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사학의 결정체 한사군(漢四郡)
일본 총독부의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조선의 역사를 일본보다 짧게 만들어라'라는 명을 받은 이마니시 류는 '이병도'라는 일대 최대의 역사 사기꾼을 양성했고 이병도는 그 스승인 이마니시 류의 사관을 충실히 전파하여 제 2의 이병도들을 양성시키니 현 사학계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제의 쓰레기'들이다.
일단 일본은 한국의 역사를 실라 중심의 역사로 편찬하여 만주에 대한 한국의 연관성을 철저하게 제외시켰고 그에 대한 결정체가 바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세웠다는 한사군이다.
일제 식민사학의 새끼들인 한국 사학자들은 일단 한무제의 침입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했고 조선 땅에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하여 다스렸고 후에 주몽이 다물군을 일으켜 한사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세우니 조선은 겨우 독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이며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와 화북 일대에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지나의 사료를 보면 순체와 양복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왜 한무제는 조선을 정벌한 공신들을 사형에 처한 것일까?
이게 어딜봐서 개선장군들에 대한 대우란 말인가?
사실 양복과 순체는 고두막루 칸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고 고두막루 칸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위만조선의 영토를 나누어 내려주니 이것이 바로 지나족들이 그토록 우겨왔던 한사군의 정체이다.
일제는 지나의 사관을 그대로 한국사에 접목시켜 한국의 영토를 한반도 내부로 한정하는 것과 더불어 고주몽의 독립을 한사군에 대한 저항이라고 왜곡하여 지금의 베이징까지 이르렀던 위 가우리의 영역을 터무늬없이 작게 만들어 벼렸다. 사실 고주몽은 한사군과 충돌한 일이 없으며 한사군은 위 가우리가 일어나자 지나족들에게 들러붙어 민족을 배신했고 후에 위 가우리와 위 밝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2. 한 VS 훈제국
한고조 유방에 의해 일어난 한나라는 초기 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서 각지의 왕들을 제거했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할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몽골평원에서 모돌 선우가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새로운 천하의 강자로 떠올라 동호족과 월지를 연달아 격파한 뒤 한나라로 밀려오자 한은 무려 4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막도록 했지만 훈제국 기마부대의 위력에 눌려 대패하고 마니 한나라는 훈제국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겨우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로도 훈제국은 계속 침입해 와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며 더많은 공물을 요구했고 이에 굴복한 한은 공주들마저 공물로 바치는 치욕을 당한다.
한나라 7대 수장인 유철은 훈제국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건을 간첩으로 파견했지만 장건은 도리어 훈제국에게 하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장건은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훈제국의 내부를 철저히 파악했고 13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은 한나라에 돌아오자마자 훈제국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군대는 기병 중심으로 편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대완을 습격, 하늘의 말이라 불리는 대완마를 손에 넣었다. BC 122년, 한무제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하여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훈제국을 공격하게 했고 이때 18세의 어린 나이로 처녀 출전한 곽거병은 1만의 정예병으로 1만 9천 명의 훈제국 군대를 격파하는 수완을 올렸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한무제는 50년간 훈제국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은 것을 기뻐하여 장건을 박망후에 봉하고 그 공을 치하했다.
한나라에 맹공에 당황한 곤사왕은 대천자 선우에게 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휴도왕에게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안했으나 휴도왕이 이를 거절하자 휴도왕을 암살하고 그 처자식들을 포로로 삼아 한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곽거병은 이후에도 계속 훈제국에 원정하여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유철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3. 한무제의 치욕
50년간 받아온 훈제국의 압박을 걷어낸 한나라는 이후 강성해져 그 눈을 훈제국과 맞먹는 힘을 가진 부여로 돌렸다. 그전에 한무제는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한나라 연왕의 부하 위만의 손자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명했지만 우거가 이를 거절하자 누선장군 양복과 우장군 순체에게 위만조선을 멸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수군은 낙랑의 수군에게 대패하여 물속으로 사라졌고 육군은 한나라 군대가 무서워 출전하지 않는 비겁한 우거왕을 죽인 협, 음, 참 장군과 고두막루 칸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쫒겨나고 말았다. 한무제는 크게 노하여 우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 참모인 공손수를 참형에 처했고 그 시체는 길에 버렸다. 고두막루 칸은 협, 음, 참 장군과 낙랑의 최장군에게 위만조선의 영토를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주국인 북부여를 몰아내고 졸본부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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