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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계보

파라클레토스 2009. 5. 13. 13:25

고려 왕 계보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대한민국|중국|일본|

대(代)

왕 명

재위기간

약 사

1

태조(太祖,

 

877.1.4

 

~943,5.29)

918.6.15

~943.5

성은 왕(王) 휘는 건(建). 자는 약천(若天). 왕륭(王隆)과 위숙왕후 한씨(韓氏)사이에 877년 출생.고려왕조의 초대국왕. 연호-천수(天授).

896년-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918.6.15-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의 장수들을 기반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

919-송악(松嶽)으로 수도를 이전

926(천수9)-발해가 멸망하자 대광현 왕자와 발해유민들 흡수

927- 공산 동수전투에서 패배. 930-고창전투에서 승리

935-신라멸망 . 936.9-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

943-훈요10조(訓要十條)

고려(高麗):918년건국~1392년 까지 474년 동안 존재

916년-거란이 요(遼)나라를 건국

926년-발해 멸망

2

혜종(惠宗,

912~945)

943~945

자-승건(承乾), 휘는 무(武). 태조의 장자, 어머니는 2비인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 태조의 3비인 신명순성왕후의 아들 왕요와 왕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었고,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하였다 함.

3

정종(定宗, 923~949)

945~949.3

휘는 요(堯), 자는 천의. 태조와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사이의 아들이며,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박씨.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947년-거란을 방비하기 위해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

서경천도를 천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925~975)

949.3~975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4자. 정종의 동생.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와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임씨는 배다른 혜종의 딸이다. 950년에 광덕(光德)이란 연호 사용

왕권의 강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

956-노비안검법을 제정하고, 956-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함.

5

경종(景宗, 955~981)

975~981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과 대목왕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의 장자. 비는 헌애왕후황보씨(獻哀王太后)에게 목종을 얻고,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太后) 자매와 혼인,경순왕의 딸 헌숙왕후(獻肅王后)김씨와 혼인하였다

976년(경종 1년)-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여 토지제도의 시초를 마련함. 송나라와 우호관계

6

성종(成宗, 960~997)0

981~997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대종(戴宗)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아들이다. 고려 초창기의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기반을 튼튼히 했으며,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982-최승로(崔承老)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

983-3성(省) 6부. 12목(牧)을 설치

993-거란의1차침입-서희의 담판-강동6주 획득

995-6관(官)을 상서6부(尙書六部)로 개편. 지방-10도(道)·12주(州)

거란(요)의 침입-993년(성종12)~1019년(현종10)까지 3차례 침입

7

목종(穆宗, 980~1009)

997~1009

휘는 송(誦). 자 효신(), 시호 선양(), 개령군()

경종의 장자.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

997-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의해 폐위되어 충주()로 가는 도중에 살해됨

천추태후(千秋太后)-천년의 가을

강조(康兆)의 변(變)-강조가 1009년 목종을 폐위시킨 정변

8

현종(顯宗, 992~1031)

1009~1031

휘는 순(詢).자는 안세(安世),  태조의 아들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1009-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1011.11 -거란의 2차침입-양규(楊規)의 항전, 강조의 죽음

1018.12- 거란의 3차침입 -강감찬(姜邯贊) 강민첨(姜民瞻)
1019년(현종10) 2월 1일- 강감찬(姜邯贊)의 귀주(龜州)대첩

1022-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

1024- 5부(部) 35방(坊) 314리(里)

9

덕종(德宗, 1016~1034)

1031~1034

휘는 흠(欽).현종과 원성태후(元成太后)김씨(金氏)의 장남

1033(덕종2)-고장성(古長城)을 쌓았으며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천리장성(千里長城)축조 -1033(덕종2년)~1044(정종10)까지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쌓은 장성

10

정종(靖宗, 1018~1046)

1034~1046

휘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동생

1035-서북로(西北路)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

1036-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강화 

1037-압록강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음

1044-천리장성을 완성

1046-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

11

문종(文宗,1019~1083)

 

1046~10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현종과 원혜왕후(元惠王后) 김씨(金氏)의 3남, 정종의 아우. 비-이자연(李子淵,의 세딸, 인예태후(仁睿太后).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

즉위년-문하시중  최충에게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정리하게 하여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

1049(문종 3)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1050- 재면법(災免法)·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 등을 마련

1067-흥왕사(興王寺)를 세움. 대각국사 의천

1069-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세율

녹봉제(祿俸制)·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집권적 지배체제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

사학(私學)이 발달. 송.이슬람.일본과 교류

 '고려의 황금기'-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함

불교,유교.미술,공예등 문화 발전.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이자연(李子淵, ?~1086년)-고려 문종의 외척(外戚)으로, 시호는 장화(章和), 본관은 인주(仁州 :인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瀚)의 子

