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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매창

파라클레토스 2010. 11. 16. 06:28

부안의 매창공원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란 시비가 있다. 허균과 매창, 두 사람은 시로 맺어진 순수한 사랑으로 유명하다. 마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작가 보바르 부인이 지적 우정을 맺었듯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601년 7월 23일, 허균의 나이 32세 그리고 매창의 나이 28세에 이루어진다. 1601년 6월 허균은 해운판관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두어 다니러 다니다가 부안에서  매창을 만난다. 그는 조관기행에서 그 만남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23일(임자)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 당시 매창은 이귀 李貴의 정인이었다.  이귀는 이웃 고을 김제군수였고 명문 집안의 사대부이었다. 그랬으니 매창도 이귀에게 마음이 끌리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귀는 1601년 3월에 전라도 암행어사 이정형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한다. (이귀는 훗날 인조반정의 주역이 되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즈음에 허균이 매창을 만난 것이다. 척 만남에서  허균은 매창이 이귀의 정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매창을 만나고 보니 얼굴은 별로 아름답지 않지만, 글재주와 거문고 타는 솜씨는 대단하여서 이야기가 통하고 정을 느낀 것이다. 이 일기에는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시로 화답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고 적혀 있다. 어쩌면 허균은 처음 본 순간 매창에게서 저 세상 사람이 된 누나 허난설헌(1563-1589)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 날 밤, 허균은 매창과 몸을 섞지는  않았다. 비록 유학의 예교를 무시하고 문란하게 기생들과 놀아나고 상중에도 성생활을 하여 삭탈 관직을 당한 적이 여러 번 있는 허균이었지만, 친구 이귀의 애인과는 차마 잠을 잘 수 없었으리라. 


하기야 매창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허균이 멋진 남자이긴 하나 몸까지 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매창은 오해 받지 않으려고 자기의 조카딸을 침소에 들여보내었다. 


한편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7년뒤  1608년 (광해군 1년) 가을이다. 이 7년 동안에 두 사람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허균은 매창을 항상 그리워한 것은 그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1608년 8월 허균은 공주군수를 하다가 파직을 당한다. 충청도 암행어사가 고을 수령들의 비위가 일 처리를 조사하였는데 허균이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는 장계가 올려진 것이다. 이후 허균은 부안현 우반동 선계폭포 위에 있는 부사 김청택의 별장 정사암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국조시산>을 비롯한 여러 글을 많이 썼다.


이 시기에 35살의 매창과 39세의 허균은 여러 번 만났으리라. 그리고 시와 노래뿐만 아니라 불교에 관하여도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이는 1609년 1월에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참선은 하는 지를 묻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해 12월에 허균은 서울로 올라간다. 그리고 큰 형 허성을 만났다가 형의 추천으로 승문원 판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허균은 친구 이원형으로부터 매창에 대한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매창이 허균을 못 잊어서 밤에 거문고를 타곤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가 1611년에 전라도 함렬로 귀양 가서 지은 <성수시화>에 나타나 있다.)


부안(扶安)의 창기 계생(桂生)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 一曲瑤琴怨??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 亦有佳人墮淚無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李汝仁)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의 호)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허균은 이 일로 인하여 세 차례나 사헌부 관원들에게 탄핵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허균은 1609년 1월 매창에게 편지를 보낸다.

  

    계랑(桂娘)에게 보냄 기유년(1609) 1월


계랑이 달을 바라보면서 거문고를 타며 산자고(山??) 노래를 불렀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바로 윤공의 비석(尹碑) 앞에서 부르시어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었소. 석자 이름 비 옆에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계랑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정말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參禪)은 하시는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편지는 일종의 항의 편지이다. 그런데도 말미엔 연서 같다. 산자고는 자고새이다. 산자고 山?? 노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뻐꾸기와 자고새의 일화가 있다. 뻐꾸기는 알을 낳으면 자기의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자고새의 둥지에다가 살짝 갖다 놓는다. 그러면 자고새는 그 알을 품고 키운다. 자기 새끼인줄 알고. 그런데 알에서 태어난 뻐꾸기는 금방 둥지를 날라가 버린다. 한마디로 키워준 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에 자고새는 새끼를 잃고 허탈해 한다. 이 자고새가 부르는 노래가 아마 매창이 불렀던 노래 아닐까.

 정만 주고 떠난 임을 원망하는 노래. 가 버린 임이 야속하여 부르는 노래. 유희경도 이귀도 허균도 , 산자고 노래를 부른 비석의 주인공 윤부사도 떠나 버린 지금 그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36세의 퇴기 매창은 그 때 몸도 마음도 병든 신세였으리라.

