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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의고향 : 당쟁으로 조선을 뒤흔들다 -우암송시열 2부♣

파라클레토스 2011. 3. 24. 01:19

 

 

 

♣학자의 고향

♣당쟁으로 조선을 뒤흔들다-우암송시열2부- ♣

 

   

1689년 6월 7일 우암송시열은 정읍에 도착했다

그는 국문을 위해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죄인 신세었다

죄목은 죄인들의 수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들이란 서인, 즉 노론의 무리를 일컫는다

하루아침에 권력을 잡은 남인세력은, 조선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붕당의 영수를 사지로 몰아넣은것이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또 다시 노론세력이 결집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을까?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우암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그는 의연하게 명을 받들었다

83세 파란만은 생애가 정읍에서 막을 내린것이다 

 

고암서원(考岩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상평동

5년후인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다시 찾은 권력으로 우암은 복권되고, 정읍에 그를 배양하는

서원이 건립(1695)됐다

 

송우암 수명 유허비(宋尤庵受命遺墟痺) 전북 정읍시 수성동 671-1 

영조 7년(1737)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수명 유허비가 세워졌다

한 인물을 죄인으로도, 시대의 대학자로도 바꿀수 있는 붕당정치 

 

치열했던 조선의 당쟁, 그 중심에는 우암 송시열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화산지형이 빚어낸 천해의 절경 제주도

쪽빛바다와 이국적인 풍광으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표 관광지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곳은 가장 극한의 유배지였다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데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절도안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형다음으로 무거운 형 유배,

한번 귀양을 떠나오면 돌아가지 못하는게 다반사였다

 

변화무쌍한 자연만큼이나 거칠고 모진 역사가 숨쉬는 땅 제주 

 

우암송시열(1607~1689)

1689년 정월 제주 송시열도 이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는 무슨사연으로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을까?

 

당시 숙종은 소외장씨 소생의 아들에게 원자칭호를 내리고자 했다

서두르는 임금에게 우암은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남인들은 송시열의 주장에 반박하고, 서인과 남인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숙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남인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실각하고 만 노론

 

오항녕교수(전주대학교 언어문화학부)

보고있으면 그냥 못지나가는 성격

그래서 뭔가 보이면 그것이 부당하다, 잘못됐다 꼭 한마디 말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그분이 나중에 '곧을 직(直)'자를 가슴에 새기고 사셨다. 이런 얘길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어렵게 얻은 아들을(훗날경종) 원자로  책봉하려는 숙종한테

참지못하고 아직 시기상조라는 말한마디를 해서

사실은 후명(귀양 보낸 사람에게 사약을 내림)을 받은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권력 뿐만아니라 목숨까지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83세의 고령으로 돌아갈 기약없는 귀양생활을 떠나오게 된 송시열

그는 자신의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해중유감(海中有感)

 

八十餘年翁(팔십여년옹)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滄波萬里中(창파만리중) 만리 푸른 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말 한마디가 어찌 큰 죄랴마는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내쫓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北闕空回首(북궐공회수) 북녘 대궐을 향해 머리를 돌려 보지만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남쪽 바다에는 계절풍만 부네

貂구舊恩在(초구구은재) 귀한 옷을 내리셨던 옛 은혜를 생각하면 ※갖옷구(求아래衣)

感激泣孤忠(감격읍고충) 외로운 충성심에 눈물만 흐르는구나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제주로 내쫓겨 목숨을  연명하면서도

우암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임금 가까이 가지 못한 것이었다 

절망뿐인 생활이었지만 우암은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오현단(五賢壇) 제주 제주시 이도1동 1421-3

그 흔적은 제주문화 발전에 5사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오현단에서 찾을 수 있다

비문조차 남아있지 않은 작은 제단

 

오현단 - 조선시대 체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사람을 배향한 옛터 

 

여기에 모셔진 5현은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와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그리고 유배된 충암 김정과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을 일컫는다 

 

척박한 땅으로 밀려온 당대 최고의 학자들

 

그들은 제주유생들에게 학문을 전수해, 제주문화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우암도 마찬가지였다

 

우암 송선생 적려유허비

5현단 중간에 위치한 우암적려유허비(尤庵謫廬遺墟碑)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다

제단서쪽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눈길을 끈다

증주벽립 - 증자와 주자처럼 소신있게 꼿꼿히 살겠다는 의미다

제주민들에게 전한 증주벽립은  우암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주자차의(朱子箚疑)

특히 송시열에게 주자는 학문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는 공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는 주자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자대전에 힘을 다해야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그는 주자대전을 전부 외울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우암은 주자대전 가운데 난해한 구절을 뽑아 주석을 붙인 책,