12

순종(順宗, 1047.12~1083)

1083

휘는 훈(勳), 자는 의공(義恭),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장자 .비는  정의왕후(貞懿王后)와  선희왕후(宣禧王后), 

이자연의 손녀이자 이자겸의 누이인 장경궁주(長慶宮主)

어려서부터 질환이 있었던 데다가 아버지 문종의 승하를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심신이 쇠약해져 재위 3개월 만에 승하

13

선종(宣宗, 1049~1094)

1083~1094.2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차남.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

1084-승과 설치

1085-왕의 아우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 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

헌종(獻宗, 1084~1097)

1094~1095

휘는 욱(昱). 선종과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의 장자.

1094-11세 어리고 소갈증으로 병약하여 사숙태후가 수렴청정

1095.7-이자의(李資義)의 난을 숙부인 왕희(숙종)가 평정하고,

1095.11-신병으로 숙부(왕희)에게 선위?하고

1097-14세 나이로 승하

15

숙종(肅宗, 1054~1105)

1095~1105

초명은 희,휘는 옹(顒),자는 천상(天常),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3남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비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유씨

1095-헌종이 11세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

1096-6촌 이내 혼인을 금지

1097-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

1101-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1102-기자(箕子)의 사당인 기자사(箕子祠)를 평양에 세움 

1103-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고려에 침입

1102.3-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설치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

예종(睿宗, 1079~1122)

1105~1122.4

휘는 우. 자는 세민(世民),숙종과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의 아들. 비는 선종의 딸 경화왕후(敬和王后 李氏).이자겸(李資謙)의 2녀 순덕왕후 이씨(順德王后 李氏)이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별무반(別武班)편성하게 했다

1107.12-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별무반(別武班)-여진정벌

1108-천리장성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

1109.7- 9성을 돌려줌

1109-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1112-혜민국(惠民局)을 설치(빈민구제)

1115-아골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을 금(金)을 건국

1116-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유학을 부흥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 옮

1119-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

1120-팔관회(八關會)를 열어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두 공

         신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다.

이자겸(李資謙, ? ~1126년)-고려중기의 권신(權臣)이자 척신(戚臣)으로, 예종과 인종 장인인 동시에 인종의 외조부

인종이 즉위한 후 왕위를 노렸으나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여 제거

17

인종(仁宗, 1109.10.28

~1146.2)

1122.4~1146.2

휘는 해(偕). 자는 인표(仁表), 예종과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장자

1122-14살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이 옹립

        이자겸은 3녀와 4녀를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이 됨

1126-이자겸(李資謙)의 난(亂)과 척준경

1135(인종13)-묘청의 난-김부식이 평정

묘청의 서경천도운동(1135년 음력 1월 4일~1136년)

1136-김부식에게<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에 완성

18

의종(毅宗, 1127~1173)

1146~1170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장자.

즉위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무신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중부,이의방,이고,이의민 등을 발탁

말년에 문신들 및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빠짐

무신을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의 계기가 됨

1170-보현원(普賢院)에서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일으

        켜 무신정권에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에 유폐

1173(명종3년)- 김보당(金甫當)등이 의종 복위운동을 일으키나

                        이의민에게 경주에서 살해됨.

무신정변(武臣政變) : 1170(의종 24년)~1270(원종 11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수립된 정부를 말하며, 그 시기를 무인시대라 함

19

명종(明宗, 1131~1202)

1170~1197

휘는 호(皓). 지단(之旦),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3남이며 의종의 동생.

1170-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의 의해 추대되어 즉위

1173-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이 의종 복위운동

1179-경대승(慶大升, 1154년~1183년)이 정권을 장악.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이의민(李義旼, ?~1196)을 불러 들임

1196.4(명종26)-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무신정권 시대가 열린다

1197-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된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

최씨 정권:1196(명종) 최씨정변으로 생긴 정권              

               집권자는 최충헌->최우->최항->최의 62년 집권

최충헌(崔忠獻,1149년~1219년).-최우(崔瑀, ?~1249년).-

최항(崔沆, ? ~ 1257년) 초명은 만전(萬全), 최우의 아들.-

최의(崔竩, ?~1258년)

20

신종(神宗, 1144~1204)

1197~1204

휘는 탁(晫). 자는 지화(至華),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5남,의종과 명종의 막내동생.비-선정왕후 김씨(宣靖王后)

1197-최충헌(崔忠獻)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

1198-만적(萬積)의 난(亂)-(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을 비롯해 민란이 발생 

1202-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평정

1204-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

21

희종(熙宗, 1181~1237)

