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 선
위만조선은 초창기 때는 한나라 정권이 상당히 우호했다
위만이 실권자였던 여우에게 봉작까지 받고 한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러주변을 정복했다
3대가 지나자 우거왕 때에는 한나라와 적대관계
한무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폄
한무제- 중개무역
무제는 흉노와 대치
흉노는 초창기때 한나라를 처서 막대한 재물을 얻었고
그것을 팔아 다시 이득을 챙기고 다시 한나라를 공격해서
무제-서역을 공격
위만 -한나라와 진국과 중개무역을 독점
진국은 누구인가?
무제- 위만에게 중개를 방해하지 말라고 요동태수 섭환?을 보냄
고조선에선 비왕(세자정도)을 협상 자리에 보냄
협상이 결렬되자 섭화는 비왕을 죽인다
화가난 우거왕은 요하를 건너서 요동태수를 죽임
이 계기로 전쟁이 일어남
한무제 2차례 원정군을 파견
1차 실폐 2차는 나름대로 성공을 했지만 내분이 일어남.
1년간 싸움 왕검성 안에 내분이 일어남 주전파와 주화파가 싸움 형성,
주화파는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
한사군이 설치된다
고구려의 정치조직
고구려는 주변의 독립 세력과 느슨한 연합관계를 형성, 연맹왕국 성격을 띠었고,
누층적 지배구조이므로 읍락의 수장이 맘에 안들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다른 세력에 가거나 남쪽으로 내려감
조선상 역계경 조선왕에 간언을 해서 안들어 주니까
2000명을 대리고 남(진국)으로 내려갔다
상 -토착적 기반세력을 가진 부족장의 명칭
경-국가 직속 관리
경과 상을 같이 사용했다는 것은
그때 당시 직속관리가 토착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은 나름대로 관료제도가 존재하고, 관료조직이 있었다
왕 세자 비왕 (세자나 세력가, 고구려의 고추가나 신라의 갈문왕정도)
장군 상각 경각 대신각
고구려 관등에 명칭이 없는것은?
위만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은?
중국쪽에선 조선은 중국의 이주자가 성립된 국가이다
조선은 중국이 세운 나라이다 주장
한국학계 유이민과 토착민족의 연합정권이다
동이계-중국의 동쪽의 이민족 그중엔 우리나라도 포함
산동반도에 무시사상이 형성된다
단군신화 나오는 풍백 우사, 곰이나 호랑이가 등장
단군신화를 공유하고 있던 민족들이 이미 화북지역이나 산동반도에 존재했다
이들이 은 주 교체기에 이동을 했다
이들은 같은 맥족 계통의 신화 계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위만조선은 우리민족이라 볼 수있다
일제시대는 고조선 관점이 없었다
조선사는 한사군부터 시작하므로 신화로 간주 했다
고조선 연구는 일제시대가 지났을 때 연구
고조선을 연구하려면 청동기 시대가 형성되어야 하므로 1960년대부터 유물이 발견
새롭게 청동기 시대를 형성
에전엔 청동기 시대도 없었다
그 당시 토착인 신석기에서 한사군이 철기를 가져와서
신석기에서 청동기 없이 철기로 이어졌다고 주장
우리나라 발전은 중국에 의한 것이다
8조법- '한서 지리지'
성문법보다는 관습법을 적었을 가능성
국가를 공동체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개개인 가족을 대상으로 함 공동경제에서 개별경제로 넘어갔다고 본다
개별경작-철기
국가 반영이 아닌 개별경제-읍락공동체 를 탈피했다
사람을 죽인자 죽이고
상처를 준자는 곡식을 받고
노동력이 생산력과 연결되어 노동력을 중요시함
사유재산보호-돈을 훔친자는 엄벌에 처하고 배상해도 노예가 됨
신분계급엄격. 노예제도가 정착
여자의정조를 중시하였다
여자가질투를 하면 질투한 여자는 돌로 때려죽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형성
한사군
고조선이 망하자 4개군을 설치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대동강 주변에 있던 낙랑의 위치가 중요 나중에 황해도 지역까지 넓히고 황해도에 대방을 세움
낙랑과 대방은 미천왕 313점령을 당하고
다른 곳은 중국으로 편입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논란 2가지 설
일제시대 -민족주의 윤내영 제북설-만주 요하에 있다고 주장
제남설-실증사상 이병도-한반도 내에 있었다
북한에서는 한사군을 어떻게 보나?