'주자대전차의'를 썼다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서적들을 면밀하게 조사해

후학들과 만든 책 '주자대전차의', 이는 백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량으로

주자에 대한 완벽한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곽신환교수(숭실대학교 철학과)

무너진 질서를 회복해야 되고 국가의 기강자체가 무너졌고,

청으로부터 당했던 여러가지 국권유린의 측면에서 조선을 되살릴 수 있는길은

송시열에 있어서는 '주자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다'라고 하는

개인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에서도 주자학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요긴한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엎치락 뒤치락하던 당쟁으로 흔들리던 위기의 시절

우암은 주자를 구원의대상으로 삼아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핵심 키워드는'명분'이었다

주자의 명분을 앞세웠던 송시열에게 예송논쟁은 피할 수 없는 산이었다 

 

주희(1130~1200)-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자학의 시조 

 

1659년 5월 효종승하

1659년 5월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한 효종 

 

장렬왕후(자의대비)(1624~1688)

이때  효종인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있던 것이 예송논쟁의 시발이었다

바로 이 자의대비가 효종의 국상에 상복을 몇년 입어야 되는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의 첨예한 논쟁이 벌어진다

 

당시 조선의 예법은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주자가례을 따랐다

부모상에는 장자 차자 막론하고 무조건 3년복이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경우 부모의 상복을 입는 경우는 장자와 차자의 경우가 달랐다

 

효종(1641~1674,재위1659~1674)

즉 예송논쟁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장례를 주관하는 빈청에선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현종은 대신들의 의견이 탐탁치 않았다

이는 왕위를 이은 자신은 물론, 아버지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은 예학의 계승자로 학문의 권위가 높은 송시열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송시열은 비록 왕통을 이었지만, 적자서열이므로 1년복이 타당하다고 고했다

 

최완수연구실장(간송미술관)

우암선생은 평생 원칙론을 주장하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죽을 때도 원칙론을 주장하다 죽게 되는데

1차예송 때에도 우암선생이 원칙론을 들고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원칙론을 들고 나오니까

우암선생인들 그게 불리한 줄 몰랐겠습니까?

불리해서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예송에서 1년 복을..

3년 복 입으라 하는 것이 더 좋지, 1년 복을 입는 것이 어떻게 좋겠습니까?

'왕권을 능멸하는 것이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암선생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1년 복을 주장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수허목(眉叟許穆)(1595~1682)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허목, 그는 왕이 비록 둘째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에게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체이부정(體而不正)-후사(體)는 이었지만 서자이므로 정(正)이아니다

 

비록 대를 이었어도 3년복을 입지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자로서 대를 이은 경우란 것이다

 

효종은 둘째아들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 -우암송시열 

 

'효종은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한 장자이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 -미수 허목 

 

최완수 연구실장(간송미술관)

체이부정이라서 체통은 이었지만 정당하게 이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적정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서자로,

적장자 이외의 여러아들 중에서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1년복만 입어도 된다

이 부분에서 예송이 시작되었는데

우암을 적대시하는 세력들 중에서 '이것은 왕권의 계승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거죠

'그러면 왕이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당하지는 않다'라고

주장한 것이 예송논쟁의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산윤선도(孤山尹善道)(1587~1671)

그는 상소를 통해 우암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만일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면 가짜세자 대리황제라는 말인가?

송시열의 주장은 왕실의 정통을 어지럽히는 역모의 논리다

 

양보할 수 없는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

대립의 고립이 깊을 수록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현종이었다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일뿐 아니라,

아버지의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을 빨리 매듭짖고 싶었던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 따른 것이 경국대전 예법으로 장,차자 구분없이 1년복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예론을 더 이상 제기하는 자는 역모로 다스리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그렇게 1차 송논쟁은 일단락됐다

 

화양계곡(華陽溪曲)

예송논쟁이라는 거대한 바람이 지나가자 우암은 다시 낙향을 결심한다

그가 은거한 곳은 충북 괴산 화양동

화양계곡은 예로부터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라고 불렸던 곳이다

 

명성에 걸맞게 이곳은 바위와 숲, 계곡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제2곡 운영담(雲影潭)

주자를 흠모했던 우암은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계곡의 아름다운 9곳을 '화양구곡'이라 이름 부첬다

계곡을 따라 내려온 맑은 못을 이루고 있는 제2곡 운영담

구름에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는 뜻이다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3곡인 읍궁암에서는 신하의 충절을 만날 수 있다

 

우암은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이 되면 바위 위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제8곡 학소대(鶴巢臺)-백학과 청학이 둥지를 틀고서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높이  솟아있는 바위산을 뒤덮고 있는 소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제 8곡 학소대

 

 

 

제9곡 파천(巴천)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이다 하여 지어진 이름

황야계곡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우암은 당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4곡 금사담(金沙潭)

계곡으로 십리쯤 펼처진 화양구곡의 백미는 우암과 관계가 깊은 금사담이다 

 

김영운(문화관광해설사)

(암서재는) 1곡에서 9곡중에 4곡인 금사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속에 있는 모래가  금빛 모래와 같아서 '금사담'이라고 칭했습니다. 

