 것이다.

특히 명은 순조를 폐위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조선을 통치하려고 했다

류성룡은 선조를 적극 보호했다. 자주국가를, 조선을 위한 일이었다.

 

또 다른 돌출 변수가 발생했다 

조선과 명과 일본의 전쟁에 건주여진이 참전하려 했다

만주지방에서 누루하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건주여진,

나중에 청나라를 세우는 그들이었다

 

이들이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누루하치의 기마병과 보병을 동원해서 일본을 몰아 내주겠다고 제안 한 것이다

 

'노아합치(누루하치) 휘하에 원래 마병3~4만과 보병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왜노를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에 공을 바칠것이다.' 했습니다

                                         선조25년(1592년) 9월 17일- 선조실록 中

 

그러나 류성룡은 즉각 이를 거절했다

이들도 명나라처럼 군사지원을 이유로, 곤란한 요구를 해 올것이 뻔했다

류성룡은 냉정한 판단으로 누루하치의 전쟁참여를 막았다

조선으로써는 더 큰 부담과 비극을 사전에 막은 것이었다 

 

임진왜란 극복과 반성의 기록 '징비록'

여기에는 또 류성룡의 면모가 담겨있을까?

징비록에는 군사전략가로써의 류성룡도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훈련도감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임금께서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명하시고

나를 도제조로 임명하시었다 -징비록 中

 

훈련도감 터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 훈련도감 설치를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류성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어 졌다

 

유구(遺構)

동대문 역사문화공간 조성과정에서 당시 훈련도감 유구가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훈련도감(下都監) 가상복원영상 

서울신는 훈련도감 복원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그렇다면 훈련도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종록교수(성신여대사학과)-

"임진왜란이 났을 때 한양에 제대로 군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군인들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지방의 부자 군인들을 대신해서

그들대신 번(숙직,당직)을 서는 대신, 말하자면 대신 근무를 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 군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군적에 이름이 없고, 군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실제 훈련을 받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하기도 힘든데, 이들에게 급료를 주면서,

새로운 성격의 군대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병법들을 다른 군대에도 훈련시킬 수 있는

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장소가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을 만들면서 조선의 전반적인 군사력을 강화, 확산시키고

아울러 중앙에서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빈민들의 소요사태를 막을 수 있도록,

빈민들이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하고

훈련도감을 만들게 됩니다"

 

문관이었던 류성룡, 어떻게  이런 군사전략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됐을까?

그의 아버지 류중영은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겸하는 황해도 관찰사 경력이있다 

류성룡은 이런 아버지로부터 군사정보와 지식들을 얻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문관들도 병법에 관한 공부를 겸했다

 

이런 배경으로 전란이 발발하자 류성룡은 좌의정으로써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최고의 군사사령관인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훈련도감을 책임지는 도제조가 되었다

 

이처럼 징비록에는 비록 문관이지만 군사전략가의 면모와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류성룡의 활약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덕분에 사료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지정사(遠志精舍) 경북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12-1

성리학자였던 류성룡

그는 전란도중에도 세제개혁 군제개편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런 개혁정책의 학문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류성룡 학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현장이 그의 고향에 있다

하회마을의 원지정사

아버지 상을 당해 낙향한 류성룡이 1576년 세운 그의 서재다

원지정사의 서쪽은 넓다란 마루며, 동쪽이 서재였다

또한 서재와 이어진 곳에 높은 다락을 지었다 

 

원지정사에서는 강건너 원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의 이름을 원지로 붙인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좌루(燕坐樓)

연지정사의 정자 연좌루

 

팔작(八作)지붕의 추녀가 마치 제비날개와 같다하여 연좌루라 불렀다

 

산과 강을 바로보기 위해 유성룡은 연좌루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린 상태였다

 

1593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류성룡은 잠시 고향 안동에 들러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불타버린 원지정사터에서 양명집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여는 성리학자 들과는 또다른 학문세계를 가졌던 류설룡을 말해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당시로써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양명학을 접했던 학자였다

임진왜란 3달 후 안동에 들어온 왜군들이 그의 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는 바람에