요동지역에 설치되고 한반도엔 고조선이 멸망한 때 낙랑국이 설치 되었다 주장
대동강에서 나온 유물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낙랑국의 유물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낙랑공주는 낙랑군이 아니고 낙랑국이다 주장
남한과 북한의 경제가 다르다
한사군의 정책
한사군은 정치적 지배에 관심이 없었다
모든지역에 관리를 보내 통치하는 거보다 물건을 매개로 간접통치하는 방식
낙랑군은 평양만 통치하고 나머진 기존의 부족장들에게 위탁
물질을 대주고 간접통치
다수의 통치자는 소소의 통치자를 분열정책
염사치-한사군의 분열정책을 대표하는 에피소드
한사군 분열정책 반대세력이 형성
외부에 경쟁이 있으면 내부에선 단결력이 강화되어 국가 형성
한사군은 항상 부정적인 입장만은 아니었다
중국 문물을 수입해서 고대국가 발전에 도모했다 긍정적인면도 있다
북한 지역과 남한지역의 한사군의 대응방식이 다르다
북방 고구려가 대표적인 나라
고구려는 현도군에 있는 고구려현에 있었다
고구려는 현도군을 물리치면서 그 지역을 차지했다
고구려가 주 부족을 통치하면서 한사군의 을책(머리모양을 보면 고구려인과 한사군을 구별할 수 있었다)을 다 수거해서 통치해버린다
한사군에선 책구조(통행 허가증)를 만듦
한사군과 대항해서 고구려군은 현도군을 몰아내고 낙랑지역을 몰아냈다고 주장
남한지역에서보는 관점은 협조체제라 본다
진개의 이주 고조선 유이민 이주, 위만조선 유이민 이주
철기 문화를 유입
이때부터 남쪽에서 자체적으로 철기 무기를 만듦
사회구조가 변화생김
남한에서는 한사군과 협조하면서 생활했다고 주장
한사군 -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통
60조법이 생김
사회가 복잡해짐
고조선 정통이 붕괴되고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법제도가 바뀜
고조선 [古朝鮮]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전한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고조선과 한사군
고려까진 단군조선만을 칭함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다르게 표현함
조선은 이씨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묶어서 고조선이라 했다
고조선의 건국 배경
고조선은 청동기 바탕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이승휴 제왕운기 고조선의 창간연대 BC2333년
신석기 시대였으므로, 3이란 숫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2333년으로 정했다.
단군왕검이란-특정한 사람이 아니고, 제정일치의 지도자, 일반명사 왕에 버금가는 칭호로사용
7대단군이 있었다.
고조선에 관련된 기사는?
신집이사 -고기, 남아있지 않다
간자 -제나라. 고조선에 관련된 최초의 사료
산해경 -고조선의 위치와 관련된 책
단군신화는 어디에 기록했나?
문자로 최초로 문자로 기록한 것은?-삼국유사
제왕운기-3조선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BC2333년을 강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그 뒤에 기록된 사서는 삼국유사와는 내용이 다르다
한서지리지는 단군신화 기록이 없다. 중국책이므로 신화는 외국에서 기록하지 않는다
단군신화의 사회 경제적 의미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철기문화를 받아들인다
청동기시대-농경생활, 왜구침입---방어하기에 좋은 구릉지대에 거주
사유제도, 계급분화
환웅부족과 본부족이과 연합
단군신화
청동기 시대개념과 철기시대 개념과 기자조선 개념으로 분류
철기 시대 개념으로 보는 경우- 환웅부족이 본부족을 연합하고 다른 부족은 멸망시킨것
홍익인간- 현재적 관전으로 해석-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청동기 시대 개념-너희들이 내말을 들으면, 평안할 것이다
내 부족의 말을 들으면 청동기 문화를 주겠다.
고조선의 세력범위(국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영역국가(특정한 범위)가 아니라, 세력범위가 아니다
★ 읍락간누층적구조
잡거-한곳에 몰려있는 것이 아니고 혼재했다
세력범위 -4가지구분
고인돌
비파형 동검-청천강 이북과 이남 모두
미송인 신토기 -북방만 남방세력권은 알 수 없다
거친무니 거울
한반도 한반도 비파형 동검과 북쪽의 비파형 동검이 차이가 있음으로 세력범위와
유물들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이족의 세력범위-중국의 동쪽을 말 함
우리민족도 포함되지만 우리민족이 아닌곳도 많다
동이족이 세력범위와 우리고조선의 세력범위와는 연관하지 말것
고조선의 중심지
1. 요녕설-요동반도-요하강 중심으로, 경도는 만리장성 -요서까지
2. 평양설-폐수는 평양이었다고 주장
3.절충설-이동설-원래는 요녕 이었는데 평양으로 이동했다
연왕과 다툰지역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
초창기 요녕설
최근에는 평양설을 수용
북한사람들 세계4대문명권에 대동강 문화가 포함해서 세계5대문명을 주장
민족주의자-요녕설-만주족과 우리민족은 같은 민족이다 주장
사대주의, 실존주의자- 평양설- 일본과 관련된사람들이 주장
실증적인입장을 둔 것보다는 정치적인 입장에서 해석했다.