  

(우암송시열이) 생활을 하시고 책도읽고 글도 짓고

마음수양도 하고 시국고민도 했던 곳이 이건물이 돠겠습니다 

 

금사담 위쪽의 암벽위에 우암은 별장이자 서재였던 암서재를 세우고 시한수를 지었다

 

溪邊石涯壁 (계변석애벽) 시냇가에 바위벽이 열리어
作室於其間 (작실어기간) 그 사이 집 한탄을 지었네
經坐深經訓 (경좌심경훈)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分寸欲蹄攀 (분촌욕제반) 한치라도 더위잡고 올라보려네

 

암서재(岩棲齋)

  

암서재에서 우암은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송시열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들었고

화양동은 학문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우암이 세상을 뜬 뒤 후학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고 배양하기 위해서

화양서원을 세웠다

 

사액서원이기도 한 화양서원은 노론의 학문적 기반이었고,

조선성리학을 완성시킨 학문과 사상의 전당이다

 

그 때문일까 이곳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있다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는매년 봄이되면 활짝 만개하던 매화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매 해 꽃을 피우던 매화나무였지만

 

우암이 사약을 받은 1689년에 갑자기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 뒤 갑술환국으로 5년뒤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거짓말처럼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피었다는 것이다 

 

충효절의

우암은 화양계곡 곳곳에 마음속에 품은 글씨들을 새겨넣었다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武夷山空)

'임금계신 창오산의 구름은 끊어지고 주자계신 무이산은 비었다'

명이 패망하고 오랑캐인 청이 늘어섰던 상황을 절박하게 표현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

중화의 전통을 조선이 이어가려는 상징적인 표현 

 

만동묘(萬東廟)-1704년(숙종30)

(임진왜란때)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이 위패를 모신 만동묘

 

우암의 의지에 따라 제자들이 세운것이다

그에게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반대하는것은 대의와 같은 의미였다

 

오항녕교수(전주대학교 언어문화학부)

청나라가 명나라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사람들이 판단할 때 청나라는 야만인들입니다

조선사람들이 배워야 할 정치제도도 없고, 문화적 역량도 없고,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해 줄 수있는 경제적 역량도 가진 것도 아니고,

오직 군사력 하나로 짖밟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조선사람들은 청나라에 대해 적개심이 커지게 된 것입니다

명나라는 망하게 되고 그 이후(명나라의) 정통성을 조선이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명의리' 라고 하는 것은 청으로 주지않고,

우리가 (명의전통성을) 가져오겠다. 다시말해서,

동아시아의 정통성을 조선이 가져오겠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우암에겐 숙명 반청처럼 주자도 대의였다

그는 주자가 살았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자가 대비했던 대책이 당시 조선에도 적용됐다고 생각했다

주자제일주의자였던 우암

이런 그의 신념에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1665년 공주 동학사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였다

이날 논쟁의 촛점은 백호 윤휴였다

 

백호윤휴(白湖尹휴)(1617~1680))

윤휴는 송시열보다 10년 아래로 당대 일가를 이룬 학자였다

두사람은 비록 당파는 달랐지만 붕당을 초월해서 우정을 키워가는 사이였다 

 

윤휴 <-> 송시열

이들의 우정에 금이가기 시작한 것은 윤휴의 학문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윤휴는 학문이나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연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완벽한 것을 정평이 난 주자의 해석에 새로운 해석을 달고자 했다

하지만 주자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우암은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비난했다

 

곽신한 교수(숭실대학교 철학과)

송시열이 주자학에 대해서 철처히 신봉자적인 이치에 있었다고 한다면

윤휴와 같은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창의적 성격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학문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연스로운 일입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체계의 절대성을 유지하고 싶어하고

이것을 확산하려고 하는것은 자연스러운 성향이니까

주자학을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고 있는 우암송시열과

주자학의 상대성을 말하면서 17세기 조선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발굴하고

모색하겠다는 윤휴나 허목과 (송시열이) 대립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一理)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 속의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우암송시열-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이제 주자는 그만 덮어두고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한다 -백호윤휴 - 