모든 서적이 다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몇권의 책이 풀숲사이에 무사히 남아있었다

 

임진년 7월에 왜구가 안동에 들어와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에 간칙해 두었던 서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오직 이 몇권만이 수풀사이에 있어 온전하였다 -서애집 中  

 

<양명집> 양명학의 주창자 왕양명의 문집

불타버린 원지정사 터에서 찾아낸 것 그것은 바로 양명집이었다

 

어린시절 류성룡은 당시 이단적인 학문으로 낙인찍혔던 양명학을 우연히 접했다

17살 때 아버지의 임지인 의주로 갔다가 당시 사헌사 심통원?이 버리고 간 짐속에서

양명학 서적을 읽고 간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양명학이란 어떤 학문이었을까?

당시 주류 성리학과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덕일(설득과통합의리더유성룡저자)-

"(성리학과 양명학의)가장 큰 차이는 성리학은 양반사대부들의 입장을 하늘이 내려준

배타적인 권리로 인식하는데 반해, 양명학은 그러한 철학에 반대를 하죠

양명학에서는 이업동도(異業同道)라고 해서

'직업은 각자 다르지만 추구하는도는 같다' 하는데

성리학에서는 '정치(정사)는 양반 사대부 계급만이 하는 것이다' 라고 규정하는데 반해,

양명학에서는'누구든지, 심지어 천민도 정치를 할 수 있다' 규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명학과 성리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신분제에 대한 시각이

성리학보다는 상당히 전향적이고 개방적이다 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류성룡이 전시에 추진했던 면천법이나 속오군, 작미법 등이

대부분(성리학의) 신분제를 완화 내지는 해제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은,

류성룡이 양명학의 영향을 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리학자를 표방했던 류성룡, 그러나 그는 금기시 되던 양명학의 장점도 수용했던

열린 학문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세계가 전란의 시대, 다양한 개혁정책을 세우고 추진했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라

전쟁을 당한데 대한 통절한 반성의 기록이었다

반성의 기록을 남긴 류성룡, 그 것은 류성룡의 용기이자 학자의 양심이었다

 

이태진위원장(국사편찬위원회)-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년 뒤에 일본에서도 판본이 간행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당시 대유학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서문을 썼는데 그 말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그렇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임진왜란)을 이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도와 의에 근거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조선, 곧 전쟁을 총지휘했던 류성룡 선생의 승리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류성룡의 간절한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한세대만에 조선은 또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었다

역사는 류성룡의 통열한 반성을 외면했던 것일까?

 

 임진왜란 긴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는 일본군에게 철수명령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이무렵 류성룡은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결단을 내렸다

1598년 9월. 류성룡은 사직상소를 올렸다

자신의 관직을 환수하여 사람들의 논란을 그치게 해달라고 했다.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관직을 환수하도록 명하여

사람들의 논란을 그치게 하고 뭇사람들의 노여움에 사과하소서

                         선조31년(1598년) 9월27일 선조실록중 -선조실록 中

 

탄핵(彈劾)

류성룡의 사직상소 후 그것은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란 극복의 혼신의 힘을 다했던 류성룡 그가 탄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후기 이긍익의 연려실 기술에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속오법을 만들고 작미법을 빙자하여 류성룡이 이익을 탐냈다' 고 되어있다.

 

속오(束伍) 작미(作米)법을 만들고..

폐단을 만들어내고 또 이것을 빙자하여 이익을 탐내었으므로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 연려실기술 中

.

농지소유를 기준으로 세금을 쌀로 내자는 류성룡의 세제개혁이 작미법이었다

백성의 부담이 줄고 주지들의 부담이 늘어나는제도였다

당연히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셌다

 

또 다른 탄핵이유는

류성룡이 천한 신분을 면천시켜주는 등 신분제 질서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서예(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 주다 -연려실기술 中

 

전란이 나자 류성룡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천민이나 양반서얼까지 군역을 지우자고 했다

양반들은 이를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민생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류성룡의 정책, 이에 반발한 반대파 세력들이

류성룡을 탄핵했던 것이다

 

류성룡이 탄핵을 받았던 때는 토요토미가 죽고 일본군들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반대파들 입장에서는 전란은 곧 끝날 것이고,

이에 류성룡의 능력이 더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덕일-

"류성룡을 공격하는 상소들 중에서 '속오군을 만들었다.

