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노비안검법, 과거제,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에 힘쓰며
혁신적인 개혁을 한 광종
그런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피의 군주’
‘참소를 좋아한 광기의 왕’
500년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에게
왜 이런 꼬리표가 붙은 것일까?
■ 7년의 기다림 끝에 개혁의 칼을 뽑다!
형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4대 왕이 된 광종(光宗). 당시 치열했던 후계싸움으로 왕실은 혼란스러웠고, 그 사이 호족들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이에 광종은 호족의 힘을 인정하고 고개를 낮춘 채 때를 기다리는데...
956년 마침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라는 개혁의 칼을 뽑아 든다!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하게 한 제도지만 여기에는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하려는 숨은 뜻이 있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세력과의 정면대결이자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 광종의 개혁 파트너 쌍기(雙冀)
개혁에 물꼬를 튼 광종은 노비안검법에 이어 과거제를 실시한다.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 그런데 과거제 시행을 주도한 이는 고려인이 아닌 귀화인이었다. 중국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로 이루어진 과거제.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광종은 쌍기를 특히 아껴 한림학사의 관직을 내리고, 집과 여자와 재물을 주는 등 파격적인 우대정책을 펼쳐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까지 했다는데.....
광종의 총애를 받으며 고려에 파란을 몰고 온 인물 쌍기(雙冀). 그가 고려에 귀화하게 된 사연은? ‘이광용이 만난 사람, 쌍기와의 대담’ 에서 낱낱이 파헤쳐본다!
■ 빛나거나 미치거나, 두 얼굴의 군주
이로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이들이 뜻을 얻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였다.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광종의 계속된 왕권 강화책은 신료와 호족들의 강한 불만을 일으켰다. 960년, 광종은 공신세력을 대표하는 준홍과 왕동이 모반했다는 구실을 시작으로 개혁에 반(反)하는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한다. <고려사>는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고 기록한다. 광종은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자신의 조카들까지 처형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마저 의심하여 멀리하기에 이르는데..... 광종은 왜 피의 숙청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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