 

사문난적 논쟁은 윤휴를 감쌌던 윤선도 사후에 다시한번 재현된다

감정싸움으로 번진 논란은 윤증에게까지 이어지고

이는 서론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한 단초가 된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 승하

불씨가 남아있던 예송논쟁은 15년뒤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대두됐다

 

또다시 자의 대비의 상복기간이 문제였다

당시 예법에 따라 효종을 장자로 본다면 1년복을 입어야하고

차자로 본다면 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

 

우암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대공복(大功服) 즉 9개월복이 맞다고 주장했다

 

현종(1641~1674)

하지만 이는 효종을 둘째아들로 본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왕통에 대한 정면 도전 임금은 자신보다 당론과 송시열을 따르는

서인정권을 몰아낼 결심을 굳힌다

차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논리를 관철시켰다

 

끝까지 효종이 차자임을 주장했던 우암은 결국 2차 예송논쟁에서 패했다

송시열은 왕실의 예를 그르친 죄로 유배에 처해졌다

남인정권은 우암의 가중처벌을 주장했다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로

또 다시 거제도로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임금이 우암에게 내린 형벌은유배중에도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

이는 탱자나무로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이다. 남의  집 바깥에 갖혀지내는 신세였지만

우암을 향한 남인들의 공격은 끊임없이 재기되었다

 

정만조 교수(국민대학교국사학과)

남인 정권 내에서 허목을 종주로 한는 청남이라는 정체세력이 있었는데

이 세력은 남인집권의 명분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는

예설을 잘못 (끌어왔던) 송시열에게 죄를 주어야만

남인집권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송시열이 예설을 잘못 끌어와 왕실의 전례를 그르쳤다는 사실을

종묘에 고해야 한다는 고묘론(告廟論)을 주장했습니다

교묘론을 주장하게 되면 송시열은 종사에 죄인이 되어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경신환국(庚申換國)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6년만에 서인들은 다시정권을 잡게된다

이와 함께 우암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또다시 송시열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숙종은 우암을 대노(大老)라고 칭송하며 곁에 두고 싶어했지만

송시열은 또 다시 고향에 은둔했다

 

남간정사(南澗精舍)

우암은 고향땅 회덕에 손수 건물을 세우고 남간정사라 이름을 부첬다

이는 평생에 큰 스승인 주자가 지은시

운곡 26영중 2번째 시인 남간에 유래한 것이다

이곳에서 우암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했다

재야에 머물렀지만 서인정권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송시열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책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됐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 그에게 물어 결정하곤 했다

이는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책 '화양연원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생을 후학양성에 힘썼던 우암의 제자는 무려 800여명에 달한다

그의 제가 가운데 당상관 이상의 벼슬에 오른이만도 54명이다

송시열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도 

이들을 통해 정치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곽신한 교수(숭실대학교 철학과)

우암송시열에게는 대단히 많은 문인들이 있늗 그 문인들의 이름이

'화양연원록' 이라고 하는 책에 수록이 되어 있고

그 수만해도 827명으로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숫자의 문인이 있는것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폭넓은 교유를 지니고 있었고

맣은 제자를 양성해 냈다고 하는 것을 방증하는 증거가 되는 책이

'화양연원록'입니다 

 

숙종 때 이르러 최고조에 이르렀던 당쟁

서인과 남인의 치열했던 권력다툼은 조선의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왕권강화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3번의 환국을 거처 노론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둠에 따라

사사됐던 우암의 직위는 복권됐다

 

우경섭교수(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송시열의 복권은 분명히 서인노론의 정치적, 사상적

헤게모니(한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것) 장악 과정이라고 얘기 할 수 있겠습니다

1716년에 송시열과 서인 측의 행동을 완벽하게 승인을 하면서

그때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지게 되죠

시호를 하사한다는 것은

'송시열의 정치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까지 인정을 한다' 라는

'국가에서 추앙한 위대한 유학자로 인정한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로부터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송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 우암송시열

 

송우암신도비(宋尤庵神道碑)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

 

그는 17세기 위기의 조선에서 학자로 정치가로 살았다

우암에 대한 평가는 좁혀지지 않았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처럼

아직도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혹자는 송시열을 북벌론의 화신으로 또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하지만

다른이는 '당쟁의 화신'이나 '사대주의 신봉자'로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암이 17세기부터 조선말까지 사회적,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대학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가 오늘날 우암 송시열을 주목해야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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