작미법을 만들었다. 서얼들이나 천민, 서예들을 발탁하여 벼슬을 주었다'

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이 류성룡이 공격당한

핵심사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양반사대부들은 전쟁이 일어나고, 마지 못해서 류성룡이 추진했던

그런 개혁정책들을 받아들였지만, 이제 전쟁이 끝나니까

류성룡이 추진했던 개혁정책들을 모두 다 없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양반사대부들만이 또 다시 집권층으로 복귀하는 그런 과거 회귀를 하기위한

희생양으로 류성룡을 점찍었고,

그래서 류성룡은 전란극복의 최고 일등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전란이 종전되는 것과  동시에 쫓겨나게 되는 역설의 주인공이 됐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선조의 태도도 애매했다

류성룡의 사직상소에 대해서 , 사직하지 말라 ,고만 대답했다

전란극복의 주역 류성룡의 사직을 적극 말리지 않았다

 

류성룡 반대파에 대한 질책도 없었다.

선조도 류성룡이 부담스러웠을까?

 

결국 류성룡의 사직상소는 받아들여 졌다.

류성룡은 고향 안동으로 향했다

사직한 류성룡의 낙향길은 비난했다. 도중에 여비가 떨어져

안동에 사람을 보내 양식을 가져오도록 했을 정도였다

한 나라의 영의정까지 지낸 류성룡, 40년 벼슬아치 류성룡의 낙향은

그렇게 쓸쓸했다 

 

류성룡이 파직당한 날은 1598년 11월19일 

공교롭게도 이날은 류성룡 자신이 천거했던 이순신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그날이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류성룡은 이순신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 했다

이순신을 애도한 그의 시가 전한다

 

애이통제(哀李統制)

   -이순신을 애도하다

 

당시 백전노장 이 장군은

한 손으로 친히 하늘 절반을 지탱했네

 

맹령한 불길로 풍신수길 같은

왜적의 마음을 다 태웠네

 

공은 컸지만

모함과 시샘의 틀을 피하지 못하여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무엇이 아까웠으리

 

고향으로 돌아온 류성룡은 긴 칩거에 들어갔다

낙향 5년째인 1603년 선조는 류성룡을 부원군으로 복직시켰다

그러나 류성룡은 곧바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선조는 류성룡을 호성공신2등에 책봉했다

류성룡은 이 역시 사퇴상소를 올리고 나라에게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리는 문서인

공신록본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했다

 

호성공신교지

임진오래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교지

 

조정에서는 공신들의 초상화가 필요하다며 류성룡에게 화공을 보냈다

그는 이마저도 물리첬다

 

류성룡은 선조가 내리는 벼슬이나 그 어떤 혜택도 받지 않았다

선조를 버린것이다

그가 징비록을 집필한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1607년 선조40년 류성룡의 병세가 위중해졌다

그는 모든 병문안을 사양했다

그해 5월 6일 류성룡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였다

 

류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멈췄다

백성들은 조정에서 정한 날짜보다 하루더 철실? 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대부들은 서울남산 류성룡의 옛 집터에서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 상처럼 통곡했다

장사날에는 유생, 사대부가 400여명이 모였고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탁월한 군사전략가 그리고 외교전문가였던 류성룡,

전란을 맞아 임금과 백성을 온몸으로  감싸안은 류성룡,

그는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었다

 

유장한 낙동강 물줄기가 감싸고 도는 안동하회마을

여전히 조선선비의 꿋꿋한 정신과 전통이 살아있는 곳

그 아름다움과 함께 류성룡이 남긴 뜻이 푸르게 남아 있는곳이다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자 국가위기 극복의 주역이었던 류성룡

징비록으로 남긴 그의 통절한 반성의 기록

오늘날 우리는 그가 남긴 정신을 얼마나 지켜가고 있을까

 

홈페이지
http://www.kbs.co.kr/1tv/sisa/hak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