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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계보

파라클레토스 2009. 5. 13. 13:26

 

 

 

조선 왕 계보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대한민국|중국|일본|

대(代)

왕명

재위기간

약 사

1

 

태조(太祖, 1335.10.11

~1408.5.24)

1392.7.16

~1398.9.5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의 적자, 능-건원릉(建元陵)

1380(우왕6).9- 황산대첩(荒山大捷)

1388.6-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7.17- 조선왕조 건국

1394.10-개성에서 한양(漢陽)천도

조선(朝鮮)왕조(王朝)-(1392~1910) 태조~순종까지 519년 통치한 왕국

조선(朝鮮)-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이라 고칠 때까지 505년 동안 사용

정도전(鄭道傳,1342~1398. 8. 26)-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

1394(태조3). 3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정도전이 저술

1397(태조6) 12. 2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

2

정종(定宗, 1357.7.1

~1419.9.26)

1398.9~1400

휘는 경(曔), 초명 방과(芳果). 태조와 신의왕후의 둘째  능-후릉(厚陵)

1398.8.25-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이복형제의 싸움

정도전, 남은을 척살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임

1398.9-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

사병을 해체하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편입

1400-2차 왕자의 난  동복형제 방간과 방원의 싸움

1400. 9. 26-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인덕궁(仁德宮)에 거함

3

태종(太宗, 1367~

1422.5.10)

1400~1418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태조와 신의왕후의 5子.능- 헌인릉(獻仁陵)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승리해 왕위에 오름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강화 힘을 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 강화

토지제도. 조세제도를 정비 해 국가 재정을 안정

6조 직계제.   1402-신문고 설치.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

1413-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하륜등이 경제육전이 편찬된후 만든 법전

1418년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

4

세종(世宗, 1397.4.10

~1450.2.17)

1418.8~1450

휘는 도(裪). 태종과 원경왕후의 3子, 비-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영릉(英陵)

국방과 과학 및 경제,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추앙 받음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

대외정책-4군(郡)6진(鎭을 설치  1419.6.19-대마도 정벌

1420-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

1443-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10.9(음9월초순)-훈민정음 반포

과학의 발전-간의(簡儀),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측우기. 활판 인쇄술을 발전, 아악을 정리

1426(세종8).12.3-법전정비 속육전(經濟續六典). 등록(謄錄)을 간행

형벌 제도를 정비.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확립

1429-농사직설(農事直說)

황희(黃喜)(1363~1452)

장영실(蔣英實, 1390년? ~ 1450년?)

5

문종(文宗, 1414~

1452.5)

1450.2~

1452.5

휘는 향(珦).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장자,  현릉(顯陵)

1442-세종이 병상에 눕자 8년간 섭정

1450.2-세종이 승하하자 왕위

1450.3-동국병감(東國兵鑑),1451-고려사, 1452.2-고려사절요 등을 편찬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함

화차(火車)-문종화차를 만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1452.5 -39세 나이로 2년 3개월 만에 승하

6

단종(端宗, 1441.7.23

~1457.12.24)

1452~1455

휘는 홍위(弘暐). 세종의 장손이자 현덕왕후의 외아들,  장릉(莊陵)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지 3일만에 죽음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섭정해줄 대비, 대왕대비도 없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단종1).10.10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안평대군(세종3子)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1454-단종의 측근들이 모두 죄인이 되어 유배되자

1455-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줌

1456.6-사육신 -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

1457-영월에 유배되었다.금성대군(세종6子)-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약을 받음

1457.12.24-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17살 어린나이로 사약을 받음.

1698(숙종24)-묘호를 단종이라 하였음.

