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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영천3부-금호강물길 따라 선비정신 흐르고>2012.10.03

파라클레토스 2012. 10. 5. 11:08

 

저 강은 얼마나 오랜 세월 이자리를 지켰을까요?

사람은 옛사람이 아닌데 물길은 옛 풍경 그대롭니다

그래서 강은  그들의 손길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유유희 흐르는 금호강 물길 따라

옛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영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길

 

 

마른 따을 비옥하게 만드는 금호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청정일 수가 가장 많은 고장인 영천

금호강은 경산을 지나 대구에서 낙동강 본류로 유입되는 물길입니다

 

포항에서 발원한 이 물길은

영천 땅에 들어서 비로소 금호강 상류를 이뤄냅니다

 

강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길을 제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 많은 동식물들

 

 

그 강에 기대사는 영천사람들까지

이맘떼 영천 사람들은 너도나도 금호강에 나옵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고디 바로 다슬기를 잡기 위해서인데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떠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고디가 ) 더 많이 나와요

날이 흐리든지 해질 무렵, 아침 일찍

그대 되면 고디가 많이 나오거든요

 

금호강 맑은 물에서 잡히는 다슬기는

영천사람들에게 옛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음식입니다

 

 

 

평생 고디국을 즐겨 먹었다는 장춘이 할머니도 마찬가지

 

우선 부추와 얼갈이 배추를 썰어두고요

들깨와 찹쌀가루를 섞은 고추가루 양념을 버물립니다

이 양념은 고디국을 걸쭉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여기서 삶아서 속을 빼넣은 다슬기를 넣어주면

건더기가 될 재료준비는 끝입니다

 

가마솥에 다슬기 삶았던 물이 적당히 끓으면

양념이 잘 스며든 속재를 넣고 한소큼 더 끌여줍니다

 

고디국에 관한 추억 한가지가 더해지는 순간

그 사이 고디국이 만나게 끓었습니다

 

강이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이들만의 추억만은 아닙니다

수 십 수 만 년은 흘러왔을 저 물길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3백 여년 전 매산 정기지 선생이

전 벼슬을 그만두고 강학을 했다는 산수정

이곳에 영일정씨 후손들이 모였습니다

 

산수정은 퇴계영남학과 거성이었던 매산선생의 선비정신이 어린 곳

이곳에서 정중기선생 후손이 시조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근차 산수정 운

시제는 매산선생이 산수정을 짓고 쓴 시

오늘은 그 시를 후학들이 이어 짓는 자리입니다

 

선비정신이라 함은 곧게 사는 그 정신이

바로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 정자를

산과 물, 그곳을 따라

아무데나 정자짓는게 아닙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바로 산에, 그리고 강가에

산을 배우고 물을 배우는 겁니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했습니다

산은 흔들이지 않고 물은 순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지요

후손들이 쓴 시에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시는 선비의 꽃이라 했지요

평생 익힌 철학, 사상, 학문이  이 시 한수에 고스란히 담겼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 부모 합장묘

 

영천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시조 '단심가'를 지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전민욱 문화해설사

포은 선생이 살아 계실 때에는

보통 불교 상례이기 때문에

백일 탈상으로 끝나거든요

그런데 포은 선생이 당신이 배운 학문(성리학)에

3년 상을 하는게 옳다고 생각해서

열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3년

또 스물아홉살에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에 3년

각각 시묘를 살게 됩니다

그 시묘를 사시던 자리는

지금은 서원이 만들어져 있는데

여기서 1.5km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여기와서 문안 인사를 드리게 되지요

 

 

포은 선생이 시묘살이 했던 강가에는

조선 명종8년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 세워졌습니다

 

언덕에 임한다는 뜻의 임고는 아름다운 곳에 다다드려 노력했던

포은선생의 바람을 담은 이름

 

임고성원은 평생 성리학의 가르침을 살았던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공간입니다

 

 

 

 

동방이학지도

고려시대 정승자리까지 오른 문신이었던 포은 정몽주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묘살이를 했던    만고의 효자이자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대학자였습니다

 

그의 선비정신은 영천 땅 곳곳에 흘러들었습니다

횡계구곡 역시 그중 한 곳입니다

횡계구곡은 임란이 일어났을 때

군인이 아닌 선비의 몸으로 붓을 던지고

의병을 일으킨 호수 정세아 선생의 5세손

정만양 규양 형제가 경영한 구곡월림

 

 

태고와

조선후기 성리학자였던 형제는 벼슬길을 버리고

횡계구곡에 정자를 지은 뒤

후학을 가르치며 선비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고려 말의 큰 학자였던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서

여기에 오신 양수(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 선생 같은 분이 계실 때가

영천 학문의 르네상스 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이 두 분하고 병와 이형상 선생

함계 정석달 선생, 매산 정중기 선생, 명고 정간 선생 등

당대의 큰 학자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교류를 했던 장소였는데

그래서 여기 계시는 분들은 벼슬을 중요시하는게 아니라

오직 학문을 하고 마음 수양을 하는데

중심을 두었던 분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태고와 윗쪽에 있는 옥간정은 형제가 1716년에 지은 정자

한때 영의정 조현명을 비롯해  정중기 정간 등

수 많은 후학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곳을 지키는 건 종부 김시애씨 뿐

두 선생의 얼이 깃든 옥간정을 남에 손에 맡길 수 없어

일주일에 나흘은 이곳에 머불고 있습니다

김시애

옛날 선비에 비유해서(저 앞의 깊은 물은)

깊이 있는   선비의 마음 같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늘 물이 고여 있으니까

선비들이 학문에  차 있듯이 우리 영과담도

항상 저렇게 물이 고여서 선비의 마음과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 마음씨

모습과 같다고 상상하고 있어요

 

영과담

종부는 형제를 기억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해설사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형제가 선비정신에 비유했다는 영과담도

 

 

바람 맞으면 학무에 정진했다는 광풍대까지

물길 곳곳에는 형제의 숨결을 기억하는 유물들이 그대로 접해집니다

 

그때 문이라도 더욱 옥간정을 떠날 수 없다는 종부

자식들에게 그런 어머니는 근심입니다

종부가 오랜만에 솜씨를 냅니다

친정어머니께 배워온 집안의 내려온 건진국수입니다

안동 의성김씨 집안에서는 시집온 종부가 여름이면

귀한 손님들을 위해 내놓는 음식이었습니다

 

 

금호강 물길에는 아직도 선비정신이 흐릅니다

 

해발 940m방가산이

꼭꼭 숨겨놓은 오지마을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영천 4부 하늘 아래 첫 동네, 죽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