   

  1609년 2월  허균은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의주로 간다. 그는 명나라 사신을 잘 접대하여 광해군은 흡족해 한다. 그리고 9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이 된다. 그의 죽은 부인도 숙부인 직함을 받게 되어 그는 숙부인 교지를 부인의 영전앞에 바치면서 함께 영화를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그의 아내는 임진왜란때 피난길에서 아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안 기생 매창에게도 편지를 쓴다. 매창은 허균이 아내 다음으로 생각을 많이 한 여인이었고  끝내 육체적 사랑을 욕심내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기유년(1609년) 9월  계랑에게 보냄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것이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제 풍류객 진회해(秦淮海 송(宋)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선관 禪觀 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편지 종이를 대할 때 마다 마음이 서글퍼진다오.




    봉래산은 부안의 변산을 말한다. 허균은 부안이 그리움을 먼저 이편지에서 쓰면서 작년말에 부안에서 살겠노라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을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허균은 매창과 10년 동안이나 사귀었지만 끝내 욕정은 없었음을 이야기 한다. 이 편지에도 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만큼 매창과 허균은 불가의 선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이 편지 말미에는 허균의 매창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다음 해 여름인 1610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허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래 만시 두수를 짓는다. (이 시는 허균의 <병한잡술>에 있다.) 


계생 桂生은 부안 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 경지에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두수를 지어 슬퍼한다.




  제 1수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 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妙句堪擒錦

 淸歌解駐雲

    偸桃來下界

     竊藥去人群


시는 비단을 펴는 듯 하고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하는 재인 매창. 그녀는 복숭아를 훔쳐 먹은 죄를 지어 이 세상으로 내려오더니  불사약 훔쳐 먹고 달나라 요정이 된 항아처럼 이 세상을 떠났는가. 아! 너무 애달프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희미한데

비취색 치마엔 향기 아직 남았네.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설도의 무덤을 그 누가 찾을는지.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明年小桃發

     誰過?濤墳



그녀와 같이 지냈을 적의 부용장과 비취 치마의 향기가 아직도 남았네. 나는 그녀의 체취를 아직 못 잊네. 그런데 내년 봄 복사꽃 필 때는 누가  당나라 시인이며 기생인 설도 같은 매창의 무덤을 찾을까. (허균은 유희경 ? 이귀 ? 허균과 사랑과 시를 주고받은 매창을 당나라때 원진 ? 백거이 ? 두목과 시를 주고받은 기생 설도에 비교하고 있다.)


설도는 우리가 잘 아는 가곡 동심초의 원작자이다.


동심초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春忘祠           춘망사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동심초 노래는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의 춘망사 4수중 3번째 시인데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번역을 하였고 김성태가 곡을 붙여 탄생되었다 한다.  춘망사는 설도가 원진(779-831)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이다. 설도는 나이 40세에 10년 연하인 원진과 사랑을 하였으나 원진은 양가집 규수와 결혼을 하였다. 기생인 설도는 떨어진 꽃이었고, 원진은 정을 줄 수 없는 바람이었다.

  봄을 떠나보내면서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부질없이 풀잎만 맺은 애련시 哀戀詩. 이런 맺지 못할  사랑이야기는 뭇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허균은 이런  사연을 가진 설도를 매창과 비교한다. 매창, 그녀도 유희경, 이귀, 허균과 사랑을 맺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으니 정말 애달프다.



 제2수


    처절하여라,반첩여의 부채여

    슬프기만 하여라, 탁문군의 거문고일세 

    흩날리는 꽃잎은 속절없이 시름만 쌓고 

    시든 난초 볼수록 이 마음 상하네. 



    凄絶班姬扇

    悲?卓女琴

    飄花空積恨

    衰蕙只傷心




죽은 매창의 신세가 반첩여의 부채처럼 처절하여라. 그리고 탁문군의 거문고처럼 슬프구나. 흩날리는 꽃잎과 시든 난초를 보니 매창도 저렇게 시들어서 저 세상으로 간 것 같아 슬프다. (반첩여(班??)는 한나라 성제 때의 궁녀로서 한때 성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로 총애가 옮겨가자 자신의 신세를 소용 없는 가을 부채[秋扇]에 비유하였다. 탁문군(卓文君)은 한(漢) 나라 촉군(蜀郡) 임공(臨?)의 부자 탁왕손(卓王孫)의 딸로서 과부로 있을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서 그의 아내가 되었는데 후에 사마상여가 무릉(茂陵)의 여자를 첩으로 삼자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봉래섬에 구름도 자취가 없고 

    푸른 바다엔 달마저 벌써 잠기었으니

    이듬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남아 있는 버들로는 그늘 이루지 못하리라. 


    蓬島雲無迹

    滄溟月已沈

    他年蘇小宅

    殘柳不成陰




이제 구름도 자취가 없고 달도 지니  이듬해에 봄이 와도 기생의 집에는 찾아가는 사람도 없으리라. (소소는 남제(南齊) 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의 이름. 일반적으로 기생의 범칭으로 쓰인다.)



                                                       ( 2009.2.17 작성)

 

출처 :국화처럼 향기롭게 원문보기   글쓴이 : 김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