7

세조(世祖, 1417~1468)

1455~1468

휘는 유(瑈), 세종과 소현왕후심씨의 2子, 수양대군(首陽大君).광릉(光陵)

1453(단종1).10.10-계유정난(癸酉靖難)

1455- 계유정난으로 조카 단종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

1456.6-사육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 생육신 반발

조선 초기의 왕권 강화 확립-중앙집권제를 확립.호패법을 복원,

국방력 신장

1457(세조3)-동국통감(東國通鑑),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

1459-경국대전(經國大典)편찬을 시작

불교를 숭상하여-원각사(圓覺寺)를 창건

토지제도-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한명회(韓明澮,1415년~1487) 조선전기의 문신,외척,자-자준(子濬),

호- 압구정(狎鷗亭)

신숙주(申叔舟,1417~1475)-조선초기 학자 신장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

훈구파(勳舊派)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학자 

8

예종(睿宗, 1450~1469)

1468~

1469.9.27

휘는 황(晄), 자는 명조(明照)  세조와 정희왕후의 2子,  창릉(昌陵)

1457년(세조3).9. 2- 덕종(德宗,1438~1457)- 세조의 장남,20살의 나이로 요절

1460-11세에 한명회의 딸인 세자빈(장순왕후)을 맞이함

1461.11-왕실의 적통 인성대군을 출산후 17세 나이로 장순왕후가 요절

1462-안순왕후와 혼인

1468.9-19세에 왕위. 정의왕후의 수렴청정

1468-남이의 역모사건

1469-삼포(三浦)의 왜변(倭變)-삼포에서 일본과의 개별무역을 금지

1469.9.27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에 승하

9

성종(成宗, 1457.7.30

~149412.24)

1469.11.28

~1494.12.24

휘는 혈(娎).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덕종)와 왕세자빈 한씨의 2子, 선릉(宣陵)

1469.11.28-13살에 왕위, 자성대왕대비윤씨가 수렴청정

한명회와 정의왕후의 뜻에 따라 섭정, 7년동안 국정의 결정권은 신숙주와 한명회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1476(성종7)-친정을 시작-원상제도를 폐지하여 결제권을 되찾았다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학의 진흥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해  신진세력을 형성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으나 1479년(성종10)에 폐위하고 이듬해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됨

'문화의 황금기'

1474(성종5)-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

경국대전(經國大典)-조선시대의 법령의 기본이 된 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만든 통치의 기본이 되는 통일 법전

신묘대전(辛卯大典)-1460년(세조 6)~1470년(성종1)  완성, 

1478-동문선(東文選).1485-동국통감(東國通鑑).1492-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93-악학궤범(樂學軌範)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간행

홍문관 설치 등 사찰을 폐쇄하는 숭유억불정책을 실천

1479(성종10).1491(성종22)-  여진족을 몰아냄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 되었으며

성종의 도학정치와 태평성대를 맞이함 

사림(士林)=사림파(士林派)

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

사림(士林)의 배경-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대농장을 소유한 훈구세력에 비해 경제 기반이 취약

16C이후 농업과 시장이 발달하여 농업생산성이 향상-농촌의 중소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있게 됨

사림(士林)의 등장

길재의 제자 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후학의 사종(師宗)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의 거두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등용한 것을 계기로 15C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선조 때에는 훈구파를 전면에서 몰아내고.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조선중기의 붕당정치의 단초가 됨

사림은 향약의 보급에 힘썼다 

사림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다른 사상을 철저히 배격

서원을 세워 양반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서원은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함

사림(士林)의 성장

조선 건국 이후100 여년이 흐른뒤 15C말 부터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여

훈구세력과 대립하기 시작

붕당의 출현

10

연산군(燕山君, 1476~1506)

1494~

1506.9.2

휘는 융.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제헌왕후) 소생  연산군묘(燕山君墓)

사화(士禍)-사화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연산군10)- 갑자사화,

1519(중종14)- 기묘사화, 1545(명종 원년)- 을사사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무오사화(戊午史禍)-연산군은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선정을 베풀고자 노력 함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종직을 부관참시(副棺斬屍)

하고, 김일손·권오복·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사초(史草)가 계기 되었다 하여 ‘史’(사)자를 넣어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함

김종직-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연산군10.3월~10월) 궁중파(宮中派)와 부중파(府中派)의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연산군은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 복위문제로 야기되어 훈구와 사림이 피해를 입은 사건

폐비윤씨(?~1482)-연산군의 모친. 1479년 성종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하여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냄.