북한사람들 5대문명권 대동강 문화권을 주장
만주 원류고-청나라에서 나옮
청나라-만주족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마의태자가 항쟁하다 금나라로 가서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
만주족과 우리나라가 같은 민족이 되어야 하므로
정약용등 실학자-만주에 있으면 오랑캐니까
평양설주장-고조선은 원래 평양에 있다고 주장
이동설을 주장하는 이유-고고학적 증거+문헌학적 근거
비파형 동검의 지역- 요동부터 요하와 대릉하
BC4~3세기 세형청동검 요동에서 청천강 이남에서 발견되어
이것은 요녕에서 나중에 평양으로 이동했다 주장
BC4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을 받고 이동
우리나라 철기 도입한 시기는?
철기1차- BC4~3세기 진개의 침입을 받고 연나라 제철 기술이 도입
청천강 이북지역에선 철기로 농사를 지었다.
남쪽은 아직까지 청동기시대었는데 고조선의 유이민이 유입되어
청천강 유역에 좀더 세련된 철기가 유입
철기2차- BC1세기-위만 -철기문화
북쪽철기 문화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남쪽에서도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다
변한은 철기를 더욱 발전시켜 중국에 역 수출했다
기자조선을 바라보는 관점?
은나라 후손-은나라는 주나라에 망하자
주-은나라 사람들(조상)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조상이므로 조선이란 땅을 주었다
조상을 죽이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다
학계에선 기자 조선을 문제 삼아 교과서엔 기자조선을 부정한다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면과
기자 조선을 존재하지 않았다 주장
인정하는 측면-기자조선은왕을 칭하는 말이 있다는 주장
여러 조선 중에 하나였다. 정치 세력이 있다
3번째 관점
기자조선은 대릉하> 요동> 평양으로 이동했다
4번째관점 윤내영 고고학적 재 해석
기자 -기후방정이란
정-적립하다란 의미는 3개의 형태가 하나로 이루어졋을 때 사용
정(향로)의 받침대에 기자 의 기가 있었다
기자조선을 처서 위만 조선세우고>>>위만 조선은 단군 조선을 처서 단군 조선은 대동강 이남으로 이동
위만 조선은 한무제가 공격 기자조선. 우만조선은 다시 돌아감
한사군 -요동에 설치했다
1.기자조선을 부정했다
2.실존주의자-제남설
기자 조선을 부인하는 주장
한----조선
한나라에서만 존재했고 다음 세대엔 기록이 없다
한나라만 기자 조선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조선
요동지역은 인구가 많고, 요서지역은 인구가 적다
수....당, 인구가 없어서 식량, 수탈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요서지역은 사막지역을 왜 통과하면서 왔겠는가? 의문
고조선 청동기와 중국의 청동기가 다르다
고조선-후대학자 인식문제
그때 그 시점에서 고조선을 인식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단군조선은 같은 민족이라고 했다. 16C까지 유지
이익 안정복-삼한정통론 성리학적정통성을 주장
17~18세기-성리학적 가치관을 더 강화되었다
기사 조선이 망할 때 삼한으로 넘어왔는데,
마한위주로 마한정통론을 계승하고 주장
위만조선 3대86년간 유지. BC3세기 준왕
BC221진나라가 통일했다가,
유방-항우 한초전 7년간 전쟁에서 유방 승리 한나라 건국-군국제 실시
중앙은 내가통치하고, 지방엔 지방 세력에게 맞김 신하들이집권-내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성이 같은 사람들을 우대, 다른성을 가진 사람은 반란을 염려해서 많은 신하 죽임, 한신-토사구팽 염포등 사살
연나라위치-베이징을 중심으로 있는 나라
한무제-여러왕을 죽임. 연왕 노관이 의심을 받게 되자 북쪽에 흉노와 결합해서 반란을 제기해서 사살당하고,
노관에 소속된 위만이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
위만-중국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중요한 문제
고조선이 중국 역사에 편입되는 경우와
고조선이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하는 경우가 발생
위만-상투를 틀었다.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주장
중국은 장발. 만주족 거란족-변발 앞머리 밀고 옆머리는 뒤로 묶는 것
위만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고 주장
위만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이다 주장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
◇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
아사달 [阿斯達]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세 가지 학설
재요녕성설
재평양설
중심지 이동설
△ 여러 설이 제기되는 이유
△ 낙랑군 조선현
고조선의 세력 범위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
1. 미송리식 토기
2.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
결론
본문내용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세 가지 학설
재요녕성설
고조선의 중심지가 계속 요녕성 지방에 있어서 고조선의 멸망까지 요동이라는 것이다. 주로 북한학계의 학설이다. 북한 학계에선 1950년대 후반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 1960년대 초 재요녕성설이 정설로 되었다. 이후 북한 학계는 만주 지역에서 진행된 청동기 시대 유적 ·유물의 발굴 성과를 원용하여 재요녕성설의 논거를 확충하는 등 3O여 년 간 재요녕성설을 정설로 견지해 왔다. 그러다가 돌연히 1993년 이른바 ‘단군릉' 발굴을 경계로 재평양설을 취하게 된다.