1204~1211

휘는 영. 자는 불피(不陂), 신종과 선정왕후의 장자

1200-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

1211-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

        최충헌에게 폐위되어 유배생활

1219-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킴

1227-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유배

1237-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

몽골제국-칭지즈 칸이 1206년에 세운나라

원나라(元; 중국 대륙에 있던 국가로서는 1271년~1368년, 유목국가로는 1271년~1635년)

22

강종(康宗, 1152~1213)

1211~1213

휘는 숙(璹), 정(貞)·, 오(祦),자는 대화(大華 . 명종과 광정왕후 김씨(金氏)의 장자   비-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1197-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

1210(희종6)-소환되어

1211-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60세 늙은 나이로 왕위

23

고종(高宗, 1192~1259)

1213~1259

휘는 철(皞), 자는 천우(天祐), 강종과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의 장자  몽골에서 내린 시호는 충헌왕(忠憲王)

1212(강종1)-태자에 책봉

1213-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

최씨일가의 무단(武斷)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竩)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1218- 몽골과 협약

1225-강화조약을 체결. 다루가치(達魯花赤 : 행정 감독관) 를 둠

1231-몽고의 1차 침입

1232-강화도(江華島) 천도(遷都)하여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으나

         패하여 원나라의 속국으로 공민왕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1235-몽고의 3차 침입

1238-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을 소각당함

1252-몽고의 6차 침입-사실상 몽골에 굴복

8만대장경 간행-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려는 호국불교

강화도(江華島) 천도(遷都)-1231(고종8)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해  이듬해 최씨정권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한 것

24

원종(元宗, 1219~1274)

1259~1274

초명 전(倎), 식(植)으로 개명, 휘는 정(禎).  자는 일신(日新)

고종과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의 장자

1259- 고종이 죽자 즉위 원나라시호-충경왕(忠敬王)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

이후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조나 종이 아닌 자를 붙여야 했고,

앞에 글자는 원나라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忠)자를 넣어야 함

1269-6월 폐위되었으나 11월 원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오름

1270- 개경환도를 주장하였으나 임연의 아들 임유무가 반대

원종은 삼별초를 시켜 임유무를 제거- 무신정권이 끝남

개경으로 환도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한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 항쟁이 벌어졌다

1273-제주 삼별초를 끝으로 여몽 연합군에게 평정됨

삼별초(三別抄)항쟁(抗爭)-(1270년~1273년)고려와 몽골과 전쟁 후 삼별초가 몽골(원나라)및 고려왕조에 대항하여 일으킨 항쟁

25

충렬왕(忠烈, 1236~1308)

1274~1308

휘는 거(昛), 초명은 심(諶)·춘(賰),원종과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의 장자

1274.5-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 하여 고려에 옮

1285-일연(一然)승려가 삼국유사를 만듦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

몽골의 내정간섭을 많이 받았다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齊國大長公主 莊穆王后,1259~1297), 원나라 세조의 딸

26

충선왕(忠宣, 1275~1325)

1298

1308~1313

휘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 비-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

1296-계국대장공주와 혼인

1297-어머니가 갑자기 죽자 귀국.

1298-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잃은 슬픔으로 왕위를 충선왕에게 선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렀다

1307-원나라 성종이 죽자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하여 공을세움

       심양왕에 즉위

심양왕(瀋陽王)- 고려왕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봉작(封爵)의 하나

1308-고려왕에 복귀하여 정치쇄신을 열의를 보였으나 원나라 생활을

       즐겨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입성론(立省論)이 대두-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으로 삼아달라는 주장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

충선왕의 개혁 정치(忠宣王- 改革 政治)는 반원파를 중심으로 한 충선왕의 정치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고, 고려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江陵大君)에게, 심양왕위는 충선왕이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에게 물려준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심왕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고려의 왕을 견제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러한 고려 자체 내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이용하여, 원나라는 쇠퇴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군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툼

고려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왕위를 요구한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왕족에게 이어졌으며

마지막 심양왕 툭타부카(脫脫不花)가 후계자 없이 죽자 고려에선 요동정벌론이 일어난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 

27

충숙왕(忠肅, 1294~1339)

1313~1330, 1332-1339

휘는 도(燾). 휘는 만(燾),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과 몽골인 의비 야속진(也速眞)의 2남

1313-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있다가 양위받아  즉위

1314-민지(閔漬)·권보(權溥)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함

1318-제주도에 민란이 발생

충선왕은 조카 연안군(延安君) 고(暠)를 심양왕(瀋陽王)의 세자로 삼아 양위하고 원나라 양왕(梁王)의 딸을 맞게 하였다. 이리하여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된 심양왕 고는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구실을 참소하여,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간 체류하였으며, 그때 왕인(王印)까지 빼앗긴 일이 있었다.