성종의모친(인수대비)의 분노와 한명회의 훈구세력과 김종직의 사림세력이 가세해서 폐비가 됨.

1482년 그녀의 거처문제가 대두되어,동정을 살펴오라는 나인들과 내시들의

거짓모함에 사약을 받아 사사됨

무오사화 이후 외척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및 육조중심의 부중파로 나뉨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파와 훈구•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세력의 힘의 대결

학문과 민중의 인권 탄압-조선왕조 최대 폭군

1506(연산군12).9.2.-중종반정으로 폐위 됨

장녹수(張綠水,?~1506)-조선 연산군의 후궁

11

중종(中宗, 1488~1544)

1506.9.2

~1544.11.14

휘는 역(懌),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 정릉(靖陵)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신사사화를 초래 

1506.9.2-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왕위

1510년(중종 5)-삼포왜란이 발생 - 비변사 설치

삼포왜란-삼포에서 일어난 일본 거류민들의 폭동사건

비변사-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기 이후의 행정 관청

1554년(명종9) 정규 관청으로 독자적인 합의기관이 됨

임진왜란 때부터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사실상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여 행정, 국방, 인사 등 처리

비변사 기능의 확대·강화는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행정체제를

문란하게 만든다 하여 존폐 논란

1864년(고종 1)-의정부와 비변사의 업무 한계를 규정-이듬해 비변사 폐지

1515-중종은  조광조(趙光祖)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

조광조의 개혁정치-급진적 개혁정치는 훈구 세력의  반발-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기묘사화와 사림의 후퇴

1519년(중종14).음11 -기묘사화(甲子士禍)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趙光祖)가 죽임을 당하고는 등,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

1521(중종16)-신사사화((辛巳士禍)-안처겸(安處謙) 일파들이 심정(沈貞),

남곤(沈袞)등에 의하여 화(禍)를 입은 사건(事件)

12

인종(仁宗, 1515~1545)

1544.11

~1545

휘는 호(峼),자는 천윤(天胤), 중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효릉(孝陵)

1544년 11월에 즉위했으나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인종의 짧은 치세-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승하

13

명종(明宗, 1534~1567)

1545~1567

휘는 환(峘). 중종의 차남으로 문정왕후의 소생.인종의 이복 동생, 강릉(康陵)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

1545-이러한 분위기 속에 12세에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1)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호(岵 .뒤에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奉城君)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賜死)케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盧守愼)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5~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1547년(명종 2)-정미사화(丁未士禍)

1547.9-양서역 벽서사건-윤원형 세력이 윤인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사건

1549년(명종4)-을유사화(乙酉士禍)-이홍남(李洪南), 이홍윤(李洪胤) 형제의 난언(亂言)을 상주(上奏)하여 이홍남이 모역죄로 몰려 그의 아우 이홍윤 등이 능지처참(陵遲處斬)되는 한편, 이에 연류(連類)돈 많은 사람들이 화(禍)를 입은 사건(事件)

1553-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자신의 기반세력을 가지지 못한체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 왕위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뒤 윤원형을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나

1567-34세 나이로 승하

1555(명종10)-을묘왜변-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한 사건

(1559-1562)-임꺽정의 난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이언적(1491~1553)-주리철학의 선구자

이황(1501~1570)-조선 성리학의 대가

14

선조(宣祖, 1552.11.11

~1608)

1567~1608

휘는 연(昖),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 목릉(穆陵)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과 사림정치의 확립

1567-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살 어린나이로 왕위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을 신원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

유교사상 확립

붕당정치 시대의 도래

선조가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림을 많이 등용하고 문치주의로

정치를 이끌어가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사림정권이 등장하면서 사림 내부의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사림의 분열과 붕당   

붕당(朋黨)-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1575(선조8)-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의 결집에서 비롯

동인의 주요인물은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 

사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동인

서인

남인

퇴계계열

북인

남명계열

노론

우암계열

소론

윤증계열

 

이이(李珥)-1536(중종 31)~1584(선조 17)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겪음.

