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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차이 

파라클레토스 2009. 5. 13. 14:49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차이

 

1.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진개(秦開)와 연(燕)의 오군(五郡)

 

번조선(番朝鮮)은 B.C. 350년에 북막(北漠)와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가, B.C. 343년에 연이 화친을 청해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았았다.

그러나 B.C. 341년에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고 B.C. 339년엔 안촌홀(安寸忽 : 安市城)을 돌파하여 험독(險瀆 :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기후(箕후)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이에 연이 화친을 청하고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연의 장수인 진개가 번조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다.

 

그후 B.C. 323년에 연의 역왕(易王)이 왕이라 칭하는데 번조선에서는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기후가 이를 계승하여 번조선왕(番潮鮮王)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를 한다.

 

B.C. 305년에 북호(동호)와 함께 번조선이 연의 상곡을 공격했고 연이 진개를 보내 B.C. 300년에 동호(북호)와 번조선을 쳐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上谷),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번한이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엿던 창여(昌黎)를 말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B.C. 226년에 연을 치자 왕인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가 B.C. 222년에 멸망을 당한다. 이에 진시황은 B.C. 214년에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 조, 연의 장성을 연결한 것이다.

 

진시황이 B.C. 215년에 갈석산을, B.C. 209년에 2대 황제인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갈석산은 즉 요동에 있었다.

 

<한서> 지리지에는 요동왕 한광의 도읍이 무종(無終)이었으며, 후한서 원소열전엔 "양평(襄平)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하며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盧龍縣)의 서남에 있다"고 하였으며, 진서 당빈전엔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터 갈석에 닿았다"고 했고, 통전(通典)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고 했으며, 진서(晋書)에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고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위만(衛滿)과 번조선(番朝鮮)의 멸망

 

한(漢)의 고조(유방)는 B.C. 202년에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관)으로 연왕에 봉하였는데 그가 죽자 노관은 B.C. 195년에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때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그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였다. 이 당시 이곳에는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해 온 연, 제, 조의 무리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위만은 이들을 이끌고 B.C. 194년에 번조선을 쳐서 멸망시킨다. 상하운장의 서쪽 경계에는 진나라 당시 변방 초소인 요동외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멀어 지킬 수가 없어서 연과 진이 쌓았던 옛 요새인 요동고새 (遼東故塞)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요동고새란 산해관(山海關)이다.

 

위만은 새(塞)⇒패수(浿水)⇒상하운장(上下雲障)⇒왕검성(王儉城)으로 이동해 갔는데 새와 패수 사이는 말을 달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여기서 패수란 한나라 당시 패수인 난하가 아니라 요동외요가 있던 진나라 당시의 패수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로 상하운장은 100리였으며 이곳과 육율하 사이였고 지금도 그 사이엔 황지(荒地) 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진(秦)과 번조선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사군(漢四郡)의 허실

 

1) 한과 위만조선

 

사기(史記) 조선전에 보면 한무제는 양복으로 해군을 이끌고 제(齊 : 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고 순체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요동)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이 당시 발해(渤海)란 현재와 같이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며 요동은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로 산해관에서 출발했고 위만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발해의 북쪽과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 이며, 왕검성은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에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2) 전쟁의 결과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에서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는 공을 도둑질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樓船 :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섭하 : 전사 ㉡위산 : 사형 ㉢공손수 : 사형 ㉣순체 : 사형 ㉤양복 : 서인(庶人)이 됨

 

전쟁의 결과를 보면 한(漢)도 우거(위만의 손자)도 모두 패한 전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북부여기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의 유철(무제)나 평나를 쳐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東明)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유민(번조선의 백성)을 이끌고 한의 세력을 격파한 것이다.

 

한편 <한서(漢書)>에는 이 전쟁에서 한나라로 투항한 자들이 후(侯)에 봉해졌는데 그 지역과 이름은 다음과 같다.

