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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광화문' 4년전과 어떻게 달라졌나>(종합)

파라클레토스 2010. 8. 16. 18:01
<'복원 광화문' 4년전과 어떻게 달라졌나>(종합)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15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광화문은 고종 중건 당시인 1865년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된 것으로, 2006년 이번 복원작업에 들어가기 전의 '1968년 복원판'과 대체로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기존 광화문이 콘크리트였던 데 반해 이번에는 목조로 복원됐다는 점이다. 도성(都城)의 정문이었던 숭례문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서의 의미가 살아난 것이다.

   또 현판과 위치, 서까래 등 '1968년 복원판'과 비교해 달라진 부분이 많고 목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도 있어 주목할 만하다.

  



◇현판ㆍ위치ㆍ서까래, 1968년 판과 달라 = 복원된 광화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광화문의 새 현판이다. 1968년 콘크리트 복원 당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을 기초로 만들어 걸었던 광화문 현판이 이번에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900년대 초의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제작한 광화문의 새 현판은 고종 때 공사책임자였던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다. 각자장(刻字匠. 중요무형문화재 106호) 오옥진 선생이 글씨를 새겼고 단청 채색은 단청장(丹靑匠. 서울시무형문화재 31호) 양용호 선생이 맡았다.

  



또 복원된 광화문은 기존 위치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각도도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 비틀어져 있던 것을 이번에 바로잡았다.

   이로써 광화문은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ㆍ문과 정확히 평행을 이루게 됐다. 광화문 광장 쪽에서 열린 광화문을 바라보면 문 사이로 흥례문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 복원 때 지금의 자리 근처로 다시 이전됐다.

   하지만 당시 경복궁 중심축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옛 중앙청) 건물의 축에 맞춰 지어졌기 때문에 위치가 동쪽과 북쪽으로 각각 약 10여m, 각도도 3.75˚의 오차가 생겼다.

   당시 중앙청 건물 축에 맞춰 광화문을 복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앙청이 광화문을 축으로 건립됐을 것이라는 추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복원은 발굴조사를 기초로 한 것으로, 발굴조사에서 고종 중건 당시의 건축 유구가 발견돼 위치와 각도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서까래(椽木)의 굵기도 바뀌었다. 광화문의 서까래는 1968년 복원 때 일제 당시 잘못된 실측 자료를 바탕으로 해 크기가 15㎝로 얇아 비례가 잘 맞지 않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번 복원에서는 이 역시 21㎝로 바로잡았다.

   지붕과 처마를 떠받치는 서까래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문루(門樓)가 훨씬 더 안정감 있고 튼튼해보이게 됐고 보기에도 더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됐다.

   이에 더해 광화문 복원의 총책임자인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大木匠)은 "기둥머리를 좌우로 연결하는 부재인 창방은 지나치게 큰데 반해 기둥은 너무 가늘었던 문제도 이번 복원을 통해 원래 모습대로 되돌렸다"고 설명했다.

   ◇홍예문과 처마, 해치의 아름다운 모습 주목 = 역사적 의미가 깊은 광화문은 미적 가치도 빠지지 않는다. 아래 석축에 아치형의 홍예문(虹霓門)이 셋이나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건축사에서 드문 형태일 뿐 아니라 모습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강렬하고 장엄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붉은빛으로 칠해진 문을 열면 천정에는 화려하게 그려진 봉황이며 현무며, 기린이 한 쌍씩 보인다. 세 문 중에서 가운데 문은 과거 임금만 드나들 수 있었던 문이다.

   광화문 앞뒷면에 있는 빗물받이는 용머리와 연꽃 모양으로 각각 만들어져 멋과 운치를 더했다. 담장에는 해, 달과 8괘를 그려놓았다.

  



멋스럽게 빠진 광화문 문루의 처마도 빼놓지 않고 봐야 할 명품이다. 서까래가 굵어지면서 예전보다 더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다.

   지붕 위로 눈을 들면 망새라고도 부르는 취두(鷲頭)가 보인다. 화재를 막고자 궁궐이나 전각 지붕 위에 놓은 장식물인데, 기존 광화문 해체 공사 때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해체했을 만큼 상징적 의미가 크다.

   광화문 앞 좌우에 자리 잡은 해치도 복원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시민들과 재회한 석물이다. 공사 기간에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이번에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화재를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어, 두 번이나 소실된 광화문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광화문 홍예문을 지나면 문 뒤편에 중건 당시 부속 건물 5개 동도 복원된 것을 볼 수 있다. 좌우의 동ㆍ서수문장청, 용성문, 협생문, 영군직소 등이다.

   이번 광화문과 주변 전각들의 복원으로 고종 당시 500여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가운데 125동의 복원이 끝났다. 동 수를 기준으로 하면 25%가량 완성된 셈이다. 광화문 뒤편의 건물 5개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의 76% 수준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omm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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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8/15 20:59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