1588- 소학언해 간행

1589(선조22)-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들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

1591년(선조24) -건저의 문제(建儲議問題)

임진왜란(壬辰倭)-1592(선조25)음력 4.13~1598(선조31) 음력 11.19

1583-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

1587-여진족이 대거 침입

1590-통신사 파견

토요토미 히데요시-전국시대를 통일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

1592. 4. 13-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

1593-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 1594-속오군(束伍軍)창설

오군영(五軍營)

임진왜란을 계기로 서울과 그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5개의 군영

중앙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서울의 성곽을 방어-총융청,수어청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년의 제2차 침략만을 언급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이순신(李舜臣)-1545년(인종원년).3.8~1598(선조31)11.19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

15

광해군(光海君, 1575

~1641.7.1)

1608.2.2

~1623

휘는 혼(琿)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묘(光海君墓)

선조는 공빈김씨가 죽자 인빈김씨를 총애하여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인 정철이 광해군을 추천했으나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유배된다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동인을 가까이 둔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다

1592-임진왜란(壬辰倭亂)

1606-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함

1608.2.2-인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여 34세로 왕위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성을 지지한 공로로 북인(北人)이 중용되었다

-대북(大北)이라 함

북인계열은 대북, 중북, 소북의 3개 정파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영창대군을 내세운 소북파는 몰락

실질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정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이 당쟁에 휘말리며 무수한 옥사를

일으켰다

1605-창덕궁,경희궁,창경궁 재건. 1608-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1611-양전사업 실시.

1613(광해군5)-계축화옥:칠서지옥(七庶之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을 다시 간행

1614(광해군6)-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수광(李睟光,1563~1628)- 실학의 선구자.

1611경 명나라에서 천주실의를 가지고 들어와 한국 최초의 서양학문을 도입.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천주교 지식을 소개

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허균-홍길동전, 허준-동의보감

1618-후금(청)건국-군사를 양성하는등 국방방비에 힘씀

1619-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

명과 후금의 양면외교정책을 실시

왕권 강화책

1614-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후 살해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2)- 선조의 아들, 인목왕후 소생, 이름은 의

1615-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

1618-인목대비를 5년간 서궁에 유폐시키고 후궁으로 격하-인조반정의 결정적 명분을 제공

전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강행하여

궁궐 복원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하기 시작

1623-인조반정으로 폐위 됨.

광해군의 유배와 대북파의 득세

1641-67세로 승하

16

인조(仁祖1595.11.17

~1649)

1623.3.12

~1649.1.30

휘는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장릉(長陵) 

원종(元宗,1580~1619)-인조의 아버지 어머니-인헌왕후(仁獻王后)

1623(광해군15)3.12-인조반정(仁祖反正)-서인세력이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무력 정변

1623-대동법을 강원도에 실시

1624(인조2)-이괄(李适)의 난(亂)

1633-상평통보(常平通寶)발행-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처음 유통하였으나 중지하였다가 1678(숙중4)-상평통보를 다시주조.이후 전국적으로 유통

친명배금정책과 호란

1627년(인조5)-정묘호란(丁卯胡亂)-조선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1636.12-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꿈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1637.1)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

17

효종(孝宗, 1619~1659)

1649.5.15

~1659

휘는 호(淏) 인조와 인렬왕후의의 둘째 아들. 영릉(寧陵)

1636-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4)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머물렀다

1645.4-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로 부터 돌아온후 왕위

북벌계획

서인계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 

1651년(효종2)-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의 죽음

1652-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御廳)을 강화하는 등 군사강화책을 모색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

1654.3-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은 데다가 효종도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함

1655-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간행

1655-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보급 

유형원(柳馨遠,1622.1.21~1673)

반계수록(磻溪隨錄)-1653(효종4) 32세 부터 전북 부안에서 1670(현종11)

