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뉴스

[박윤석의 시간여행]정부없던 시절, 어린이날과 어버이대회

파라클레토스 2016. 5. 9. 06:02



[동아일보]
1925년 5월 1일. 그날은 노동절이자 어린이날이었다.
일체의 사회운동을 강력 단속하는 치안유지법이 막 공포된 살벌한 시절이어서 노동자들의 가두 행진은 없었다.
다만 어린이들의 행렬이 그를 대신했다.
광복 이후 5월 5일로 변경되기 전까지 어린이날은 한동안 5월 1일이었다.

이날 하루를 ‘어린이 데이’로 선언한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60만 장의 전단과 1만여 장의 포스터가 전국에 뿌려졌고 200여 단체의 20만 회원이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어린이날 특별 호외를 발간하여 그 행사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주최 측을 대표하여 소파 방정환은 “이날은 메이데이이자 어린이날인 까닭에 서로 뒤섞이는 폐가 없지 아니합니다만 메이데이는 메이데이이고 어린이날은 어린이날”이라고 선언했다(동아일보 1925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1925년 5월 1일자 어린이날 특집 호외.

3주년 맞이 어린이날 기념 놀이가 식전행사로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북촌 일대에 폭죽이 터지는 것을 신호로 여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가슴에 어여쁜 꽃을 꽂고 소년소녀 어린이들을 인도하여 길거리를 돌며 오색 전단을 가두에 살포했다. 종이마다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가 잘 살아날 도리는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희망을 살리자, 어린이를 위하자.’(동아일보 1925년 5월 1일자)


오후 3시부터 경운동 천도교회당 넓은 뜰에서 어린이날 축하식이 열렸다. 그곳은 어린이운동의 창도자인 방정환의 활동 거점이었다. 월간 아동잡지 ‘어린이’도 거기서 발행되고 있었다. 운집한 어린이들은 ‘소년운동 만세’를 세 번 연창하고서 저마다 손에 쥔 고무풍선 5000여 개를 일제히 공중에 날려 보냈다.


풍선마다 주인 되는 어린이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풍선을 주워 닷새 안에 천도교당 내에 위치한 ‘소년운동협회’로 가져오는 이에게는 소정의 상품을 준다고 했다. 그중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간 풍선을 가져온 어린이 10등까지 시상토록 했다.


이어 오후 4시부터 열다섯 팀으로 나뉜 어린이 행진대가 저마다 네 줄로 행렬을 지어 다양한 구호가 적힌 깃발을 높이 들고 천도교당을 나섰다. 소년소녀들은 노래를 부르며 안국동을 거쳐 종로로 진출해 비각 앞을 돌아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황금정으로 해서 동대문과 창덕궁 등 서울 중심 각 방면을 누빈 뒤 다시 천도교당으로 돌아왔다.


가두 행진은 끝났지만 행사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천도교당과 종로 YMCA에서 동시에 축하오락회가 열려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시내 어린이들이 연합하여 준비한 동화극 가극 같은 공연을 선보였다.


오락거리가 드문 시절에 5월 1일 하루 종일 진행된 ‘어린이 대회’는 그렇게 끝나고 다음 날에는 ‘어머니 대회’가 열렸다. 유익하고 재미난 교양 강연을 비롯한 경축행사가 오후 2시부터 벌어졌다. 어머니 대회가 끝나고 밤에는 같은 장소에서 8시부터 ‘아버지 대회’가 이어졌다. 연극과 무용, 음악 공연이 펼쳐졌다. 어버이날이 없던 시절이었다. 어른들의 두 행사는 입장료 10전씩을 받았다. 그 수익금은 3일째 날 오전 11시부터 속개된 ‘직업소년 위안 야유회’에 경비로 쓰였다.

3일간의 이 모든 일정은 정부 없는 나라에서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행사였다.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그러한 구호가 머리 제목을 장식한 동아일보 호외에는 방정환의 특별기고가 실렸다.


소년운동협회 대표 자격으로.

“예전 스파르타 사람들이 이웃나라와 싸워 패전하였다. 전승국에서 ‘너희 나라 어린 사람 100명을 우리나라로 보내라’고 하자 ‘우리가 모두 죽을망정 어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낼 수 없다. 차라리 어린이 대신 우리 큰 사람 100명이 가겠다’고 하고 적국의 노예로 자진해 갔다.”

방정환은 그 심정을 이렇게 유추했다. ‘지금은 너희에게 졌을망정 우리 어린이대에도 질 줄 아느냐. 우리가 종이 될망정 우리 어린이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우리의 장래까지 빼앗기는 것이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