재평양설
주로 남한학계의 학설이다. 여러 문헌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대동간 이남에 있다는 것을 기초한 학설이다. 1993년 이후 북한의 학계 역시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다.
중심지 이동설
최근 유력시되는 남한학계의 학설이다. 원래 중심지는 요녕성이었으나 연 소왕과의 전쟁으로 크게 땅을 잃어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는 학설이다. 이러한 근거로는 고조선 역사의 시기에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변화하였는데 현재의 평양에선 고조선후기의 유물인 세형동검만이 출토되었고, 더 나아가 요녕성 지방에선 고조선 초기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요녕성지방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한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녕성지역에서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 여러 설이 제기되는 이유
현재 북한학계에서는 재요녕성설을 정설로 하고 있고 남한학계에서는 재평양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논란의 이유는 고대사에 대한 문헌자료의 절대적인 부족과 함께 단편적인 기록이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함에 일차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 앞서 고대의 지명은 오늘날의 고유 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패수’라는 단어의 경우 고대에 강이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쏘여 곳곳에 패수(浿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 경우도 있다. 이처럼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에 있어서 추상적인 기준으로 인해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다. 평양이라는 단어 또한 대동강유역의 평양뿐만 아니라 요하지역에서도 같은 지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지명의 위치에 대한 비정, 고대사에 대한 실증의 문제, 각 시대마다의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고조선
고조선 BC.2333년 단군왕검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
세계 사학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체 신화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부인하고 신화로 뒤바꿔
한국사를 시작부터 식민지 역사를 왜곡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이 신화가 아니고 실제 역사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은 계속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의 8조법은 생명존중을 바탕으로 한 계급 사회였으며
고유의 화폐를 사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한 특징을 보여주어,
고조선이 국가로서 기틀을 다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내 사학계에서 아직까지 연나라 화폐로 인정받고 있는 명도전은
사용연대, 출토범위로 보았을 때 고조선의 영역과 시대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중앙정부가 지방지도자들에게 하사한 신검으로
그 출토지역의 범위를 미루어 고조선의 영토를 가늠할 수 있다
한반도는 전세계의 70%고인돌-고조선 역사와 연관이 깊다
고조선의 수도인평양의 대동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서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의문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구멍의 배열상태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별자리와 일치하는 고대의천문도 라는 것을 밝혀냈다
천문도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는 1200년이므로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천문도 보다1800년이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천문도가 그려진 고인돌의 수가 200여개에 이른다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동양의 피라미드군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집트와 남미에만 있다고 믿던 피라미드가 동양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수가 백 여개 이상
큰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크고
고대 기술로는 연 인원 백만 명이 동원된 엄청난 토목공사였다
탄소 측정결과, 제작 시기는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2000년이나 빨랐고
황하 문명보다1000년 앞서 형성된 것이었다
최초 발굴당시 이 피라미드에서는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 유물이 쏟아져 나와
고조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무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아시아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을 만든 민족은 한민족의 선조들이었다
만약 이 동양의 피라미드가 고조선, 또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우리가 알지 못했던고대문명의 흔적이라면 세계4대문명은 동양 피라미드군으로 교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기자조선 [箕子朝鮮]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한인(韓人)이 단군조선을 이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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