49세까지 저술. 1770(영조46)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

송시열[宋時烈,1607(선조40)~1689(숙종15)]17c중엽 이후 붕당정치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노론의 영수이자 사장적 지주로서 활동

18

현종(顯宗, 1641~1674)

1659~1674

휘는 연(棩),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장자. 청나라에서 출생. 숭릉(崇陵)

현종시대의 평화와 남인-서인의 예송논쟁

예송논쟁(禮訟論爭)-예법에 관한논쟁,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복상문제

기해예송(1659)-효종의 승하시 정통성에 대한 논쟁, 남인의 윤휴-3년설,

서인-기년설(1년),서인의 기년설 채택,서인득세  당쟁의시작

갑인예송(1674)-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 상복에 관한 논쟁

서인-대공설(9月), 남인-기년설(1년),남인의 기년설 채택, 남인득세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했으나 군비강화에 힘씀

농업의 발전, 조세징수체계의 확립에 노력

1660년 호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1660년 강화도의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이 사고(史庫)를 마련

1672-동활자(銅活字)의 주조를 완성

19

숙종(肅宗, 1661.8.15

~1720.6.8)

1674.8.~1720

휘는 순(焞)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 명릉(明陵)

1674.8.-14세 어린 나이로 즉위, 2차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정권을 수립

숙종-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함. 남인과 서인의 대립.

환국정치-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 파를 완전히 몰아내는 1당 정치를 하는 현상

1680-경신환국(庚申換局)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

1683-노장파송시열의노론(老論)과 소장파윤증의소론(少論)으로 분리되어

당파싸움을 함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

1689-기사환국(己巳換局:기사사화)-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소의(昭儀) 장씨(張氏,장희빈)가 낳은 왕자 균(昀)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문제를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인현왕후 폐위

1694(숙종20)-갑술환국(甲戌換局)-노론,소론이 숙종의 폐비(廢妃)인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 사건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1701-복위된지 7년 만에 인현왕후가 죽음

숙종은 45년 장기 집권하면서 당파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당파연립 방식을을 버리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정당을 교체하는 환국(換局)정치를 실행

1708-대동법(大同法)을 전국으로 확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1712(숙종38)-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1696-안용복 사건

통신사를 3차례(1682.1711.1719)를 파견

금위영(禁衛營)을 만들어 5영을 완성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찬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

20

경종(景宗, 1688~1724)

1720~1724.8

휘는 윤(昀) .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의릉(懿陵)

1690-3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에 병이있는 관계로

노론과 소론이 싸움을 벌였다.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함

1689-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다

1694(숙종20)-갑술환국(甲戌換局)후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희빈은 빈으로

강등된다

1701-경종이 14세 때 장희빈은 사사되어 죽는다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과 노소론의 당쟁격화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는다

노론과 소론간의 권력투쟁은 갈수로 심해져 갔다

1720-숙종이 승하하자 33세 나이로 왕위

경종은 재위4년 병석에서 지내야 했고,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으로

특별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신임사화- 신축(辛丑,1721). 임인(壬寅,1722) 두 해에 걸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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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1694~1776)

1724~1776

휘는 금(昑), 숙종(肅宗)의 차남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들, 경종의 이복동생,

원릉(元陵)

1699(숙종25)-연잉군(延礽君)에 책봉

1721.8-왕세자에 책봉

1724.8-경종이 승하하자 왕위

탕평책(蕩平策)-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 양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쟁을 제거하는데 힘을 썼다

인권존중과 경제정책

신문고 부활. 농업을 장려 민생안정에 힘썼다

균역법(均役法)제정

1727(영조3)-정미환국(丁未換局)소론이 실각하고 노론이 집권

1729-화차를 제작

학문진흥에 힘씀- 문화 예술의 부흥기

영조는 스스로 집필을 하였으며, 인쇄술을 개량해 서적을 간행.반포

육전(六典),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續大典),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 악학궤범(樂學軌範)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1762.윤5.121)