 

㉠ 획청후 삼(획淸侯 參) : 제 (齊:산동지역)에 봉해졌고 천한 2년(B.C. 99)에 조선의 망노(亡虜)를 감춰 주어 옥에 갇혀 병사함.

㉡ 평주후 협(平州侯 협) : 양부(梁父)에 봉해졌고 원봉 4년(B.C. 107)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온양후 최(溫陽侯 最) : 남양에 봉해졌고 태초 3년(B.C. 102)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추저후 음(萩저侯 陰) : 발해(渤海)에 봉해졌고 정화 2년(B.C. 91)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기후 장(幾侯 長) : 하동(河東)에 봉해졌고 원봉 6년(B.C. 105)에 조선(朝鮮)과 모반하므로 죽임

 

이들 5명은 연과 제나라의 땅에 봉해졌는데 3명은 수명이 다해 죽었고 2명은 조선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만일 위만조선이 멸망당한 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여기에 나타난 조선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한의 세력을 격파하면서 고두막이 요하의 동쪽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인 것이다.

 

즉,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가 멸망하기 전에 조선상 역계영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그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가니 그를 따른 자가 2천여 호나 되었다."고한 진국(辰國)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족에 있던 북부여를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이란 삼조선(진, 번, 막조선)의 통칭으로, 그 중심세력인 진조선을 이어받은 북부여 또는 진국으로 표기된 것이다.

 

3) 한사군의 진상

 

현 강단 사학계에서 한사군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으로 되어 있고 이들 대부분을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사기> 조선전에는 이러한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120년 후에 저작된 후한서에서야 그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만일 4군이 설치되었다면 그 당시(한무제)의 인물인 사마천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구나 <한서지리지>에는 진번과 임둔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고, 가연전(賈捐傳)에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진번과 임둔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번과 임둔은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 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의 두 고을을 쳤다고 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한서지리지>에, B.C. 108년에 3군(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하고 B.C. 107년에 현도를 설치하였다고 하였고 B.C. 86년에는 낙랑을 남부도위 (7현)와 동부도위 (7현)로 나누었다고 하였다.

 

또 B.C. 81년엔 진번을 폐하여 낙랑에 포함시키고 임둔을 폐하여 현도에 포함시켰다고 무능서에 나오는데 이 책의 저자인 사마여상(司馬如相)은 한무제가 조선을 친 것보다 10년 전인 원봉 6년 (B.C. 117) 에 죽은 자로 그가 10년 후에 일어날 사실을 말했다는 것도 위증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자 고두막이 이들을 격파하면서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으로 이동해 졸본부여를 세웠으며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다시 요하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이 당시 진번과 임둔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거나, 아예 설치되지 않았던 것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어 실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이며 그 설치 연대 또한 매우 혼돈되어 있다.

 

 

 

2. 한사군(漢四郡)에 대한 일제하의 역사조작 과정

 

1) 1887년 일제(日帝)는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함.

 

2) 1889년 사학과 주임으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의 거두인 랑케(Ranke)의 제자 독일인 리스(Riess)를 초빙하여 사학회(史學會 : 회원 40명)를 조직하고 사회학 잡지 (1892년에는 사학잡지로 개칭)를 발간하였다. 이 당시 요시다(吉田東伍), 하야시(林泰輔), 스가(管政友), 나까(那珂通世), 시라또리(白烏庫吉), 쓰보이(坪井九馬三), 시데하라(幣原坦) 등이 한국관계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3) 1907년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 정부의 명령에 의해 '만주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어 동경제대 교수인 시라또리와 쓰다(津田左右吉), 센나이(箭內亘), 마쓰이(松井等), 이바나(稻葉岩吉), 이께우지(池內宏) 등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 등을 간행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의 주체적인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용시킴으로써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만선사(滿鮮史)를 주장하였다.

 

4) 1909년 동경제대 교수인 도리이(烏居龍藏)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 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해 남만주(南滿洲)에 파견하여 그는 <남만주 조사보고>를 제출하였다.

