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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소개

파라클레토스 2013. 3. 3. 13:11

 

 

●창덕궁 소개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은 1405년(태종5)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됐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광해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인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창덕궁 탄생의 역사적 배경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건되었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法宮)-이궁(離宮)의 양궐 체제가 된다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 249호 장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큰 그림,

열여섯 폭의 비단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ㅇ르 모두 활용하여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궁중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을 추정한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체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각 건물의 이름도 기재하여

궁궐 연구의 복원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동궐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을 기록한 그림으로 예전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다

 

창덕궁 역사

 

 

 

관람 코스(약 2.1km)

 

돈화문 → 궐내각사 → 금천교→ 인정문→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

 

1.돈화문(敦化門)일원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 中庸』이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궐내각사

 

궐내각사는 궁궐안에 관원들이 근무하던 공간으로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는 예문관 등이 있다

 

 

금천교(錦川橋)(보물:제 1762호)

 

 

창덕궁 금천교(昌德宮 錦川橋 • 보물 제 1762호)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나서 6년 뒤인 태종 11년(1411)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청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紅霓橋) 다리 밑이 반원형이 되게 쌓은 다리이다

 

 

 

금천교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 주는 경계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여,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1411년(태종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 1762호로 지정되었다

 

대민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던 돈화문

영조는 재위 4년째인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돈화문 2층 돈화문루에서 헌괵례를 받았다

헌괵례(獻 괵者+或 禮)는 싸움에 나간 장수가 적장의 머리를 왕 앞에 바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 영조는 서울에 사는 노인들을 돈화문 앞에 초청하여 난의 원인이 당쟁에 있음을 지적하고,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에겐 중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돈화문 앞 광장은 이처럼 대민광장이기도 했다

 

아무나 칠 수 없었던 신문고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를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2.인정전(仁政殿) 일원

 

 

인정문(仁政門:보물 813호)과 인정전(仁政殿: 국보225호)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동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편에는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2)에 재건, 1803년(순조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연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됐다

인정전은 국보 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공사로 내시에서 1품 벼슬에 까지 오른 박자청

 

인정전 외행각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장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싴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그려 말 내시 출신인 박자청은 조선 개국 우헤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게 되었다

창덕궁뿐 아니라 제릉, 건원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회루, 무악이궁, 헌릉 등 많은 공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이후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 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3.선정전(宣政殿)일원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이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제목으로 제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 814호 지정되어 있다

 

 

 

경로잔치를 열기도 했던 선정문

선정전의 원래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일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하기 위해 양로연을 이곳에서 베풀었다.

양오련은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9월에 열렸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는 이곳에서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보였으며, 중종때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4. 희정당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 815로로 지정되어 있다

 

 

 

 

못 다 핀 개혁정치의 꿈, 효명세자(孝明世子)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효명세자는 후원에 작은 공부방인 의두합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즐겼다

 

5.대조전 일원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건물에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서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비극적 역사가 담겨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이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흐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에 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면,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 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6.성정각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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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궐내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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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선원전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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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낙선재 일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13)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수(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창덕궁 후원

 

10. 부용지와 주합루

 

 

 

11.애련지와 의두합

 

 

 

 

12. 연경당

 

 

12. 연경당

 

 

 

13.존덕정과 일원

 

 

 14.옥류전와 일원

 

 

 

 

 15. 신 선원전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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