실학의 선구자들

성호이익(星湖李瀷)-1681(숙종7)~1763(영조39)

호는 성호(星湖)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한 실학의 대가, 서학사상에도 관심-천주실의를 연구, 안정복,이가환,이중환,등에 연구 계승되어 정약용이 집대성

성호사설(星湖僿說)-1720년부터 기록, 문중조카들이 정리하여 1760년경 완성한 백과사전

안정복(安鼎福,1712~1791)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산문답(醫山問答)-1766(영조42)

1776- 83세로 승하 조선역대 임금중 최장 재위(52년)을 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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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1752.9.22

~1800.6.28)

1776.3.10

~1800.6.28

휘는 성(祘)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 건릉(健陵).

홍국영(洪國榮,1748~1781정조5)-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탕평책(蕩平策)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정조의 문화 정치와 실학의 융성

실학(實學)-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대두된 일련의 현실개혁적

조선 유학의 학풍

안정복(安鼎福,1712~1791)- 동사강목(東史綱目)-1778(정조2)

북학파(北學派)-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정약용(丁若鏞, 1762.6.16~1836.2 22)-실학의 집대성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노비의 신분상승과 노비정책의 변화

1779-홍국영을 축출하고 친정

1781-규장각(奎章閣)을 완성

서적편찬-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大典通編),동문휘고(同文彙考)

1789-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에 화성을 쌓음

조선시대의 천주교 박해

신해박해(1791,정조15)-신유박해(1801,순조1)-기해박해(1839,헌종5)-병오박해(1846,헌종12)-병인박해(1866,고종3)

1791(정조15)-신해박해(辛亥迫害)-최초의 천추교 박해사건

노론(시파<->벽파)-시파:천주교 탄압을 반대  벽파:천주교 탄압을 찬성

1791-수원성 축성을 단행하였으나 천도계획은 성공하지 못함

왕권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착수했으나,1800.6.28-49세로 승하(정조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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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 17906.18

~1834.11.13)

1800~1834

휘는 공(玜), 정조(正祖)의 차남이자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아들

비(妃)는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  인릉(仁陵)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1800.6.28-천주교에 온화한 정책을 썼던 정조가 승하

1800.7.4-순조가 11세로 왕위.

1804년까지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

정순왕후-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벽파(僻派)를

옹호하여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

1801(순조1)-신유박해(辛酉迫害)-천주교 박해와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를 제거하고 벽파가 정권장악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 정약용. 정약전, 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

1801.10.5-황사영 백서사건

1811-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1815-을해박해(乙亥迫害)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박해

1827-정해박해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1834-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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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憲宗, 1827~1849)

1834

~1849.6.23

휘는 환(奐).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 경릉(景陵)

1834-순조가 승하하자 8세에 즉위.대왕대비인 원순왕후가 7년동안 수렴청정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9(헌종5)3월~10월- 기해박해(己亥迫害)-천주교를 탄압한 사건

프랑스신부 3명을 비롯해 70여명이 순교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고,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여 천주교를 탄압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는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지만, 시(時)파인 안동김씨세도를 빼앗기위해 벽(僻)파인 풍양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

1846(헌종12).6.5-병오박해(丙午迫害),김대건 신부가 순교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썼다.

1849.6.23-23세로 승하

25

철종(哲宗, 1831~1863)

1849~1863

휘는 변(昪)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아들인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의 아들.  예릉(睿陵)

1844년(헌종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으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1849-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1851(철종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60년간 이어진다

세도정치의 폐단-삼정의 문란민란의 발생

1862-진주민란을 시작으로 농민 항쟁이 일어남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실행되지 못함

1860-경신박해

1860(철종11)-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東學)이 발생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 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닳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나빠졌다

1863.12.8-재위14년만에 33세로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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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1852.7.25

~1919.양1.21)

1863~1907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 홍릉(洪陵)

1863.12-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즉위

즉위10년은 조대비의 수렴청정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장악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노골화 된다

1866(고종3)-병인박해(丙寅迫害)-흥성대원군정권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

1866년 시작하여 1873년 대원군이 하야 할 때까지 탄압

6000여 명의 신도와 프랑스신부가 처형. 이 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가 발발

1866-병인양요(丙寅洋擾)-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제국주의적인 전쟁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의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

1866.7.12-제너럴셔먼호 사건, 신미양요의 원인이 됨

1871.6.10-신미양요(辛未洋擾), 조선과 미국간의 전쟁

흥선대원군-쇄국정책

서원정리. 비변사 폐지

1866-명성황후 민비를 맞이함.