체류한 후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1325-귀국한 충숙왕은 심양왕 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韓宗愈) 등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

1330- 왕자 정(禎 : 충혜왕)을 세자로 삼은 뒤 양위

나이 어린 충혜왕은 수렵·유희를 일삼고 소행이 옳지 못하자 원나라  명으로 1332년 다시 복위되었다가 1339년 죽었다

28

충혜왕(忠惠, 1315~1344)

1330~1332,

1339-1344

휘는 정(禎). 충숙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의 아들

1330-충숙왕이 폐위되자 즉위

1332년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충숙왕이 복위

1339-충숙왕이 죽자 왕고를 왕으로 세우려는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

사치와사냥 음탕한 행위로 원나라에 폐위되어 원나라에 끌려가 유배생활하다 죽었다

29

충목왕(忠穆, 1337~1348)

1344~1348

휘는 흔(昕). 충혜왕과 덕녕공주(德寧公主) 의 장자

어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1344-충혜왕이 죽자 8세에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

권문세족들에게 빼앗겼던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녹과전(祿科田)을 보구.정비

1347-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

1348-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

30

충정왕(忠定, 1337~1352)

1348~1351

휘는 저(胝), 충혜왕의 서자(庶子)로 희비 윤씨의 아들

이복 형 충목왕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하여 외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극심함

1351-공민왕을 옹립을 도모하는 원나라에 의해 3년만에 폐위됨.

1352-강화도로 추방 후 공민왕의 자객에 의해 독살 됨

31

공민왕(恭愍, 1330~1374)

1351.11

~1374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 충숙왕의 2남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영특하고 다재 다능했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

1349-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원나라 황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공민왕을 옹립

1351.11-이제현.조일신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진후

1352.1-몽고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고려의 자주적 전통

         을 추구

1352.2-개혁작업정방을 폐지, 토지와 노비문제를 해결

왕의 친정체제 구축. 첨의사와 감찰사

원나라-홍건적의 난

1354.7 ~1356-원나라에 최영등 파병

1356.4-본격적인 개혁작업- 대외적-반원정책 대내적-왕권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혁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奇)씨 일족을 제거

1356-.4-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반원정치의 상징적사건

공민왕은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선양

1358-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침

1359.12~1360.2-홍건적의 침입-최영등이 물리침

1361.11~1362.1-홍건적침입하여 함락시킴

1362-몽골군벌 나하추는 고려의 동북면을 침공-이성계가 물리침

개혁의 실패-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킴

1365-노국대장공주 회임을 하였는데 난산 끝에 서거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1365-을사환국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

1368-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을 보내 명나라와 협력해 원나라

      를  공략  명(明)나라(1368년 ~ 1644)

1370-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1371.7-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

1372-자제위(子弟衛)를 설치

1374- 제주도에서 묵호의 난이 발생

1374.7-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신돈(辛旽, ? ~1371년)은 고려 말의 승려.. 법명은 편조(遍照)

공민왕으로 부터 신임을 받아 정치개혁을 단행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을 함-권문세가들의 힘을 무너뜨려 신진사대부 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됨

1369-왕을 살해하려는 역모에 휘말려 1371-참형(斬刑)당함

홍건적(紅巾賊)- 원나라 말기  몽골족에게 통치받던 한족(漢族)반란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원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물러선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 사건-1차침입(1359.12), 2차침입(1360.9)

32

우왕(禑, 1364~1389)

1374~1388

휘는 우(禑), 임금을 뜻하는 왕(王) 공민왕(恭愍王)과 신돈(辛旽)의 시녀인 반야(盤若)의 아들

신돈이 처형된 후 입궐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1388.5 요동정벌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回軍)한 사건

고려사-신돈의 아들이라며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

33

창왕(昌, ?)

1388~1389

휘는 창(昌).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

1388-이성계 등이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내세웠으나

1389-1년만에 강화도로 유배되어 쫓겨나 10세때 시해됨.

1389-이성계일파는 신돈의 자식과 손자라는 이유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폐위시킴

1389.11(공양왕1)-김저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진후 다음달 죽임을 당함

34

공양왕(恭讓, 1345~1394)

1389~1392

휘는 요. 정원부원군 왕균(鈞)과 충렬왕의 서장자 강양공 자(滋)의 손녀 국대비왕씨(國大妃 王氏)의 차남

시호가 없이 공양군(恭讓君)으로 불렸다가, 조선 태종이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

폐가입진(廢假入眞)이라는 명분으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되고 유배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4. 4)호는 포은(圃隱), 고려의 문신

1394(태조3).4.17-왕태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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