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4월 27일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즉위식이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의 지지로 오를 수 있었던 왕의 자리-
하지만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즉위 첫날
정조가 세상에 고한 첫 마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즉위식 그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영조-사도세자-정조, 3부자의 엇갈린 운명
문무가 출중하고 담대한 성품을 지녔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생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왕세자였다. 부자간의 극심한 갈등은 조선사에 유례없는 죽음으로 끝이 났다. 아버지가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영조는 정조를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사도세자의 형)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극심한 당쟁의 한 가운데 왕이 된 정조-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위한 당일 고백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정조의 선택 : 복수냐 탕평이냐
영조의 즉위를 돕고 붕당정치의 승리자가 되었던 노론. 52년간의 영조 재위기간동안 더욱 견고해진 노론의 세력은 왕권보다 강하게 조선을 지배했다. 노론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을 동조하고, 방관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그의 목숨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평생 단 하루도 깊이 잠들지 못했던 왕, 그가 선택한 길은 복수였을까, 탕평이었을까?
■ 정조, ‘행행(行幸)’의 꿈을 꾸다
드라마와 의궤 등의 영향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왕, 정조! 정조는 문무를 연마하기 좋아했고, 조선의 문예중흥을 이끈 왕이다. 즉위 직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연구기관으로 삼았다. 규장각은 또한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관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로 1794년 화성 건설에 착수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정조 즉위식을 통해 정조의 여러 가지 군주로서의 면모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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