한편 조선통감부가 조선의 고적조사를 동경공대 교수인 세키노(關野貞)에게 의뢰해 '고구려([高句麗) 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平壤)지역의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5)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이미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완료한 도리이(烏居龍藏)의 제언에 의해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여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조작하기 위한 전초작업이다. 이들은 평양지역 고분을 2차로 발굴해 벽돌로 쌓여진 현실(玄室)내에서 한대의 양식인 동경과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다.

 

6) 1911년 10월 세끼노(關野貞)가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이 이것을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대방군(帶方郡)이라고 조작하고 있다.

 

7) 1912년 4월 9일 세끼노 등이 사리원역 부근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8) 1913년 9월 23일에 대동강변의 고분분포 지역의 중앙인 강언덕의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고 실제 그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답사해 기와 파편을 채집하였는데 이 토성을 그들은 한(漢)의 낙랑군의 치소(治所)로 조작하였다. 또 9월 30일에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今西龍)가 5회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서 용강이 점제현(낙랑군 소속)으로 조작되었다.

 

9) 1915년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에서 '편찬과'를 설치해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였고 12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0) 19196년 7월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1) 1919년 2월 조선총독부가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12) 1920년 야마다(山田孝雄)에 의해 봉니(封泥)에 대한 가치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13) 1921년 가을 세노끼는 야마다가 수집한 '낙랑태수장'의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조사 하였으나 단 한 점도 얻지 못했다.

 

14) 1922년 10월 30일 '낙랑태수장'의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50원이라는 고가로 사들임. 이 해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 64호에 의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위원에는 어윤적(魚允迪), 이능화(李能和), 정만조(鄭萬朝), 유맹(劉猛), 이마니시(今西龍), 이나바(稻葉岩吉),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등이었다.

 

15) 1923년 '조선우위'라는 봉니가 토성리 부근 촌부의 손으로부터 평양 이심법원 검사장인 세끼구찌(關口半)의 손에 들어감.

 

16) 1925년 5월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었고 6월 6일에 일제 천황(天皇)의 칙령 제28호에 의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독립관청으로 설치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구로이따(黑板勝美), 핫또리(服部宇之吉), 나이또(內藤虎次郞), 야마다(山田三良), 이윤용, 위원에 최남선, 이능화, 어윤적, 윤필구, 현채(玄采), 홍희(洪熹), 유맹, 이진호, 이마니시(今西龍), 도리이(烏居龍藏),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오따니(大谷勝眞), 후지다(藤田亮策), 간사에 김동준, 정교원, 손영목, 엄창섭, 이대우, 이동진, 신필구, 이병욱, 수사관에 이나바(稻葉岩吉), 후지다(藤田亮策), 나까무라(中村榮孝), 스에마쓰(末松保和), 홍의, 신석호, 수사관보에 이병도(李丙燾) 등이다. 이들은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고 위원회에서 편찬의 방침을 결정하고 수사관, 수사관보 등이 실제 편찬업무를 담당하였다.

 

17) 1926년 4월에 경성제국대학에 법문학부가 개설되었으며 5월엔 옛날 대마도(對馬島) 도주인 무네(宗)백작 집안에 소장되어 내려온 조선관계 사료 전부를 몰수하였다. 이 당시 평양경찰서 경부보 우시무라(牛村三郞)와 상공회사 기사인 모리오가(諸岡榮治) 등이 완전한 봉니와 파편 및 단편을 여러 개 입수함.

 

18) 1930년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이었던 나까무라(中村榮孝)가 주동이 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조선사편수회 요인들로 구성되어 한국인으로서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등이 있으며 이 회는 <청구학총>을 발간하였다.

 

19) 1931년 12월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사들였고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朝鮮史)>의 일부가 인쇄에 들어갔다.

 

20) 1934년 2월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구입함.

 

21) 1937년 <조선사([朝鮮史)>가 35책으로 완성되었는데 16년간 100만원이라는 거액이 투자된 것으로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모든 자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선택이 행하여져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을 되도록 많이 수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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