개항과 선정

메이지유신:(명치유신明治維新),1868.1.3~1889)

1868.12.19-일본의 사절이 조선 동래에 도착

1873.2-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

1873.12-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 여흥민씨의 척신정치

1875.2-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1875.9.21-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

1876. 2. 27(고종13.음.2.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개항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

강화도 조약의 12개조의 내용

1881-신사유람단

1882-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영국을 비롯해 각국과 우호통상조약

강화도 조약의 성립 후 개화운동을 전개.내정개혁 실시

군제-5군영을 개편하여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

행정기구 개혁-통리기무아문을 설치, 12사(司)를 둠

청의 내정간섭과 정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임오년)6.5 .개화와 척사의대립 

민씨세력

개화론

일본의 침투

대원군세력

위정척사론

국민의 반발

(강화도조약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구식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 결과: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게 된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12.4(고종21.음10.17)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민씨세력의 소극적 개화정책에 반발하여,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한 정변.

국민주권국가 건설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

김옥균의 3일천하-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

(청군대:4000)-(일본군대:200)명 정도.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

결과:청의 내정갑섭 지속

한성조약(조-일).텐진조약(청-일). 청•일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강화

10년뒤 청•일전쟁 발발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 내용 참고

거문도사건(1885~1887)

1886-사노비세습제의 혁파를 천명

동학운동과 갑오개혁

동학운동(1894.3월과9월)-동학지지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봉기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1894.양.7. 27(음.6.25)~1895.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 운동.1차 갑오개혁.2차 갑오개혁.을미 개혁(3차 갑오개혁)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

청일전쟁:(1894.7.25~1895.4)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

1894.7~8월-흥선대원군이 달포에 걸쳐 섭정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4.음.12..12(1895.양.1.7) -홍범 14조를 반포

을미사변(乙未事變)-1895.음.8.20(양력.10. 8)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1.~1897..2.20)고종과 세자가 경복궁(건청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1897(고종34)10.13-대한제국 선포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국호를 대한민국,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

시민계급 성장과 독립협회

1896.7월- 독립협회(獨立協會) 설립

1905.4.29-형법대전을 편찬.반포

일본의 침략과 강제퇴위

1905.11.7-을사조약(乙巳勒約):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1907.8.1-군대(軍隊)를 해산(解散)

1907-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 함

1919.1.21-경운궁에서 붕어,고종의 독살설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됨

27

순종(純宗, 1874.음2.8

~1926.양4.25)

1907~1910

휘는 척(拓). 고종과 명성황후의 차남, 고종의적자. 유릉(裕陵)

가족-<완친왕:이선(墡)(고종의서장자)><의친왕:이강(堈)(5子)><영친왕:이은(垠)(7子)-대한제국의 마지막황태자. 의민황태자><덕혜옹주>

1874.2.8-고종과 명성와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 왕세자로 책봉

1895.1.8(양력)- 홍범14조(洪範十四條)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7-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자 제위

순종은 자녀가 없는 관계로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망국의 황제 순종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다른 식민지 열강세력을 몰아내고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1910.8.22-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합병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이왕(李王)으로 불림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1910.8.29~1945.8.15

마지막 황손

영친왕의 아들-이진(장자),이구(2子) 의친왕-이건(장자),이우(2子),

이홍길(3子,)이창길(4子),이명길(6子),이형길(7子),이경길(8子) 이충길(9子), 이영길:이석(10子),이홍(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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